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민수 감독-노희경 작가가 콤비를 이룬 <거짓말>(1998) 같은 드라마를 글로 배워 만들 수 있을까? 글쎄다. <바보 같은 사랑>(2000), <인순이는 예쁘다>(2007), <그들이 사는 세상>(2008) 같은 표민수 감독의 드라마는 삼각관계, 불륜 같은 뻔한 설정에 한번도 보지 못한 인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시청률이 바닥이어도, 표민수표 드라마에 열렬히 환호하는 마니아층이 형성됐다. 표민수 감독이 데뷔작 <거짓말> 이후 15년간, 노희경 작가와 콤비를 이룬 마니아 드라마부터 한류 붐을 탄 <풀하우스>(2004), 블록버스터 <아이리스2>(2013)를 연출하면서 얻은 노하우를 한권의 책 <드라마 어떻게 만들 것인가>(씨네21북스 펴냄)에 집대성했다. 이 책에는 작품의 테마를 잡고, 캐릭터를 형성하고, 작가와 협력하고, 촬영하고 믹싱을 하는 드라마 제작 과정의 전 분야에 걸쳐 표민수 감독이 생각하는 드라마는 무엇이고 또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연출에 관해 그는 “연출은 권한이 아닙니다. 남의 인생을 통제하는 힘이 아닙니다. 그저 선택일 뿐입니다”라고 규정한다. 딱딱한 이론서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가 만드는 드라마 제작 곳곳에는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이 책은 그래서 표민수 감독의 세계를 이해하는 입문서로 보는 게 더 맞다. 여의도 작업실에서, 다음 작품을 구상 중인 표민수 감독을 만났다.
-드라마에 관한 책을 낼 결심은 어떻게 한 건가.
=써보자는 욕심이 난 게 드라마 연출에 관한 책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사극을 제일 많이 한 고(故) 김재형 감독님은 조선시대 관혼상제를 다 외우고 계시는 분인데 아무 기록도 안 남기고 가셨다. 고(故) 김종학 감독님도 마찬가지고. 남겨놓은 글 없이 사라지는 선배들을 보면서 나라도 작게나마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내가 드라마를 처음 했던 1998년부터 2013년까지 15년가량의 드라마 이야기이니 또 누군가 20년의 이야기를 쓰면 드라마의 기록이 되지 않을까. 드라마의 학문으로서, 산업화로서의 가치도 기록을 통해서 점검이 될 것 같았다.
-PD가 보는 드라마 전 과정의 스페셜 분야를 다루고 있다. 기획, 제작, 투자, 작가, 연출, 편집 등 각각의 파트에 대한 PD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구성이라 의미가 크다.
=결국 드라마는 PD가 각 파트에 관여해야 한다. 원고에서 믹싱, 사후 평가까지 모두 PD가 책임을 진다. 그러니 각각의 파트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는 바를 안 넣을 수 없더라. PD는 전문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관여를 안 할 수도 없는 중간자 입장이다. 글을 쓸 수도 없고, 편집도 간단한 것 말고는 못하고, 음악도 안된다.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하는 척하는 게 연출이구나 싶어서 자괴감이 들 때도 있다. 이번에 글을 쓰면서 연출이란 자리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관계를 조율하고 접목시키는 윤활유 같은 역할이라는 생각이 더 크게 들더라.
-드라마의 전 과정을 짚어본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 같다.
=연출이 더 쉽더라. (웃음) 책 쓰는 데 1년 반 정도 걸렸다. 스스로 이 책의 솔직함의 수위를 이야기한다면 100점 만점에 80~90점 정도라고 생각한다. 홀딱 벗는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참 어렵더라. 처음엔 한 작품의 제작기를 일기 형식으로 쓰는 것을 생각했다가 지금처럼 파트별 구성으로 내가 연출한 드라마들의 예를 들었다. 기술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내가 연출한 드라마들이 어떤 건지 설명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내가 인물을 이 각도로 찍고 또 뒤집어서 찍고 하는 건 그 사람의 입체적인 면을 보기 위한 것인데, 드라마를 보고 현실에서도 사람들이 그런 시각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강해 보이는 사람이 약해 보일 수도 있고, 이 사람이 여기서 자존심을 세울 때는 다른 데서는 그러지 못해서 더 그럴 수도 있고. 뉴스에 오르내리는 많은 사람들이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드라마에서 그걸 보여주고 싶다.
