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으로부터 전염된 것일까. <블루 재스민>은 케이트 블란쳇이 가장 말을 많이 하는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우디 앨런 개인으로서도 <블루 재스민>은 <스쿠프>(2006)의 영국,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8)의 스페인, <미드나잇 인 파리>(2011)의 프랑스, <로마 위드 러브> (2012)의 이탈리아 등 기나긴 유럽 투어를 끝낸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게 <블루 재스민>은 두 사람 모두에게 어딘가 특별한 영화처럼 느껴진다. 더군다나 <블루 재스민>은 정말 오랜만의 ‘원톱’ 주인공이 등장하는 우디 앨런 영화라 할 수 있다. 유럽 투어 당시 우디 앨런 영화의 여러 인물들은 각자의 서로 다른 에피소드를 가지고 뭔가 ‘원격 조종’ 당하는 느낌이 강했다면, <블루 재스민>은 심지어 우디 앨런이 그녀에게 전적으로 의지한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그렇게 케이트 블란쳇은 <블루 재스민>을 가득 채운 단 하나의 중심이다. 이에 대해 케이트 블란쳇은 흥미로운 얘기를 꺼냈다. “내가 연기한 재스민은 바로 우디 앨런 자신이다. 그는 사실 재스민 역을 직접 하고 싶어 했지만, 여자라서 내가 한 것이다.” 또 이렇게도 덧붙였다. “그는 여성 캐릭터에 여전히 깊은 매력을 느끼고 있다. <블루 재스민>은 한 여자의 감정적, 심리적 한계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영화다.”
부와 사랑을 동시에 쟁취한 여자, 재스민(케이트 블란쳇)은 사업가 할(알렉 볼드윈)과 결혼하면서 명품을 몸에 두르고 매일 파티를 즐기는 뉴욕의 상류층이다. 하지만 할의 외도를 알게 되면서 모든 것은 산산조각난다.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재스민은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여동생 진저(샐리 호킨스)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현실에 혼잣말은 늘어만 가고 신경안정제가 없으면 잠들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된다. 재스민이 보기에 진저와 그 남자친구들은 하나같이 상대할 가치도 없는 ‘루저’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파티에서 근사한 외교관 드와이트(피터 사스가드)를 만나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떨쳐내기 힘든 과거의 일들이 플래시백으로 불쑥 끼어들어 재스민을 괴롭힌다.
재스민의 원래 이름은 ‘재닛’(Jeanette)이었지만, 할이 자신의 인생에 들어온 그때부터 시적인 이름 ‘재스민’(Jasmine)으로 바꾼다. 그것은 어딘가 그녀의 화려한 이중생활 혹은 현실로부터 유리된 판타지 같은 삶을 드러낸다. 칼 라거펠트가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오직 케이트 블란쳇을 위해 선물했다는, 영화 내내 줄기차게 입고 나오는 화이트 재킷은 그 마지막 자존심이다. 케이트 블란쳇이 분석하길, 재스민은 ‘몽상가’다. “재스민은 원래 몽상가적인 기질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내 생각에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심약한 기질과 모호한 현실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재스민이 그런 사람이다.” 바로 그것이 <블루 재스민>의 부유하는 재스민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세다, 너무 기분 좋게 세다
재스민은 이제껏 수많은 여배우들과 작업한 우디 앨런의 이력에서도 어딘가 특별하다. 감독과 배우로서 필요 이상으로 가까웠던 다이앤 키튼과 미아 패로는 말할 것도 없고, 스칼렛 요한슨과 페넬로페 크루즈와 미라 소르비노 등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캐릭터를 창조해왔지만, 재스민은 이전 여성 캐릭터들과의 ‘연장선’이라는 측면에서도 어딘가 더 ‘세게’ 느껴진다. 우디 앨런이 말하길, 재스민은 그가 이제껏 다뤄온 여성 캐릭터들과 비교해도 가장 ‘내버려둔’ 여자다. “영화가 시작하면 관객은 재스민이 길을 잃은 상태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미 자기 자신에게 혼잣말을 할 지경으로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다. 분노에 가득 차서 스스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저지르고, 그것은 곧 불행한 결과로 이어진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자신이 속해 있던 사회적 배경에서 전혀 다른 환경으로, 상류층에서 서민으로, 이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절대적인 미지의 세계로 이동해 들어간다.” 그러고보니 최근 우디 앨런이 이런 여자, 아니 이런 인물을 다뤄왔던 적이 있었던가. 모든 일은 이미 벌어졌고, 왜 그렇게 됐는지는 그저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바꿔 말해 <블루 재스민>은 우디 앨런 영화 중에서는 드물게 결과부터 툭 던져놓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영화다. 그처럼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면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 바로 케이트 블란쳇이 재스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케이트 블란쳇은 이미 자신만의 견고한 이미지와 세계를 구축한 배우다. <엘리자베스> (1998)와 <골든 에이지>(2007)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그리고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엘프의 여왕’ 갈라드리엘이라는 캐릭터만으로도 그 위엄과 카리스마는 어마어마하다.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샤롯 그레이>(2001)에서 실종된 연인을 찾아 게릴라전에 뛰어든 샤롯 그레이, <베로니카 게린>(2003)의 포기를 모르는 저널리스트 베로니카 게린, 처음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안겨준 <에비에이터>(2004)의 캐서린 헵번,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2008)의 소련 특수부대 리더 이리나 스팔코까지 더하면 어떤가. <블루 재스민>도 그렇지만 <엘리자베스> <샤롯 그레이> <베로니카 게린> 등 그녀의 존재는 그냥 영화 제목 그 자체다. 심지어 내년 개봉예정인 케네스 브래너의 <신데렐라>에서는 계모 역할이다.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는 <블루 재스민>에서 가장 웃긴 장면으로 ‘컴맹’인 케이트 블란쳇이 컴퓨터 강좌를 듣고 있거나, 새 직장인 치과의 간호사로 일하는 장면을 꼽을지도 모른다. 아니, 대(大) 엘리자베스 여왕이 독수리 타법으로 컴퓨터를 배우고, 자기보다 훨씬 키가 작은 치과의사의 지질한 성희롱까지 감내해야 하니까.
