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의 날씨]
[영하의 날씨] 아,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2013-08-26
글 : 김영하 (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 김현영 (일러스트레이션)
<설국열차>에서 편집당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다

여자 1, 꼬리칸 승객: 네? 여기가 꼬리칸이라고요? 그럴 리가요. 여기가 딱 중간이에요. 제 뒤로도 꽤 많은 칸이 달려 있는 걸로 알아요. 어떻게 아느냐고요? 딱 알죠.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그 사람들이 다 틀렸을까요? 그럴 리가 없죠. 뭐, 생활이 만족스러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먹고는 살고 있어요. 메뉴가 좀 단순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예요? 지금 이 판국에 자기가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고 사는 사람 어딨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죠. 밖은 얼음 지옥이잖아요?

남자 1, 꼬리칸 승객: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정말로 기차에 타고 있다고 믿는다니 놀라워요.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좌우로 쏠리기는 하지만 이건 다 시뮬레이션이죠. 여기가 기차라는 걸 누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우린 그냥 어떤 감옥에 갇혀 있는 거예요. 왜 감옥에 있느냐고요? 글쎄요. 뭔가 잘못을 했겠죠. 인생을 되짚어보면서 그걸 생각하고 있어요. 어차피 여기서 할 일도 없는데요. 근데 이게 좀 중독성이 있어요. 옛날에 뭐 잘못했나 곰곰이 생각하는 거요.

남자 2, 머리칸 승객: 너무 답답해요. 앞이 안 보이니까요. 전망이 없어요. 여기서 이렇게 끝장이 날 거라고 생각하니 끔찍합니다. 진짜 머리칸 사람들은 정말 사람답게 산다고 들었어요. (귓속말로) 여기가 머리칸이라고들 하는데 실은 꼬리칸일 거예요. 더 앞쪽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고요? 제가 안 해봤겠어요? 시도해봤죠. 그런데 어디쯤 가니 거기가 끝이라며, 엔진이라며, 더 갈 수 없다는 거예요. 누굴 바보로 아나? 치사하게 싸우기도 싫고 해서 그냥 돌아왔어요.

소년, 머리칸 알바: 그래요. 저 꼬리칸 출신이에요. 지금은 레스토랑 주방에서 접시를 닦아요. 어깨너머로 요리를 배우고 있는데 아마 요리사 하나가 죽어나가기 전에는 그 자리 꿰차기 어려울 것 같아요. 기차 안에는 질 좋은 일자리가 너무 부족해요. 그래도 전 여기가 좋아요. 주방 한구석에서 웅크리고 자기는 하지만 꼬리칸보단 나아요. 여기선 그래도 음식다운 음식을 먹잖아요. 춥지도 않고요. 게다가 꼬리칸은 너무 위험해요? 제 말뜻 아시죠? 서로가 서로를 등쳐먹고 사는 데니까요.

남자 3, 머리칸 승객, 교수: 나도 알아요. 이 시스템에는 문제가 있어요. 언젠가는 붕괴될 겁니다. 왜냐고요? 불평등 때문이죠. 머리칸 승객과 다른 승객들 사이의 격차가 너무 커요. 민주주의는 제한적으로만 기능하고 있어요. 고대 아테네처럼 일부 선택받은 시민들만 투표권과 선거권을 행사하죠. 폭동이 빈발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윌포드라는 인간, 정치력이 제로에 가까워요. 무능한 지도자죠. 결국 이 기차는 외부 모순이 아니라 내부 모순에 의해 무너질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민주주의를 너무 폭넓게 허용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자원이 극도로 제한돼 있고 이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배분할 수 있는 엘리트 계층은 한정돼 있어요. 외부 환경은 또 얼마나 혹독합니까? 붕괴는 기정사실이지만 그 시기를 최대한 늦추는 것도 지도층의 임무입니다. 내가 보수라고요? 이거 보세요. 정치를 책으로만 배우셨어요? 이념은 상대적인 거예요. 당신은 이 기차가 처해 있는 특수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여기서 나 정도면 엄청난 진보주의자예요. 당신 논리대로라면 아테네 시민들은 모두 수구꼴통이었겠네요? 노예제도 용인했고 여자는 정치에서 배제했으니까요.

