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인생무상의 멜로드라마
2013-09-05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무협영화를 경유하여 결국 왕가위가 가닿은 곳은

무술인 엽문을 소재로 한 왕가위의 영화 <일대종사>에서 엽문의 아내 장영성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불산의 비 오는 어느 밤이다. 엽문과 장영성이 헤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1953년 대륙의 국경은 막혔고 엽문은 홍콩 신분증을 갖게 됐다”는 후반부의 자막 이후 고독한 상념에 빠진 엽문이 그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므로 이 장면은 엽문이 기억하는 아내 장영성의 마지막 모습으로서의 플래시백이다. 영화 초반부에 잠시 등장했던 장영성은 영화 내내 잊혔다가 후반부에 문득 이렇게 다시 돌아와 이내 퇴장한다.

장영성의 등장 분량은 너무 짧아서 왕가위가 엽문과 장영성 사이의 이야기를 애초에 이렇게만 촬영했을 것이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실제로도 장영성 역의 송혜교는 3년여간 촬영하며 훨씬 더 많은 장면에 출연했다고 알려져 있다. 신빙성 없는 풍문으로는 극중 엽문(양조위)과 팔극권의 달인인 일선천(장첸)의 뜨거운 무술 대결 장면이 촬영되었지만 삭제되었다는 말도 있고 예상외로 늘어난 궁이(장쯔이)의 역할에 양조위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는 말도 있으니 이 문제는 비단 한 인물에 국한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이것이 사실이건 그렇지 않건, 많이 찍고 많이 버리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왕가위의 그 창작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새삼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요컨대 많은 촬영 그러나 촬영된 내용의 일부의 선택이라는 과정에 뒤따르는 부재 혹은 생략이라는 형식이 왕가위 영화의 구조와 무드에 기여하는 활동성과 중요성을 말하기 위해서다.

가령 <화양연화>가 왕가위의 현존하는 최고작이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가 왕가위의 미학적인 모든 것들을 포괄한 가운데에서도 부재와 생략의 구조화를 가장 우아하게 성취하여 마침내 고양된 감정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수리첸이 (실은 차우를 상대로 하여) 남편에게 자백을 받아내는 연습을 하는 장면, 그 역할극의 한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 각자 배우자의 불륜 사실을 캐내다가 자신들도 가까워져 불륜에 빠져버린 차우와 수리첸을 각각 양조위와 장만옥이 연기했는데, 그들은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각자의 배우자 역할까지 1인2역을 했다. 양조위의 등장하지 않는 아내를 장만옥이, 장만옥의 등장하지 않는 남편을 양조위가 연기했다. <동사서독>의 임청하가 한 인물의 내면적 양면성을 표현하기 위해 1인2역을 한 것이라면 <화양연화>의 그들은 영화에는 결코 제대로 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인물들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1인2역을 한 것이다.

거의 모든 영화에서 숏과 리버스숏의 관습적 자리를 위반하는 왕가위가 유독 이 영화의 차우와 수리첸의 역할극 장면에서는 관습적으로 정확한 숏과 리버스숏으로 찍을 때, 한번은 진짜인 것처럼 하여 우리를 놀라게 한 뒤에 두 번째는 가짜라는 걸 아는 상태에서 같은 방식으로 한 차례 더 진행할 때, 그 숏과 리버스숏은 각자의 배우자의 자리가 형상적으로는 부재할지언정 존재론적으로는 확고부동하여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형식적으로 역설하며 무한한 애상을 남긴다. 더군다나 그 연습은 다름 아니라 자신들의 사정에 해당하고 후반부 그 자신들의 이별 연습과 연관되며 그때의 숏과 리버스숏에는 이별을 예정하는 자신들의 미래가 담겨 있어 더없이 슬픈 정조를 자아낸다.

