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희>에 대해 “이번에 미친 짓 중 하나는 노래를 통째로 넣는 것”이라는 홍상수 감독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특집 ‘홍상수의 첫 경험’, <씨네21> 921호). 영화 안의 음악으로 세번 나오는 <고향>은 이미 알려졌듯, 1941년에 발표된 가수 이난영의 노래를 최은진이 다시 부른 곡이다. 그의 어떤 직관이 이런 시도를 하게 만들었는지 우리가 알 길은 없으나, 그간 홍상수의 음악에 친숙한 우리에게도 이 곡은 어딘지 과도하게 들린다. 물론 일차적으로 그 느낌은 그의 영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의 근대가요가 흘러나오고, 그걸 부른 가수의 음색이 드라마틱하며, 무엇보다 이 노래에는 구체적인 가사가 있다는 점에 근거할 것이다. 애절하게 호소하는 가사를 더없이 애절하게 부르는 가수의 노래와 홍상수 세계의 조합에 대해 적어도 나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홍상수의 전작들에서 음악의 감흥은 음악 자체의 내용이나 개성이 아니라, 그 음악이 세계와 만나는 순간 빚어내는 낯선 감각에서 비롯된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홍상수 영화에서 음악은 서사를 보충하는 기능으로 보는 이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한 적이 없다. 홍상수는 우리 귀에 익숙한 클래식 음악들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상황에 등장시켜 세계를 예상치 못한 차원의 감각지평으로 풍요롭게 확장하는 걸 즐겨온 감독이다. 혹은 그의 오랜 파트너인 정용진 감독이 연주한 단순하고 맑은 피아노 선율은 세계의 쓸데없는 것들을 눌러서 가장 투명한 순간을 살아나게 하는 또 하나의 독립된 세계였다.
<우리 선희>에서 <고향>은 전작들의 음악들과 다르다. 앞서도 말했듯, <고향>이라는 노래의 특이성, 그러니까 음악의 구조와 내용도 다르지만, 그 느낌은 무엇보다 이 노래가 영화에 흘러들어오는 과정에서 이전과는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인상과 더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음악의 정조가 영화 속 세계와 충돌하거나 접속하며 그 세계를 다른 차원으로 이행하고 도약하게 만들었던 전작들의 방식에서 음악이 영화세계의 표면과 부딪치며 만들어낸 감흥은 영화 속의 인물들은 모르는, 영화 밖의 우리만이 누릴 수 있는 체험이었다. 그런데 <우리 선희>에서 <고향>이 당황스러운 건 영화 속 인물들이 그 노래에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영화가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홍상수의 지난 영화들을 상기하면 이건 분명 낯선 광경이다. 우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지금 무언가를 듣고 있다. 그 노래가 디에게시스(diegesis) 내에서 나오는 것으로 설정되었으니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리 간단히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다. 이 노래의 작동과 이에 대한 인물들의 기묘한 반응에는 보다 복잡하고 모호한 움직임이 있고, 그걸 물을 때, <우리 선희>에 대한 새로운 물음도 시작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를 위해 <고향>이 흘러나오는 세 장면을 언급하려고 한다. 학교 앞 치킨 집에서 선희가 먼저 나가버리자, 취한 문수는 텅 빈 가게에 덩그러니 남겨진다. 그때 프레임 안으로 <고향>이 들려오고 문수는 무언가에 홀린 듯 프레임 밖 어딘가를 잠시 쳐다본 뒤 얼굴을 감싼다. 문수의 낙담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처지와 프레임 밖으로 향하는 문수의 갑작스러운 시선, 도무지 치킨 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노래의 어색하지만 강렬한 조합도 잊기 어렵지만, 더 이상한 인상이 있다. 다음 장면에서 문수는 북촌의 골목을 걷고 있는데 이전 장면에서 나오던 노래가 끊이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이 노래의 위치는 어디일까. 치킨 집 어딘가에서 나오는 것 같았던 이 노래가 그대로 이어지며 북촌의 골목길에서도 들린다면, 이 노래는 영화 안에 존재하는 것일까, 밖에 존재하는 것일까. 혹시 이 노래는 문수를 따라다니는 환청이고 그렇다면 우리 역시 문수의 환청을 듣고 있는 것일까(이 노래가 ‘아리랑’에서 다시 나오자 문수는 재학을 향해 “이거 나 좀전에 들었던 노랜데, 진짜!”라고 흥분해서 말하지만 이 말의 뉘앙스는 어딘지 자연스럽지 않다). 문수가 노래를 듣고 있었던 게 아니라, 노래가 문수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까. 그렇다면 이 노래가 처음 흘러나오는 순간, 프레임 밖 어딘가를 돌아보던 문수의 시선은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물론 대답은 불가능하다. 다만 나는 <우리 선희>가 전작들과 비교해 “시간이 혼동되지 않고, 꿈이 등장하지 않으며, 인물의 속마음이 들리지 않는”(‘아름답고 귀한 욕망의 원주운동’, 921호)다는 정한석의 지적에 일면 동의하면서도 <고향>의 괴이한 움직임과 그 안에서 반응하는 인물의 괴이한 행동, 시선이야말로 중층적이고 모호하며, 때로는 귀기어린 기운을 영화에 퍼뜨리는 활동이라고 느낀다.