남자 어린이, 머리칸: 어디 가느냐고요? 학원이죠. 왜긴요. 공부해야죠. 모든 게 경쟁이잖아요. 엄마가 공부 안 하면 꼬리칸으로 내려간대요. 바퀴벌레 먹고 살게 된대요. 가봤냐고요? 어린 제가 거길 어떻게 가요? 그리고 거긴 애들 막 잡아먹고 그런다는데요.

남자 4, 때로 머리칸, 때로 꼬리칸, 상인: 저요? 제가 지금 좀 바쁜데요. 아시잖아요? 얼마 전에 폭동이 있었거든요. 머리칸에 가서 의약품을 좀 구해와야 해요. 꼬리칸에 다친 사람이 많거든요. 공짜라니요. 사오는 거죠. 가는 길에 꼬리칸에서 구한 것들을 팔기도 하고요. 꼬리칸에서 팔 게 뭐 있느냐고요?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교환될 수 있어요.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에도 시장은 있었다잖아요. 왜냐하면 인간의 필요에는 한계가 없으니까요. 꼬리칸 사람들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보이죠? 아니에요. 총을 들이대도 내놓지 않을 것들도 내 앞에서는 다 자진해서 내놓습니다.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일수록 별 희한한 걸 다 움켜쥐고 있어요. 자, 보세요. 가족 사진, 이젠 재생도 못하는 CD나 DVD, 면도날, 아이 신발, 배터리가 닳아서 가지도 않는 손목시계, 낡은 잡지, 헌책. 뭐 이런 것들이에요. 근데 머리칸 사람들은 이런 물건에 사족을 못 쓰죠. 빈티지잖아요? 머리칸 사람들이라고 좋겠어요? 이 좁은 기차 안에서 몇 십년을 살고 있는데? 이런 환경일수록 추억이 사치품이에요. 정치인들은 기차의 파멸을 막고 있는 게 자기들이라고 생각하죠. 천만의 말씀. 나 같은 장사꾼들 덕분에 사람들이 폭력 없이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자발적으로 나누게 되는 거죠. 평화? 그건 장사꾼들이 만드는 거예요.

여자 2, 꼬리칸 승객: 아이 둘을 키우고 있어요. 남자아이 하나, 여자아이 하나예요. 이 기차에 탄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어요. 남편은 끝내 못 탔어요. 집에 뭐 두고 왔다며 가지러 갔다가 그대로 헤어졌어요. 여긴 먹을 것은 충분히 주니까 굶어 죽을 걱정은 없는데 애들이 걱정이에요. 자꾸 사람들을 선동해서 폭동이다 뭐다 일으키려는 사람들 있잖아요? 우리 아들 녀석이 자꾸 그 사람들을 따라다니면서 칼싸움이나 흉내내고…. 고작 일곱살짜리가 그런다니까요. 여긴 교육 여건이 너무 나빠요. 보고 배우는 거라고는 싸움질뿐이니.

여자 3, 미용실 사장, 머리칸: 사람이 너무 부족해요. 미용사가 부족해도 충원할 방법이 없어요. 폭동 때문에 꼬리칸 애들은 무서워서 데려다 일을 가르칠 수가 없어요. 꼬리칸 사람들은 알아야 돼요. 자꾸 분란을 일으키면 진짜 손해를 누가 보는지를요. 꼬리칸 애들은 믿을 수가 없어요. 아무리 잘해줘도 마지막엔 배신을 때린다니까요. 지난번 폭동 때는 가위 들고 저한테 덤비는 바람에 완전 식겁했다니까요. 요즘 유행하는 머리요? 레게 스타일인데, 이게 원래는 꼬리칸에서 유행한 거예요. 머리칸의 잘나가는 승객들은 오히려 꼬리칸 스타일로 꾸미고 다녀요. 자긴 남들과 다르다 이거죠.

남자 5, 시인, 꼬리칸: 시를 써서 뭐하냐고요? 그럼 달리 뭘하죠? 몸은 갇혀 있는데… 언어는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가둘 수 없잖아요?

남자 6, 전직 영화 투자자, 머리칸: 나중에 세상 좀 따뜻해지고 눈 좀 녹고 그러면 여기서 겪은 일들 영화로 제작할까 해요. 대박 날 것 같지 않아요? (갑자기 낙심하며) 아, 볼 관객이 없겠구나. 인류가 절멸했으니. 아쉽네. 완전 대박 아이템인데.

이 모든 군상들을 싣고 오늘도 기차는 설원의 소실점을 향해 무정하게 달려간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