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포터> 시리즈의 일등공신인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이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2010)을 <해리 포터>만큼 성공시키지 못한 건 사실이다(각축전을 뚫고 ‘넥스트 해리 포터’의 영광을 가로챈 건 제니퍼 로렌스를 발굴한 <헝거게임> 시리즈였다). 하지만 적어도 12살 해리 포터의 모험 대신, 퍼시 잭슨을 17살로 설정한 건 결과적으로 그 역을 연기한 로건 레먼에겐 참 다행이다 싶다. 굳이 관객에게 자신의 성장기를 고스란히 노출시키면서 일거수일투족 간섭을 받아야 했던 대니얼 래드클래프와 달리, 그는 이미 제법 큰 소년으로 출발했고, 그 기세를 몰아 속편 <퍼시 잭슨과 괴물의 바다>(2013)까지 출연했으니 말이다. 제작사인 폭스로서도 좀 뜸을 들인 속편 결정이었는지라, 레먼 역시 갑작스런 결정에 적응해야 했다. “속편 제작은 전혀 기대를 못했다. 1편 이후 시간도 많이 지났고. 제안이 오자마자 바로 오케이를 했는데, 워낙 빨리 진행되는 탓에 준비기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전편의 출연진이 그대로여서 함께 다시 만나 작업하는 게 너무 기뻤다.”
크리스 콜럼버스가 연출 일선에서 물러나 제작자로 나섰지만,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 데미갓 퍼시 잭슨의 모험은 그대로다. 퍼시는 안식처인 데미갓 캠프를 지켜줄 황금 양탄자를 찾기 위해서, 또 신탁의 예언대로 자신이 영웅임을 증명하기 위해 위험한 여행에 나선다. 대신 전편에서 메두사와 대적했던 영웅적 면모 대신, 이젠 자기 의심에 빠진 십대의 고뇌에 중점을 둔다. 전편의 영광은 운이 따랐을 뿐이라는 데미갓 캠프 내 친구들의 비난, 아버지인 포세이돈에게 버림받았다는 고민, 갑작스런 외눈박이 이복형제의 등장 같은 문제들이 다방면으로 그를 괴롭히는데, 신화의 세계를 걷어내고 본다면 퍼시 잭슨의 이런 고민은 또래 십대의 고민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다. 실제 레먼은 자신이 퍼시와는 정반대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가족과 워낙 가까운 사이이고 내가 워낙 남 신경 안 쓰고 솔직하게 말하는 타입이기도 해서 왕따문제 같은 건 겪어본 적이 없다. 원작이 있어서 도움이 컸다. 책을 읽으면서 퍼시의 고민에 다가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를 괴롭힌 건 오히려 루이지애나의 뜨거운 여름 촬영장과 촬영용 의상인 청바지 같은 부수적인 것들이었다.
반복하는 건 지겨워
흥행 여부를 떠나 판타지 블록버스터물인 <퍼시 잭슨> 시리즈의 출연은 레먼에게 안정적인 팬층을 확보하는 데 좋은 발판이 된 건 확실하다. 레먼 스스로도 자신의 커리어를 <퍼시 잭슨> 시리즈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누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내 커리어는 보잘것없었다.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에게 투자하고 싶었다고 할까.” 레먼은 이미 시리즈의 3편까지 계약을 한 상태이니 그의 커리어 재테크엔 후한 점수를 매길 만하다. 1992년생, 놀랍게도 아직 21살밖에 되지 않은 레먼의 출연작은 무려 15편이나 된다. 초반 필모그래피의 상당수는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의 아역 연기로 채워졌다. 레먼의 똘망똘망하고 귀여운 유년기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멜 깁슨의 아역으로 출연한 <패트리어트: 늪속의 여우>(2000)와 <왓 위민 원트>(2000)를 참고하면 된다. 단역이긴 하지만 할리우드 톱스타의 아역으로 확실히 눈도장을 찍은지라, 이후에도 아역 연기가 끊이지 않는 계기가 됐다. 레먼이 연기다운 연기를 보여준 출발점을 찾자면 애시튼 커처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나비효과>(2004)를 꼽아야 할 것이다. 성인 에반이 겪는 상처의 근원은 어린 에반인 레먼의 호연으로 생생하게 다가오는데, 특히 아동 포르노를 찍는 이웃집 남자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은 레먼의 당찬 연기를 보여준 대표적 예다.