-드라마를 만드는 건 매번 도전이다. 올 초 <아이리스2>는 그간 하지 않았던 블록버스터 액션극인데, 시청률 저조와 함꼐 평가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새로운 시도였는데, 오히려 표민수 PD의 영역은 따로 있다라는 생각을 굳힌 예가 되어버렸다.
=시즌1보다도 못했고, 시청률도 안 나왔다. 이쪽 분야에서는 내가 부족했구나 싶더라. 궁색한 변명을 하자면, <고독> 끝내고 <풀하우스> 할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다른 장르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풀하우스> 때도 나를 다독인 게 코미디는 처음이니 해보자였고, <아이리스2> 때도 액션은 처음 하는 분야라는 스스로에 대한 위안에서 출발했다. 기본 골격은 내 다른 작품처럼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며, 폭파되는 게 아니라 폭파된 뒤 쓰러진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디지털이 극대화됐으니 아날로그적으로 그려보고 싶었고, 좀 다른 액션을 구사해보고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잘 안됐다. 시청률이나 완성도나 아쉽지만, 선택하고 운용한 거에 대해서는 후회는 없다.
-<아이리스2>의 색깔이 달랐던 건 직접 기획한 작품이 아니여서였다. 제작사 대표로 회사를 끌어나가야 하니 상황상 연출을 맡게 되는 경우도 어쩔 수 없이 생긴다.
=연출자만 기획을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즘은 제작사가 기획하는 작품이 많아졌다. 연출이 기획을 하는 게 아니라 작가를 먼저 정하고 기획을 시작할 수도 있고, 제작사도 작가도 일반인도 기획할 수 있다. 이런 구조라면 다양한 작품이 많이 나올 수 있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고 본다.
-<거짓말>부터 이어지는 일종의 ‘불륜’시리즈를 만들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준비 중인 <실락원>은 좀더 전공분야에 가까운 시도다. 와타나베 준이치의 소설이 원작이고, 드라마와 영화로 이미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어떤 지점에서 새롭게 접근하려고 하는가.
=작고 소소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결국 자본에 대한 부담도 배우 캐스팅에 대한 부담도 적다는 게 핵심이다. 사랑이라고 하는 멜로, 불륜을 19살까지 끌어와 보고 싶었다. 어떤 두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하는데, 정신적인 부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혹은 육체에만 집착하는 걸까. 두 가지가 결합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정신에서 출발해서 육체로 만족하든 그 반대가 되든. 두개의 수레바퀴는 어떻게 굴러가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육체적 만족. 거기서 오는 더욱더 큰 사랑, 그 뒤의 더 큰 허탈감, 이런 문제들을 짚어보고 싶었다. 신인작가와 기획서 작업 중이고, 내년 3~4월에 나올 것 같다.
-<아이리스2> 때는 마침 노희경 작가의 <그 겨울, 바람이 분다>(2013)가 같은 시간대에 편성돼 대결 구도로 화제가 됐었다. 많은 시청자들이 표민수-노희경 콤비의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또 할 거다. 노희경 작가와 쉬지 않고 한 것 같지만 사실 <고독> 끝나고 노희경 작가와 <그들이 사는 세상> 하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노희경 작가는 작가 이전에 나의 든든한 동료이자 친구다. 지금은 본인은 본인 스타일로, 나는 나대로 작업을 하고, 언젠가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시각이 배양된 뒤 만나면 또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