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고아성] 미래를 달리는 소녀
2013-08-29
글 : 이후경 (영화평론가)
사진 : 백종헌
고아성

아이라 해야 할까, 소녀라 해야 할까, 여자라 해야 할까, 어른이라 해야 할까. 조곤조곤 야무지게 대답을 뱉어내는 고아성을 보며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망설였다. 담담한 눈빛과 말투는 어른스러웠고, 사소한 말에도 윗니를 활짝 드러내며 웃는 표정은 영락없는 소녀였으며, 간간이 긴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짓과 다소곳한 자세는 여성스러웠고, 변함없이 동그랗고 귀여운 콧방울은 아이의 것이었다. 그 모두를 조금씩 가지고 있지만 그중 어느 하나에만 속하지 않는 어른아이. 차라리 이 애매한 단어가 그녀의 인상과 연기를 말하는 데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그 어른아이의 인상이 봉준호 감독에게도 특별히 소중했던 것일까. <괴물>에서 세주를 지켰던 현서처럼, <설국열차>의 요나도 자신 역시 보호받아야 할 소녀이면서 자기보다 어린 소년을 품에 안고 있다. 일본 대지진 참사를 기리기 위한 옴니버스영화 <3.11 센스 오브 홈 필름즈>에 실린 봉준호의 단편에서도 그녀는 같은 모습이었다. 왜 반복해서 그 자리에 서 있게 되는 것 같으냐고 묻자 그녀가 핵심적인 대답을 들려주었다. “감독님이 저와 저보다 더 어린 약자를 함께 배치해놓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괴물> 찍을 때 감독님이 저보고 <미래소년 코난>에 나오는 라나 같다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어요. 어른이 보면 감싸줘야 할 것 같은데 그 아이 스스로는 굉장히 강한 캐릭터. 배우로서 이미지를 부여받은 게 그게 처음이었기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그 이미지에 더 근접해지려고 노력하게 돼요.”

라나의 씩씩함은 <괴물> 이후 그녀가 고른 다른 캐릭터들에도 고르게 묻어났다. <즐거운 인생>에서는 대책 없는 중년의 아버지를 무심하게 응원하는 딸 주희였고, <라듸오 데이즈>에서 번뜩이는 재기로 사람들을 돕는 경성방송국 사환 순덕이었다. “같은 또래와 연기하는 재미에 대한 갈증이 심해서 선택하게 된” 드라마 <공부의 신>에서도 사랑 타령에만 빠져 있는 엄마 밑에서 착실하게 성장해가는 고3 길풀잎을 연기했다. 속한 환경은 모두 달랐지만 그들 중 어느 하나도 유약함을 무기로 삼는 소녀는 아니었다.

모순된 표현 같지만, 그 씩씩함 때문에 영화 <여행자>의 장애를 지닌 사춘기 소녀 예신이 그녀를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저한테는 풀잎이 같은 역보다 예신이 같은 역이 훨씬 많이 들어와요. 근데 저도 그런 역할 하는 걸 더 좋아해요. 더 힘들지만, 더 재밌고요.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조심스러운 걸 생각하면 안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보통 관객의 시선을 잃고 싶지 않아 심리학과에 진학했는데 공부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능동적인 주체인지 알게 됐다”는 그녀는 쉽사리 예신을 동정하거나 예신의 아픔에 과도하게 잠기지 않는다. 자신의 연기로 예신이나 예신의 처지에 있는 누군가를 돕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예신이 되어 예신의 상처를 잠시 앓아내는 것이라 생각하고 부딪혀본 쪽이다.