부재와 생략이 배치되고 활용되는 방식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처럼 태작은 아니지만 <화양연화>처럼 뛰어나지도 않은 <일대종사>는 기존의 왕가위 영화의 매력과 흠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아한 시각적 스타일로서의 색감, 속도감, 시간성을 지운 추상적 공간 등의 매력을 지닌 동시에 원화평의 무술 연출을 답습하는 덜 창의적인 무술 액션 장면과 그다지 유기적으로 묶이지 않은 몇몇 장면 연결이라는 흠을 포괄하고 있다. 하지만 그 매력을 칭송하거나 흠을 비판하는 것을 떠나 지금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은 부재와 생략들이 배치되고 활용되는 방식이다. 혹은 부재하고 생략된 것들 중 일부가 돌아와 활용되는 방식이다. 그것으로써 이 영화의 정체와 무드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점이 <일대종사>를 전통적 무협영화가 아닌 실존했던 무술인을 주인공으로 한 멜로드라마에 가까워지게 하는 숨겨진 핵심부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화양연화>가 공공연한 멜로드라마라면 <일대종사>는 무협영화를 가장한 멜로드라마다. 다만 이 영화가 멜로드라마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는 건 무용한 일이다. 어떻게 멜로드라마가 되느냐는 것이다.

알려진 바와 다르게 <일대종사>가 엽문 1인의 연대기가 아니라 실존 인물 엽문과 가상 인물 궁이라는 2인의 주인공을 지녔다는 점부터 말해야겠다. 누가 일대종사의 자리에 오를 만한 자격이 있는가 하는 무협영화의 예의 그 통과의례를 한 차례 거치고 나면 엽문과 궁이는 만나게 된다. 그들의 결투이자 감정 교감의 장면들이 지나고 나면, 이후부터 엽문의 이야기와 궁이의 이야기는 거의 동등할 정도로 별도 진행된다.

영화는 두 주인공이 겪어나간 1930년대의 일들을 거의 온전히 기술한다. 엽문의 무술인의 길, 일본 점령 그리고 점령기의 엽문의 궁핍한 삶, 일본 편에 서서 궁이 아버지 궁보삼을 죽이는 제자 마삼의 행위, 그리고 그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궁이. 그런데 이때 영화에서 한 가지 의아한 일이 발생한다. 특정한 시간, 즉 1940년 이후 1950년 이전이라는 10년의 시간을 영화는 완벽히 건너뛴다. 1940년에서 멈춰 섰던 영화는 10년을 생략하여 부재하는 시간으로 남긴 뒤 이내 1950년에서 다시 시작한다.

아무래도 이건 의아한 일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영화 속 에필로그의 시간에 해당하니 그렇다 해도(1960년대와 70년대에 사망한 장영성과 엽문의 죽음을 영화는 후반부에 짧게 자막으로 처리한다) 인물들 인생의 주요한 시간이라고 할 만한 이 10년은 왜 사라진 것일까. 왕가위가 1940년대의 엽문의 삶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거나 1940년대 분량의 엽문과 궁이를 촬영하지 않았다고 믿기란 어렵다. 어쩌면 이것 역시 촬영했으나 반영되지 않고 부재와 생략이라는 형식으로 번안된 일련의 구조적 연쇄작용일 거라 생각된다. 우린 사라진 이 10년이 무엇을 가능케 하기 위한 것일까 물어야 할 것이다. 이 10년은 사라졌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된다.

사라진 10년에 대한 몇개의 추론

첫 번째 내놓을 수 있는 추론은 이때가 1940년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왕가위는 무언가 1940년대라는 시대를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종전, 국공합작 실패,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등의 일이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을 때 거기에 휘말리거나 영향받았을 만한 홍콩의 역사, 그 안에 있는 엽문과 궁이의 삶을 묘사하는 것을 기피하고 싶었던 것인가. 혹은 엽문의 일대기로 보았을 때 1940년대의 그에게는 영화화할 만한 별다른 사건이 없었던 것인가. 하지만 홍콩의 역사성을 허구의 극과 큰 불편없이 유연하게 내내 결합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엽문의 일대기를 충실히 그리는 영화가 아니라 엽문이라는 실존 인물을 근거로 한 허구의 이야기들이 자유롭게 기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두 가지 추론은 다소 힘을 잃는다.

