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싫어졌다. 아니 싫어졌다기보다는 두려워졌다. 사람들 속을 알 수가 없다. 혜원이 내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고백일까. 구조 요청일까. 아니면 그저 장난일까. 장난이라면 태일은 얼마나 연루되어 있을까. 뒤에서 조종하고 있을까. 혹은 까맣게 모르는 걸까. 애당초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본 날 우리가 마주친 게 우연이 아니란 건 무슨 뜻일까. 혜원이 나와 만나려고 친구와 내내 우리 집 근처의 극장을 어슬렁거렸단 말인가. 나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가장하려고? 혹시 태일의 부탁으로 우리 모두의 자연스러운 조우와 화해를 꾀했던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태일과 나타나지 않았을까. 거꾸로 나와의 비밀스런 만남을 계획했었다면 대체 나중에 태일은 왜 부른 걸까. 막상 만나고보니 닥쳐오는 두려움 때문에?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막다른 벽에 부딪히고 다시 튀어나와 엉뚱한 곳으로 달려간다. 출구 없는 미로 같다. 길을 찾기보다는 공중으로 벗어나는 것이 살길이다. 뭘 기대하는 거냐. 다 버리자. 태일도 혜원도. 겉만 봐서는 속을 알 수 없는 이들로부터 멀어지자. 난 액면이 내용 그대로인 사람들을 편애해오지 않았던가. 그들에게 연락을 끊고 서울을 잠시 떠나기로 한다.
머리도 식힐 겸 목포에 사는 선배 부부를 찾아 내려갔다. 내가 어릴 적 열광했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존경심을 품고 귀 기울였던 밴드의 키보드 주자이자 작곡가이다. 90년대 말만 해도 적잖이 활동을 했던 밴드는 2000년대 초반 들어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해체했고, 선배 부부는 고향으로 내려와 자그마한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다. 연락도 않고 평일 오후 불쑥 찾아갔는데 선배 부부는 가게에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선배의 눈빛이 파르르 흔들린다. 우리는 말없이 포옹을 하고 한참 동안 서로의 등을 두드렸다. 형수가 그 옆에서 반갑게 물기 묻은 손을 닦으며 서 있었다. “형, 이 시간에도 손님이 많네요.” “많기는. 이 정도도 없으면 문 닫아야 돼, 인마. 온 김에 사인이나 해놓고 가라. 아직도 젊은 애들이 너를 알더라. 신기하게.” 우리는 마주보며 키득거렸다.
당장 낮술이라도 하러 가자 했더니 의외로 선배가 반대한다. “나 요즘 맛이 가서 지금부터 달리면 금방 고꾸라진다. 간만에 영화나 같이 보자. 왕가위 영화 나왔던데 같이 볼 사람이 없어서. 형수랑 동시에 자리 비우기도 힘들고.” 그러마 하고 목포 시내의 한 멀티플렉스로 가 <일대종사>를 보았다. 극장을 나서는 선배의 표정이 썩 밝지 않다. 날 돌아보며 한마디 흘린다. “한편만 더 볼래? 미야자키 하야오, <바람이 분다>?” “형, 영화 보려면 서울에 있었죠. 벌써 해 지는데 한잔 빨러 가죠. 홍탁 어때요?” ”이대로는 영 찝찝해서. 언제 또 우리가 이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딱 한편만 더 보자. 술은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잖아. 밤도 길고.” 악착같이 우기기도 뭣해서 바로 이어지는 시간의 표를 끊는다. 하긴 어차피 보려고 했던 영화니까. 그래도 목포까지 와서 이게 뭐람.
두편의 영화가 뒤섞여 어지러워진 머리를 움켜쥔 채, 영업을 마친 형수와 합류하여 셋이 동네 술집에 자리잡았다. 병어찜이 기가 막힌 집이란다. 맛을 보니 빈말이 아니다. “이거 한 마리면 밥 두 그릇에 소주 세병은 그냥 먹겠는데요?” 내 너스레에 두 사람이 파안대소한다. 맛나게 먹어주니 더 바랄 게 없다는 얼굴들이다. “그런데 적아, 넌 아까 그 영화들 어떻게 봤냐?” “자기는 쉬려고 내려온 적이씨 데리고 무슨 숙제를 이렇게 시키는 거야?” “아녜요. 형수님, 형 옛날부터 만나면 음악 얘기, 영화 얘기 하는 거 좋아했잖아요.” “나는 왕가위 영화 보고 좀 쓸쓸해지더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일이 이제는 낡은 것으로 보여서. 자꾸 내 음악을 떠올리게 하더라니까.” “당신이 언제 한 시대를 풍미한 적이나 있어? 반짝 떴던 것 갖고.” “그래도 여학생들이 집 앞에 줄을 섰었잖아. 자기도 그중 하나였으면서.” 이 부부의 아옹다옹은 귀엽다. 내가 이야기를 받아본다. “하루키도 이번 작품 읽어보니 조금 올드해 보이더라고요. 왕가위 스타일은 예전에 정말 한칼 했었는데. 대놓고 따라 하던 감독들도 꽤 있었잖아요.”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 흉내였지, 대부분.” “그런가요. 한데 <일대종사>에선 최근 중국 블록버스터들에서 보이는 안 좋은 버릇이 눈에 띄데요. 미술 과잉이랄까. 세트랑 조명에 너무 힘을 주고, 가는 데마다 비장미 넘쳐주시고, 액션은 순간순간 느리게 펼쳐지면서.” “<매트릭스> 닮은 장면에다, <쿵푸허슬>에서 풍자하는 똥폼을 진지하게 재현하는 걸 볼 때의 민망함이란. 실존인물을 다루는 가장 공허한 방법이 아니었나 싶어. 근데 자주 주변 소리가 없어지며 내면으로 빠져들고 이야기가 성글게 툭툭 넘어가는 건 <바람이 분다>하고도 비슷하더라? 고지식한 역사물은 아니길 바라는 감독들의 바람이겠지?” “실은 꽤나 다른 양극단인데. 실사와 애니메이션. 피해국과 침략국. 구시대의 맨손/무술과 신시대의 기계/비행기.” “그렇게 다른데도 20세기 전반을 돌이켜보는 두 감독의 시선이 닮아 있어. 정치적 표현은 숨기고 개인의 무의식을 드나들며 몽환적으로 한 시대를 훑는 것. 국가나 민족이 아닌 개인의 입장을 회복시키려는 시도? 그러니 둘 다 영웅적 실존인물인데도 위인전 같지 않긴 해.” “결국 우리는 모두 나약한 한 사람이니까요.” “그러다보면 히틀러도 짠해 보이게 할 수 있다니까. 그나저나 대가들이 나이 먹고 근현대사를 더듬는다… 무언가 정리하고 싶을 때지. 나도 가끔 예전 노래들 다시 모아 내고 싶어져.” “판권만 갖고 있으면 간단한데, 형.” “그게 나한테 있겠냐. 옛날에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지. 그땐 왜 그랬나 몰라. 적이 넌 안 그렇지?” “저도 똑같아요. 우리 참 바보처럼 살았어요, 그죠?” 형수가 새로 건배를 제안하고, 우리는 밤새 20세기의 끄트머리를 회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