아역 연기 다음은 무수한 스타들의 아들 역이었다. 스릴러 <넘버 23>(2007)에서 짐 캐리의 아들 역으로, 서부극 <3:10 투 유마>(2008)에서 크리스천 베일의 아들 역으로 호흡을 맞췄다. 레먼은 반항적인 면모와 동시에 아버지를 이해하는 사려 깊은 모습까지 동시에 연기해내면서 호평을 얻었는데, 어리고 귀엽기만 했던 그의 얼굴에서 배우의 표정을 찾을 수 있었던 작품이다. 특히 함께 출연한 러셀 크로, 크리스천 베일 같은 연기파 배우들의 틈새에서 그가 획득한 에너지가 인상적이었다. 크리스 콜럼버스는 “<3:10 투 유마>의 레먼을 보고 14살이 저런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면서 “그는 나중에 맷 데이먼이나 톰 크루즈처럼 될 것”이라고 호평하기도 했다. 이후 <게이머>(2009)의 17살 천재 게임플레이어 사이먼, <삼총사 3D>(2011)의 매력 넘치는 쾌활한 달타냥, <월 플라워>(2012)의 내성적인 독서광 찰리를 훌륭하게 소화해내며 개성있는 연기자로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레먼의 유명세에는 할아버지, 아버지를 비롯해 친척들이 미국 의료보조기구회사인 ‘로먼 & 선’을 운영하는 부호라는 것도 한몫한다. 특이하게도 레먼은 집안의 사업에 참여하는 대신, 3살도 되기 전에 엄마에게 연기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는데, 특히 성룡 영화의 광팬이었다고 한다.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은 파란눈의 레먼은 귀여운 마스크로 카메라를 사로잡았고, 몇편의 광고에 출연 기회가 주어졌으며, 그길로 <패트리어트: 늪속의 여우>에 출연하며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다. 그 과정에서 그의 엄마가 매니저 역할로 따라나선다. 레먼은 상당히 이른 연기 활동의 이유를 베벌리힐스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어려서부터 연기를 시작했다. 왜 그렇게 어릴 때부터 시작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LA에서라면, 누구나 원한다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재미삼아 오디션에 참여할 수 있으니까. 나도 어릴 때 형, 누나와 함께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그게 시작이었다.”
아역 출신의 많은 배우들이 외적인 변화와 슬럼프로 곤욕을 치르는 것과 달리, 레먼은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고 있는 흔치 않은 배우다. 그 역시 연기에 대한 고민이 없지는 않았는데, 남들보다는 그 고민을 좀 일찍한 편이었다. 덕분에 한동안 연기를 쉬고 싶단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그만두자 싶었다. 하지만 그땐 어렸다. 내가 뭘하는지 나조차 모르는 시기였다. (웃음)” 레먼을 연기자의 길로 다시 붙든 건,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었다. 데이비드 핀처, 폴 토머스 앤더슨,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에 심취해 있었고, ‘괴짜 영화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영화를 좋아하던 소년은 고민도 잠시, 좋은 배우가 되기로 마음을 굳힌다. “TV드라마 <잭&바비>(2004~2005)에 출연해서 많은 걸 배웠다. 12살 때였는데 그때부터 내 마음에 영화학교가 세워진 것 같다.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때 함께 출연한 딘 콜린스와 절친이 되고 함께 코믹 단편영화를 찍어 유튜브에 올리기도 하는 등, 영화공부에 푹 빠져든다. <파이트 클럽>(1999)의 에드워드 노튼, <아메리칸 뷰티>(1999)의 케빈 스페이시, <마라톤맨>(1976)의 더스틴 호프먼 같은 연기자가 되겠다는 꿈을 공고히 다지던 시기였다.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레먼의 행적을 살펴보면 들쑥날쑥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그의 기준은 제법 확고하다. “똑같은 걸 계속 반복하고 싶지 않다. 프로젝트를 택할 때마다 도전이 될 만한 것,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걸 찾으려고 한다.” 스타가 되거나 유명해지고 싶은 취미는 없다는 그는 연기를 할 때를 제외하고 평범한 또래 소년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한다. 농구를 하고 영화를 보고 <심슨> 시리즈를 보는 평범한 여가가 그의 일상이다. <호밀밭의 파수꾼>과 <파리대왕>을 반복해서 읽은 것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며, 취미로만 하고 있지만 음악에서는 확실히 취미 이상의 실력을 갖추기도 했다. “나의 유년기를 형성한 가장 중요한 음악은 스트록스의 ≪이즈 디스 잇≫과 아케이드 파이어의 ≪퓨너럴≫이었다.” 