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호의 오! 마돈나]
[한창호의 오! 마돈나] 정치를 넘어 전설이 되다
2013-10-04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알리다 발리 Alida Valli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초기작 <거미의 계략>(1970)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를 각색한 작품이다. 30살의 베르톨루치는 여전히 고다르적인 청춘의 당돌함으로, 영화의 관습을 부수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보르헤스의 단편 자체도 복잡하고 모호한데, 베르톨루치는 여기에 자기의 상상력을 덧칠하여 결과적으로 초현실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이야기는 아들이 반파시즘의 레지스탕스 영웅으로 찬양되는 아버지의 과거를 찾아가는 것인데, 종국에는 부끄럽게도 영웅이 아니라 배신자로서의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 배신자-영웅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여성으로 알리다 발리가 나온다. 베르톨루치가 특별한 이유 없이 그녀를 주연으로 캐스팅하진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그녀

알리다 발리는 아마 <제3의 사나이>(1949)의 마지막 장면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비엔나의 고풍스런 길에서, 안톤 카라스의 그 유명한 치터 현악기 선율이 연주되는 가운데, 자신을 기다리던 남자(조셉 코튼)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냉정하게 걸어가던 여성으로서 말이다. 이 영화를 통해 발리에겐 비밀이 많고, 도도하고, 무엇보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배우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발리는 할리우드의 큰 손 데이비드 셀즈닉에 의해 미국으로 스카우트된 배우다. 셀즈닉은 잉그리드 버그먼을 초대하여 대중적 성공을 경험했는데, 이번에는 이탈리아에서 발리를 데려와 그와 같은 영광을 다시 누리고자 했다. 발리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앨프리드 히치콕의 <패러딘 부인의 재판>(1947)에 주연으로 나온다. 곧바로 거장의 작품에 캐스팅된 것이다.

두 영화를 통해 발리는 할리우드에서 성공적인 1950년대를 맞이할 것 같았다. 그런데 1951년 돌연 이탈리아로 돌아온다. 공개된 이유는 셀즈닉이 유럽의 제작자들과 달리 지나치게 배우에게 통제권을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세계 최고급의 제작자가 자신을 잉그리드 버그먼처럼 지원해줄 준비가 돼 있는데, 그런 조건을 거부하고 귀국한 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지만, 도도한 여배우의 자존심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들이 나왔다.

할리우드로 가기 전, 알리다 발리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시절의 스타였다. 그레타 가르보의 도도한 눈빛에, 순간적으로 불안감이 스쳐 지나가는 복잡한 인상, 그리고 빼어난 외모로 발리는 스크린에 등장하자마자 ‘이탈리아의 연인’이 됐다. 1941년 불과 20살에 <오래된 작은 세상>(감독 마리오 솔다티)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이탈리아의 대표 배우로 우뚝 섰다. 그러나 영화제는 무솔리니 정권에 과도하게 이용될 때였고, 그런 영광은 결국 종전 이후 멍에로 작용했다.

전쟁 이후 영화계의 파시스트 관련자들은 대부분 대가를 치러야 했다. 대중에게 노출된 배우들은 종종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는 네오리얼리즘이 시작됐고, 배우가 아닌 일반인들이 연기를 하는 이런 계열의 영화에서 기존 배우들은 일할 기회도 별로 얻지 못했다. 특히 네오리얼리즘과 파시즘을 떠오르게 하는 배우와는 서로 섞일 수 없는 관계였다. 알리다 발리는 스크린에서의 퇴장이 예상됐다. 게다가 무솔리니의 둘째 아들인 브루노 무솔리니와 연인 사이라는 소문도 있어서, 종전 뒤 발리의 입지는 대단히 불리했다. 셀즈닉의 초대는 그때 온 것이다. 발리는 전후 파시스트의 잔재를 청산하려던, 자신에겐 불리한 사회분위기를 피해 미국으로 갔고, 그곳에서 보란 듯 다시 스타가 됐다.

비스콘티와 만난 뒤 왼쪽으로…

이탈리아에 돌아왔을 때, 발리는 불과 30살밖에 안됐는데,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배우로 보였고, 또 미래의 역할도 별로 기대할 게 없어 보였다. 파시즘의 적극적 지지자였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때 호사를 누린 배우에 대해 관객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손을 내민 감독이 루키노 비스콘티다. 멜로드라마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센소>(1954)를 통해서다.

전후 이탈리아의 여성 이미지가 맨발의 강인함(지나 롤로브리지다), 혹은 원시적 관능미(소피아 로렌) 등으로 각인될 때 유럽 특유의 퇴폐적인 귀족 이미지로 나타난 게 <센소>에서의 알리다 발리다. 자연의 야만이 아니라, 문명의, 아니 퇴폐의 병든 품위는 이탈리아의 전통을 단숨에 소환하는 캐릭터였다. 그것은 네오리얼리즘으로 잠시 잊고 있던 이탈리아라는 국가의 오래된 이미지이기도 했다. 발리는 매너리즘 화가들 초상화 속의 주인공처럼 오만하고 고독해 보였다. 그는 다시 스타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비스콘티는 이탈리아 좌파 영화인들의 리더다. 그와의 만남 이후 발리의 경력은 왼쪽으로 기운다. <외침>(1957)의 안토니오니, <오이디푸스 왕>(1967)의 파졸리니, 그리고 1970년대 들어 베르톨루치를 만난다. 베르톨루치와는 <거미의 계략>, <1900>(1976), <달>(1979) 등 모두 세편을 찍었다. 그러면서 알리다 발리도 진보적인 배우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한때 파시스트의 동조자로 의심을 받던 배우치고는 극적인 반전이었다.

<거미의 계략>에서 알리다 발리는 배신자-영웅의 숨겨진 연인 역이었다. 발리에게 이중적인 인상을 갖고 있던 관객이 많을 때, 이 영화는 발표됐고, 그래서 발리의 등장 자체가 영화의 테마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관객의 기억 속에 발리는 영웅이기도, 배신자이기도 했다. 베르톨루치가 발리를 캐스팅한 것은 보르헤스 소설의 테마와 겹치는 그녀의 모호한 정체성을 토대로 삼으려는 이유가 컸다. <거미의 계략>은 이탈리아 현대사의 굴곡진 현상에 대한 패러디이기도 했지만, 스타 알리다 발리의 정체성에 대한 수수께끼 같은 영화였다.

진보적 이미지의 정점을 찍은 작품이 <베르링게르, 당신을 사랑해>(1977)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동생인 주세페 베르톨루치의 감독 데뷔작이자, 로베르토 베니니의 데뷔작이다. 베르링게르는 당시 이탈리아 공산당의 당수였는데, 영화는 어느 청년 노동자(로베르토 베니니)의 베르링게르에 대한 환상을 그린 코미디이다. 발리는 청년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 풍자극이지만,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영화가 어떤 정치적 태도를 갖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전후 발리의 진보적 이미지는 그렇게 형성됐다. 그런데 이미지는 전설이고, 사실은 묻혔다는 주장은 지금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숱한 의혹을 넘어(이를테면 귀국 동기는 미국 정부의 과거에 대한 집요한 수사 때문이라는 것)전설을 역사로 만드는 것, 이것도 스타의 덕목 가운데 하나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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