그들은 음악을 보고 있다
문수와 재학이, 그리고 선희와 재학이 술집 ‘아리랑’에서 만나는 장면들 끝에도 이 노래가 나온다. 문수와 재학 사이의 삐거덕대는 대화의 끝에, 선희와 재학 사이의 애틋한 행동이 오가는 중에, <고향>은 정황상 ‘아리랑’의 주인(예지원)이 프레임 밖으로 나가 트는 노래로 그들의 공간에 흘러들어온다. 앞선 치킨 집 장면에서 문수가 프레임 밖으로 갑자기 시선을 이동하던 것처럼, 여기서도 인물들은 노래가 불쑥 끼어드는 순간, 동시에 화면으로 고개를 돌려 뚫어지게 응시한다. 말하자면 <고향>이라는 신파적인 노래가 마치 파도처럼 프레임을 삼켜버린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인물들의 시선은 이렇게 반복적으로 프레임 밖 어딘가로, 혹은 화면 어딘가로 빨려들어간다. 이 노래는 어디서 들려오는 것일까. 지금 이들은 무엇에 홀린 것일까. 일상적으로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도중 감동적인 노래가 흐를 때, 우리는 그것이 텔레비전에서 나오거나 라이브로 연주되지 않는 이상, 그 노래가 나오는 곳을 궁금해하며 쳐다보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면들에서 인물들이 <고향>에 대해 보이는 무의식적인 반응은 분명 이상한 것이다. 그들은 들리는 걸 그저 들으며 흥에 취하는 대신, 보고 있다. 마치 거기 음악의 육체성이 있다는 듯이.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가 듣는 것을 그들도 듣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지금 그들은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향>이라는 음악의 혼령은 대체 프레임 밖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그 프레임 밖은 여전히 ‘아리랑’이라는 시공간일까. 거기에는 다른 차원의 시공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일까. 다소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물음의 연쇄지만, 내게 이 장면들은 그런 질문의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게 하는 충격을 안겨준다. 홍상수의 영화들을 보며 나는 프레임 밖의 비밀에 대한 호기심에 이렇게 사로잡혀본 적이 없다.
영화 안에서 유일하게 이 노래를 듣지 못한 최 교수에게도 이와 유사한 순간이 있다. 이 순간에는 <고향>이 아니라 정용진의 피아노 선율이 영화 밖에서 흐른다.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며 술을 마신 선희와 최 교수는 다음 숏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골목을 걷는다. 선희는 최 교수를 껴안고 최 교수는 그런 선희의 손을 풀었다가 그녀의 손을 다시 잡고 프레임 밖으로 급하게 나가버리는데 이후 이들의 행로는 생략된다. 술에 취한 그들의 걸음걸이와 프레임 밖 어딘가로 시선을 빼앗긴 듯한 최 교수의 표정, 어딘지 우습지만 간절한 제스처들이 이 순간에 진귀한 리듬을 부여한다. 물론 이 숏의 내용을 설명하기는 쉽다. 최 교수는 반짝이는 모텔의 불빛을 보고 그쪽으로 황급히 걸음을 옮기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 멀리 어딘가로 던져지는 최 교수의 몽롱하면서도 결기어린 시선과 둘의 세세한 행동의 리듬은 여전히 나로 하여금 이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보이는 것들의 충만한 표면들로 구조화되어 거기 감응하게 했던 홍상수의 전작들에서 우리가 느껴본 적 없는 것들이 <우리 선희>에서는 우리를 건드리는 것 같다. 홍상수의 이전 작품들에서는 ‘보이는 것’들, 바꿔 말하면 상투적인 것들이 너무 명징하게 드러나거나 인물들이 보고 있는 것들을 카메라가 정색하고 쳐다보며 그 정체를 다시 보이게 하면서, 오히려 모호함과 생경함을 우리에게 안겼다면(남산이나 성곽이나 동상들을 떠올려보라), 이 영화에서의 모호함과 생경함의 근원은 다르다. <우리 선희>에서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걸 그들만 보게 함으로써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만 보게 함으로써 그런 기운을 자아낸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동안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이끌리는 경험은 적어도 내게는 처음이다.