그렇다면 1940년대라는 시대가 아니라 10년이라는 세월, 즉 1, 2년이 아니라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생략하는 것이 중요한 건 아니었을까. 이것이 우리의 또 다른 추론이다. 10년이라는 물리적 세월의 깊이가 중요했을 것이라는 이러한 추론은 10년의 처음과 끝에 놓인 영화의 극점이 어디였는지 짚을 때 신빙성을 갖게 된다. 가령 장면들이 놓인 순서를 생각해보자. 궁이가 아버지를 죽인 마삼에게 복수하겠다고 사원에서 결심하는 장면 뒤에 이 생략된 10년이 놓여 있다. 그리고 1950년, 짧은 자료 화면이 흐르고 홍콩에서 무술인의 길을 새롭게 가려는 엽문의 일보가 시작된다. 궁이의 이야기가 일면 끝나고 긴 세월이 생략된 뒤에 엽문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아직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궁이에게서 엽문으로 이어지는 사이에 생략된 이 10년은 그 둘 모두에게 맹세의 세월이다. 궁이가 사원의 불상과 벽면에 대고 했던 것은 정해진 정혼을 깰 것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것이고 그러고 나면 평생 자식도 없이 무공 전수도 하지 않으며 살 것이라는 맹세였다. 반면에 엽문은 홍콩에서 새롭게 무술 지도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때에 한심한 패거리 일당을 물리친 뒤, 벽에 단추 하나를 못박는다. 이 장면은 엽문의 실력이 녹슬지 않고 누군가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엽문이 새로운 삶을 가려 할 때 무엇으로 각오를 다지는가 하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다. 단추가 엽문의 맹세다.

엽문은 일본 점령기에 가난을 못 이기고 외투를 팔았지만 단추 하나를 따로 떼어내어 몰래 손에 쥐었다. 엽문에게 그 단추란 무술인으로서의 명예를 잃지 않겠다는 각오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복수를 실행하기 직전 궁이의 맹세에서 멈춘 뒤에 긴 세월의 공백을 가진 다음, 영화적으로는 바로 뒤 장면에서, 같은 세월 동안 자기의 맹세를 지킨 엽문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다. 엽문과 궁이를 매개하는 것은 그렇게 각자의 맹세의 시간이다. 다만 우린 엽문이 오랫동안 그 맹세를 지켜왔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궁이의 맹세는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해할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1950년 섣달 그믐날, 엽문과 궁이가 만났을 때 사태가 분명해진다. 엽문이 문득 단추를 궁이에게 내밀며 궁가의 무술을 후예들에게 전수할 것을 무술인으로서 권유한다. 하지만 그 단추, 엽문이 궁이의 소임을 자극하기 위해 건네준 표식을 받고 나서 궁이가 엽문에게 전하는 응답은 뜻밖에도 무엇인가. 엽문이 궁이에게 단추를 주자 궁이는 그 대답으로 자신의 기억을 준다. 이때 비로소 사라진 10년의 세월 안에 포함되어 있던 중요한 사건, 10년 전 궁이와 마삼의 대결 장면이 플래시백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 플래시백이야말로 그 시간의 부재와 생략의 이유다. 이렇게 가정해보자. 궁이가 복수를 다짐한 뒷 장면에 마삼과의 대결 장면이 이내 등장하고 그리고 1940년대를 살아가는 궁이의 이야기가 이어졌다면 영화는 느슨해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느슨한 것보다 더 문제가 되는 건, 그럴 때 궁이의 영화 속 저 복수의 행위가 시간 수순을 따라 제시될 뿐 도무지 궁이의 기억 속의 행위로 발설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왕가위는 궁이의 그 행위가 반드시 저 멀리 과거의 기억의 행위로 새겨져 이 자리에서 회상으로서 말해져야만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므로 궁이의 사건은 사라진 10년 안의 사건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어서 플래시백으로 여기 돌아온 것이 아니다. 플래시백이라는 영화적 화법이 이 자리에 놓이기 위하여, 여기에서 궁이의 입을 통해 말해지고 기억되기 위하여, 그 기나긴 10년이라는 시간이 먼저 사라져야만 했던 것이다. 10년이라는 세월의 생략 속에서 궁이의 그 행위는 오래되고 절절하고 아련하며 절대적인 행위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되돌릴 수 없는 그녀의 빗나간 운명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대종사>에서의 왕가위의 부재-생략의 구조적 선택이며 시간이 사라진 이유이고 플래시백으로 멜로드라마를 활성화하는 방식이다.

