정말이지 눈 깜짝할 새에, 거대한 공룡이 사라지듯 필름이 멸종됐다. 코닥이 망했고, 값비싼 필름 카메라들은 순식간에 골동품이 되었다. 극장 영사기가 디지털로 바뀌기 시작할 때만 해도 촬영만큼은 필름으로 하는 게 더 화질이 좋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 차이를 대폭 좁힌 혁신적인 ‘RED’카메라가 나오면서 촬영 또한 디지털로 바뀌었고, 게임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2008년 93.9%에 이르던 필름 영화 상영 비율은 2011년 19.6%로 줄어들었고, 올해는 1.2%에 그쳤다. 급기야 이번 8월로 영화진흥위원회의 필름 현상 장비가 모두 해체된다고 한다. 다른 민간 현상소들도 필름 작업을 더이상 하지 않으니 글자 그대로 한 시대의 완벽한 종결이다. <설국열차>가 아마도 한국영화의 마지막 필름 작품이 될 듯하다. 그래도 나는 필름 시대의 말미에 데뷔해 세 작품 모두 필름으로 찍었구나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제 영원히 필름의 그 아름답고 깊이있는 화질을 못 보게 되었다고 여기니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물론 이제 감독들은 필름값을 걱정할 필요없이 원하는 만큼 카메라를 돌릴 수 있게 되었고, 극장 상영 프린트에서 비가 내리고 먼지가 쌓이는 것을 보며 화낼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편리함과 제작비 절감을 위해 예술적인 어떤 부분을 포기한 것은 분명하다. 하나 LP에서 CD로 넘어갈 때도 이랬을 것이다. CD 역시 단지 싸고 편하다는 이유로 더 낮은 수준의 매체인 MP3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처럼 자본주의 시대에서 효율성과 편리함은 종종 기술의 완성도와 예술적 성취보다 우위에 있다.
나아가 무엇보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특정 영화의 독과점 문제와 교차상영 피해 등은 예전의 필름 프린트 상영시대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과거엔 투자•배급사가 프린트를 몇개 찍어내면 극장은 그걸 그대로 틀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디지털 파일이기에 극장 맘대로 흥행 순위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가장 큰 수혜자는 결국 극장인 셈이다. 그러나 너무 편한 세상이 된 걸까? 요즘 CGV는 레터박스마저 제대로 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불만을 사고 있다. 실제로 얼마 전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 시사회에서는 이 영화가 2.35 대 1 화면임에도 상하 가림막을 내리지 않고 1.85 대 1 스크린으로 그냥 영사를 하는 바람에 화면 위아래에 뿌연 스크린이 남아 마치 집에서 홈무비를 보는 듯했다. 극장은 디지털의 편리함과 효율성에 안주해선 안된다. 필름이 사라졌다고 해서 단순히 디지털 파일을 틀어주는 것이 극장이라고 여기면 곤란하다. 여전히 영화는 꿈의 공장이며, 관객은 분명히 집에서 곰플레이어로 동영상을 보는 것과의 차이를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