실제로 딘 콜린스와 함께 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피아노, 기타, 우쿨렐레, 바이올린 같은 악기를 연주하고 곡을 만들기도 하며, 언젠가 프로 데뷔도 꿈꾸고 있다. 영화를 찍는 것 외의 다양한 활동에 대해 레먼은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이 ‘다름’을 받아들이고, 그걸 연기에 적용시킬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고 믿는다. “몇달 동안 영화를 찍고 나면, 학교로 가고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간다. 일정량의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결국 연기를 하는 데도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레먼의 성장이 손꼽아 기다려지는 또 한편의 대작은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연출하는 판타지물 <노아>(2014)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각색한 <노아>는 현대를 배경으로 해 지구 종말을 그린 재난영화로 레먼은 노아(러셀 크로)의 둘째아들 ‘햄’을 연기한다. “프로젝트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감독이다. 감독을 믿을 수 있는가? 내가 좋아할 만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감독인가를 따져본다. 배우는 감독의 연출에 따라 비전을 실현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감독에 대한 신뢰가 최우선이다. 시나리오나 상대배역은 부차적인 문제다. 벌써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과 친해져서 기분이 좋다. 그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감독 중 한 사람이다. 이런 좋은 영화에 출연하다니 스스로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웃음)” 레먼은 요즘 좋은 연기자로서의 바람과 더불어 제작자로서의 포부도 키우고 있다. “제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이르고 싶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 힘이 필요하다. 배우로서 경력을 제대로 쌓아나간다면 언젠가는 제작자로서의 꿈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코언 형제의 <시리어스맨>(2010)에서 랍비 라쉬가 한 충고,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단순하게 받아들여라”라는 문구는 졸업 앨범에 그가 작성한 좌우명이자 그의 미래를 짐작하게 해주는 문구다. 단순하게, 그는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는 중이다.
magic hour
청춘은 아름다워
배우로 성장한 로건 레먼의 모습을 가장 매력적으로 담은 영화는 단연 스티븐 크보스키의 청춘영화 <월 플라워>다. 입학과 동시에 졸업날을 세며 지내야 하는 찰리. 그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책에 파묻혀 지내는 ‘왕따’다. 레먼은 내성적인 찰리의 내면을 섬세하게 연기하며 강렬한 울림을 자아내는데, 레먼의 연기 중 가장 밀도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레먼은 “<퍼시 잭슨> 시리즈 같은 영화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몸을 쓰는 일이다. <월 플라워>는 캐릭터와 스토리에 대한 이해가 먼저였다. <퍼시 잭슨> 시리즈와는 전혀 반대로 내면을 표현하는 세심한 연기가 필요한 새로운 경험이었다”며 찰리의 연기를 설명한다.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찰리와 샘(에마 왓슨)과 패트릭(이즈라 밀러)이 터널을 통과하는 장면은, 마치 가장 밝은 인생의 한때, 청춘을 통과하는 듯한 시각적 감흥을 안겨주는 명장면이다. 꽁꽁 마음을 닫고 있는 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노래를 듣고 드라이브를 하는 지금 이 순간이 살아 있는 순간’이라는 걸 깨닫고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 레먼은 찰리의 미묘한 심경의 변화를 표정 하나로 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