엇갈린 맹세는 무상할 뿐이니

부재한 세월과 단추와 그 응대로서의 플래시백은 이 영화의 진정한 클라이맥스가 어디인지 알려준다. 궁이와 마삼의 현란한 결투 장면은 힘주어 촬영되었지만 결코 <일대종사>의 클라이맥스로 기억되진 못할 것이다. 그건 이 영화의 열쇠에 해당하는 플래시백의 내용에 해당할 뿐 이 플래시백이 궁극에 형성하고자 하는 정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1952년의 어느 날이자 엽문과 궁이의 마지막 만남의 날이 이 영화의 가장 절절한 정점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날 밤 궁이는 마침내 엽문에게 “당신을 마음에 담은 적이 있다”고 고백하며 엽문이 자신에게 주었던 단추를 돌려준다. 무예의 길을 독려한 엽문에게 평생의 짝사랑으로 응대한다. 물론 엽문은 재차 말한다 “언젠가 궁가 64수를 다시 만나길 바란다”고.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끝까지 무인의 자리를 지키고자 한 말일까, 아니라면 우회적으로 궁이의 애정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을까. 그 뜻을 알지 못한 채 영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막으로 전한다.“궁이는 맹세를 지켰고 1953년 세상을 떠났다”고.

<일대종사>는 맹세의 멜로드라마다. 하지만 맹세를 지키지만 행복해지지는 못하는 두 사람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엽문과 궁이에게는 적어도 엇갈린 네 가지 맹세가 있는 것이다. 무협에 관한 엽문의 맹세, 아버지의 복수에 대한 궁이의 맹세, 엽문을 향한 궁이의 짝사랑의 맹세, 하지만 궁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되는 엽문의 아내에 대한 맹세. 그런데 이 맹세들 중 어느 하나도 흥겹거나 행복한 장면에 관여되고 있지 못하다. 엽문이 영춘권을 흥하게 한다는 자막은 나오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엽문은 담담할 뿐이고 아버지에 대한 복수가 궁이의 삶을 행복하게 한 것도 아니며 엽문을 향한 궁이의 사랑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엽문이 사랑하는 아내를 다시 만나게 된 것도 아니다. 맹세는 서로 엇갈려 무상함에 이를 뿐이다.

궁이가 아버지의 복수를 맹세할 때 섰던 사원의 그 벽면에 그려진 문양이 이 영화의 처음과 끝에 놓인 것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서로의 맹세가 서로의 행복이 될 수는 없는 인생무상이 시작된 곳이 거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장르를 바꾸고 시대를 바꾼다 해도 인생무상이라는 쓸쓸한 정념은 변치 않을 왕가위의 것이다. 그러니 <일대종사>는 그저 맹세의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맹세라는 문양을 영화에 새긴 인생무상의 멜로드라마다. 따라서 우리에게 왕가위의 <일대종사>는, 그가 무엇을 만들더라도 오로지 인생무상의 멜로드라마에 닿게 된다는 사실을 또 한번 알게 해준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