그 단단함은 <설국열차>의 요나에게 특히 중요한 자질이다. 꼬리칸 사람들이 일으킨 혁명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이 이 영화에는 얼마간의 패배감이 도사리고 있는데, 요나는 끝까지 살아남아 그 절망의 밑바닥을 응시하는 역할이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분량과 관계없이 이 영화의 메시지 그 자체가 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의미나 감정의 무게에 짓눌리는 법이 없었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 마지막 장면이 제일 자신있었고, 먼저 찍고 싶었어요. 모든 게 다 끝난 시점에서 그 감정을 먼저 세우고 그다음에 앞의 것들을 차례대로 연기하고 싶었거든요. 운 좋게도 바람이 이루어져서 그 장면을 먼저 찍게 됐는데, 찍으면서는 정말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결말이 희망적이라 보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한테는 절망적인 시작이었어요. 그래서 아빠(송강호)와 커티스 사이에서 울면서 일어나는 모습, 그게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마음이에요.” 그렇게 그녀는 절망의 끝에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 조심스레 첫발을 내디딘다.

영화 밖의 고아성도 또 다른 세상을 맞이해야 할 때가 왔다. 봉 감독에게 처음 제안을 받았던 순간, 참고하라고 받은 <비틀쥬스>의 위노나 라이더와 <몽상가들>의 에바 그린을 보며 요나를 기다렸던 시간, 봉 감독의 어깨너머로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가 완성되는 과정을 기웃거리며 보냈던 시간, ‘train baby’란 단어를 받고 “땅이 흔들리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요나에 대해 더욱 선명한 상을 얻었던 순간, 현서와 똑같아질까봐 <괴물>을 계속 돌려봤던 시간, 체코 세트장에서 기차에 첫발을 들였던 순간, 그 기차 안에서 동료 배우들과 부대끼며 살았던 시간, 그 모든 시간을 이제 추억으로 보관해야 한다. “제게 <설국열차>는 늘 미래였는데 막상 끝이라고 생각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설국열차>나 요나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말로 옮기기도 어렵고요.” 하지만 의젓한 그녀는 금세 또 “어쩔 수 없죠. 다음 영화를 해야죠”라며 고개를 든다.

그녀의 차기작은 이한 감독의 <우아한 거짓말>이다. 김려령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그녀는 자살한 14살 소녀의 언니를 맡아 다시 한번 긴 터널 속으로 걸어 들어갈 예정이다. “그 마음을 간접적으로는 절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안 하려고도 했어요. 근데 그 이후로 계속 단짝, 친언니, 엄마, 아빠가 죽는 꿈을 꾸더라고요. 사실 이 영화의 주제가 동생을 잃은 상실감이 아니라 동생이 죽은 이유, 그 개연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거예요. 거기다 김려령 작가님이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씻김굿 같은 작품이 됐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나니 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절망과 더 친숙한 이 어른아이에게 계속 희망을 걸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magic hour

연출의 비밀을 엿보다

“봉준호 감독님이 내 마음을 건드린 순간들을 기억해요.” 세트에서 모니터 앞을 지키는 대신 봉 감독의 연출법을 호기심있게 지켜봤다는 고아성. 그녀는 봉 감독이 “각 배우의 마음을 어떻게 건드리며 자신이 원하는 연기를 끌어내는지”에 관해 재밌는 사례를 많이 들려줬다. 그중 봉 감독이 요나의 마음을 건드린 순간은, 물 공급 칸에서 난투극이 벌어지는 가운데 혼자 벽장에 숨어야 하는 장면이었다. “아빠 손에 이끌려 숨으러 들어가는 행동은 알겠는데 감정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근데 감독님이 ‘몸은 살겠다고 들어가는데 밖의 상황이 너무 궁금해서 눈은 끝까지 못 넣겠는 심정으로 하라’고 하셨어요. 정확하잖아요. 연기할 때 나중에 편집이 완성되고 음악이 추가될 것까지 계산하자면 사실 배우가 할 수 있는 게 정말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범위를 잘 잡고 잘 좁혀가야 하는데 감독님이 확실하게 좁혀주세요.” 그 차분한 설명을 듣고 있으니, 언젠가 그녀가 연출한 영화를 볼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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