꿈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문이 모호하거나(<북촌방향> <다른나라에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인물들의 동질성이 모호하거나(<옥희의 영화>), 시간의 축이 모호한(<하하하>) 전작들이 보이는 것들의 명확함을 흔들며 구조적인 신비를 드러냈다면, <우리 선희>에서 인물의 등장과 퇴장, 시간의 흐름은 “굵고 큰 덩어리들이 몇개 안되면서 이어”진다는 홍상수의 표현처럼 단순하고 단단한 편이다. 대신 그 ‘큰 덩어리’ 각각에 리듬을 부여하는 덩어리 내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작용, 영화적 요소들의 움직임이 중요한 것 같다. 전작들이 안에서 더 안으로 갈라지며 층위를 쌓아갔다면, 이 영화는 안과 밖의 호흡으로 리듬을 만든다. 누군가를 부르고 그 부름에 화답하는 목소리로 인물들의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순간을 이 영화는 프레임 안팎을 오가는 시선과 목소리의 운동을 통해 종종 신기한 리듬으로 전환해낸다. 이를테면 문호가 재학의 집 앞에서 그를 부를 때, 유사한 방식으로 최 교수가 재학을 부를 때, 두 인물은 하나의 숏에 담기지 않는다. 우리는 재학의 집 안에서 창가에 얼굴을 빼고 선 재학의 등을 보며 창밖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문호의 목소리를 듣는다. 혹은 골목길에 선 최 교수가 재학의 창가를 올려다보는 광경에 울려퍼지는 재학의 목소리를 듣는다. 말하자면 두 인물이 동시적인 시공간에 존재하며 시선과 목소리를 교환한다는 것이 영화적 사실임에도, 여기에는 이상한 머뭇거림과 엇갈림의 간극이 있다. 프레임 안으로 불쑥 밀려 들어오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와 그 목소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밖으로 향하는 시선의 이미지는 서로 다른 층위에 존재한다는 인상을 준다. 한 사람의 목소리와 다른 한 사람의 이미지가 공존하는, 실은 두 사람의 숏이지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어딘지 불균형한 움직임으로 지탱되는 이 장면들은 인물들의 내면을 드러내는 다른 장치 없이 오직 영화적인 요소들의 움직임으로만 정서적 낯섦과 묘한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말의 세속 안에서
<우리 선희>는 그러므로 어딘가로 던져지고 돌아오는 시선, 소리, 말이 중요한 영화이며, 그 던져짐과 돌아옴의 방향과 타이밍, 즉 그 행로가 기묘한 영화다. 앞서 예를 든 장면들에서는 물론이고, 이 영화에서 선희를 중심으로 돌고 도는 말의 궤적이 그렇다. 내 앞의 당신에게만 해당되는, 당신만을 매혹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말이 다른 사람의 입에서, 다른 사람을 향해 끊임없이 반복될 때, <우리 선희>는 말의 진위나 출처보다 그것의 자율적 활동의 활기에 더 매료된 것처럼 보인다. 그 행로에서 말의 내용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그 말의 톤이, 말의 뉘앙스가, 그리고 말이 이끌어내는 반응이 어떤 미묘한 차이의 리듬을 발생시키는지 보고 싶어 하며, 그 각각의 차이가 불러일으키는 충만감, 간절함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선희>에서 반복되는 말의 내용은 (단 한 사람에게) 유일무이하지 않지만, 말이 던져지는 순간의 공기, 말의 행로가 파놓은 기억들은 언제나 유일무이하다.
선희와 세 남자의 유사하지만 다른, 수평적으로 나열된 만남 혹은 확정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생략하는 관계, 그러니까 홍상수가 말한 “굵고 큰 덩어리들”을 붙잡으며 종종 거울처럼 서로를 비치게 하는 축은 선희라는 실체이기보다는 선희와 함께 생성되는 말의 행로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 말들이 반복되며 만들어내는 행로는 선희와 세 남자들 사이에서 우연이 작용한 결과지만, <우리 선희>라는 세계에 최소의 구조를 부여하는 영화적 필연이다. 나는 <우리 선희>가 실체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말의 한계를 보여주는 영화라는 세간의 평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선희>는 오히려 그 실체라는 것이 말로 따라잡을 수 없는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말의 작용, 행로와 함께 변하는 것이라고 믿는 영화에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선희는 세 남자의 선망을 받으면서도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끝내 말로 표현 불가능한 기이한 여인이 아니라, 말의 행로 속에서 자신을 진심으로 알고 싶어 하길 멈추지 않는 여자다.
말의 내용에는 개의치 않지만, 말의 행로를 민감하게 따라가며, 말이, 소리가, 음악이 들리는 곳을 쳐다보고 거기 매번 달리 반응하는 인물들이 여기 있다. 우리는 그들이 거기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곳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끝내 알지 못하며, 영화 또한 모르는 것 같다. 다만 그 행로를 붙잡고 기억하며 떠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것 같다. 결국 말은 다 쓸데없는 것이라고 말해버리는 건 홍상수의 방식이 아니다. 말의 상투적 파편들로 어떻게 질문을 꺼뜨리지 않으면서 그 과정에서 아주 잠깐 스쳐가는 투명한 한순간을 건져낼 것인가. 말의 세속 안에서 그 세속을 꿰뚫는 맑음을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 선희는 떠났고 카메라는 고궁의 사라진 무언가의 흔적을 들여다보는 남자들을 멀리서 어리석고 귀여운 작은 개미처럼 찍었다. 선희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안고 말의 행로를 따라온 결과가 결국 저 세 남자들처럼 지금은 텅 빈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것이라 해도 이 마지막 장면의 찡하게 아름다운 정취와 깊이는 그 행로가 더없이 소중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