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김기덕 세계의 재조합 <뫼비우스>
2013-09-11
글 : 송경원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아내는 남편에게 직접 복수하는 대신 자위하던 아들의 성기를 자르고 집을 나간다. 주위로부터 놀림감이 된 아들은 좌절하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의 성기를 절단해 보존한다. 언젠가 기술이 개발되면 아들에게 이식해주기 위함이다. 하지만 성적 욕구를 풀지 못하는 아들은 점점 삐뚤어지고 동네 양아치들과 어울리다 성폭행범으로 몰려 구속까지 된다. 아버지는 아들의 고민을 해결해주고자 성적 쾌감을 줄 수 있는 온갖 방법을 찾고 그중 육체에 극한의 고통을 주며 성적 만족에 도달하는 방법을 발견한다. 신체적 고통으로 얻어낸 쾌감. 가학적일지라도 만족스럽다. 하지만 찾아온 평화도 잠시, 집을 나갔던 아내가 돌아오며 비틀린 가족은 파멸을 향해 치달아간다.

김기덕 영화만큼 많은 말이 모이는 영화도 드물다. 영화마다 영화 안팎으로 화제를 뿌리며 우리 사회 혹은 영화계의 한계 지점을 짚어준다. <뫼비우스> 역시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으며 공개 이전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해외 마켓에 선판매되고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호의적인 해외 반응은 영화에 힘을 실어주었고 결국 국내 관객을 만날 수 있게 되었지만 김기덕 감독의 표현을 빌리면 3분가량이 삭제되어 ‘여기저기 흉터가 있는’ 버전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영화가 전하는 강렬하고 원초적인 에너지는 그다지 퇴색되지 않은 듯하다. 스크린 안팎에서 관객을 지배하는 충격적인 표현들은 여전히 살아 있고 성기로 압축된 성적 충동과 욕망에 대한 이야기도 분명하게 전달된다.

<뫼비우스>는 해석이 필요한 영화가 아니라 해설이 어울리는 영화다. 일단 보면 무언가 설명하고 싶은 장면이 곳곳에 깔려 있지만 사실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의미는 명확하다. 전작 <빈 집>(2004)처럼 대사 한마디 없이 진행되지만 단 한순간도 의미가 모호하게 전달되는 일은 없다. 일종의 행위예술에 가까운 배우들의 몸부림이나 화면 곳곳의 상징과 이미지 역시 심심하리만치 완벽하게 하나의 의미로 모아진다.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과 달리 매우 단순하고 쉽고 심지어 가벼운 영화다. 그간의 김기덕 영화에서 익히 봐오던 요소들, 이를테면 성기, 도착적 성애, 죄의식, 가학성 등의 주제의식이 반복, 조합되며 기묘한 웃음을 자아내는데, 일관성있게 밀어붙인 김기덕 세계의 재조합이라 할 만하다. 그만큼 순수하고 파괴력이 있지만 이미 익숙한 방식이기에 그다지 지적인 시도로 보이진 않는다. 파괴적 에너지, 그 힘은 여전하지만 김기덕의 최고작은 아니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