하지만 케이트 블란쳇은 모험을 즐기는 배우이기도 하다. 웨스 앤더슨의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2004)의 제인, 토드 헤인즈의 <아임 낫 데어>(2007)의 뮤지션 ‘쥬드’는 의외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녀에게 딱 맞는 옷처럼 느껴진다. 더 특별하고 장난스런 모험도 있다. <반지의 제왕>을 선택한 이유도 ‘뾰족한 귀를 갖고 싶어서’였고, <뜨거운 녀석들>(2007)에 카메오 출연한 것도(하지만 마스크를 써서 거의 알아보기도 힘들다) 에드거 라이트의 전작인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를 너무 재밌게 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역할을 맡더라도 보는 이의 마음 깊이 전해지는 그녀만의 에너지다. 같은 호주 출신 배우이자 <엘리자베스>와 <골든 에이지>를 함께한, 그리고 과거 케이트 블란쳇이 맨 처음 제대로 된 역할을 맡았던 연극의 하늘 같은 선배이기도 했던 제프리 러시는 그녀를 향해 ‘롤스로이스 엔진을 장착한 배우’라고 말했다.
<블루 재스민>은 케이트 블란쳇이 새로운 엔진을 장착한 것처럼 느껴지는 영화다. 출력은 여전하지만 다양한 모드로 다이내믹한 변화를 준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그녀의 ‘겨땀’이다. 과거의 기억에 고통받고, 현실의 지질한 남자들에게 이리저리 치여 귀가한 넋 나간 표정의 재스민의 겨드랑이는 그야말로 ‘흥건히’ 젖어 있다. 나이가 들면서 더 고약해지고 있는 우디 앨런의 심보가 드러나는 대목이랄까. 그는 기어이 엘리자베스 여왕 혹은 엘프의 여왕의 겨드랑이를 젖게 만들고야 만 것이다. 자신의 영화들 중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는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에서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여주인공이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스크린 속 남자배우가 걸어나와 객석의 그녀를 데리고 나가는 ‘위로’의 장면을 연출했던 그가 재스민에게는 혹독한 현실을 그대로 겪게 만든다. 스크린의 남자주인공이 말을 건네기는커녕 그가 혼잣말을 할라치면 비행기 옆 좌석의 할머니나 같은 벤치의 아줌마나 다들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려 한다. 재미도 재미지만, 정말 우디 앨런도 세고 케이트 블란쳇도 세다. 너무 기분 좋게 세다.
magic hour
재스민 VS 블란쳇
심하게 말하자면 우디 앨런은 <블루 재스민>의 할과 닮은 면이 있다. 양녀 순이와의 관계가 알려지게 된 것이 바로, 10년 넘게 함께 살아온(결혼은 하지 않았음) 미아 패로와 <부부일기>(1992)를 찍던 때였다. 미아가 냉장고 위에서 양녀 순이 프레빈의 누드사진을 발견하게 된 것인데, 어쨌건 그 사실을 알고도 미아는 무서운 정신력으로 영화를 끝냈다. 우디는 자신을 괴롭히는 언론이 지나치다고 생각했고, 어쨌건 그 역시 스캔들로 인한 법정싸움이 한창이던 때 <브로드웨이를 쏴라>(1993)를 작업했다. 흥미로운 것은, 케이트 블란쳇은 전혀 그런 세계(?)와는 거리가 먼 배우이기 때문이다. 스캔들이나 가십과는 거리가 먼, 전혀 스타 같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배우 중 하나다. 그래서 가여운 재스민을 위해서라도 현실의 케이트 블란쳇에 대한 얘기를 꺼내야 할 것 같다.
케이트 블란쳇은 같은 호주 출신이자, 3살 연상의 작가 겸 감독 앤드루 업튼과 1997년 결혼해 세 아이와 함께 16년 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3대가 함께하는 가정 안에서 자란 그녀는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가족은 내 삶의 오아시스다. 엄마가 된 뒤로 매일 아침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후에는 집에 데려오는 일을 하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는 게 그녀의 얘기다. 할리우드와 런던을 오가며 살다가 안정적인 자녀 교육을 위해, 10년 전에는 호주로 돌아와 정착했고 남편과 함께 극장도 운영하고 있다. 남편에 대해서는 “앤드루로 인해 훨씬 더 행복한 여자가 됐다.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배우로서의 내 이기심이 정말로 많이 바뀐 것 같다. 내 남편은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함께 나누는 환상적인 파트너다”라고 말할 정도니 <블루 재스민>의 재스민과는 다른 삶을 오래오래 이어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