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아만다 시프리드] 포르노 스타로 돌아온 프리티 걸
2013-10-17
글 : 이후경 (영화평론가)
아만다 시프리드

“난 설레는 첫 키스의 상대가 될 수도, 혹은 음란한 포르노 잡지의 모델이 될 수도 있어요. … 난 마음만 먹으면 당신만의 살아 숨쉬는 꿈의 여인이 될 수 있어요. 그런 뒤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죠.” <러브레이스>의 린다 러브레이스가 있기 전, <클로이>의 클로이는 섹스에 관한 판타지를 팔아 먹고사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그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저 말이 배우의 숙명에 관한 말로도 들렸다면 과언일까. 적어도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포르노 스타에 관해서라면, 과언이 아닌 듯하다. 린다는 자기 삶의 한 챕터 내내 구강성교에 비상한 기술을 지닌 포르노 여배우로, <목구멍 깊숙이>의 전례 없는 성공에 힘입어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스타로 살았다. 대중이 원했고, 그녀의 남편이 원했다.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이미지는 아니었다.

아만다 시프리드도 데뷔 뒤 오랫동안 한정된 이미지에 갇혀 지내야 했다. 예쁘장한 얼굴에 깡마른 몸의 그녀는 11살부터 모델 일을 하다 10대 후반에 TV와 영화쪽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한동안 주인공 친구 전문배우로 살았다. 하이틴 탐정물 <베로니카 마스>에서는 베로니카의 꿈속에만 등장하는 죽은 친구로, 하이틴 코미디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서는 퀸카의 측근으로 머물렀다. 그다음에는 부모의 삶을 그대로 물려받기를 거부하는 당돌한 딸로 살았다. 모르몬교 가족에 관한 드라마 <빅 러브>에서 일처다부제에 반대하는 딸이, 뮤지컬영화 <맘마미아!>에서 엄마가 지어놓은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안달한 딸 소피가 그러했다.

<맘마미아!>의 소피는 어쩌면 시프리드가 오랫동안 기다린 운명이었다. 부모를 따라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며 자랐고, 집에선 “키우는 고양이마저 질릴 정도로 노래를 불러댔”으며, 모델 일을 관둔 뒤 2년간 클래식 오페라를 공부하고 5년간 브로드웨이 출신 코치에게 목소리 트레이닝을 받은 그녀였다. 하지만 불안 장애와 공황 발작 증세가 있어 무대에 오르기는 역부족이었으니, 노래와 연기가 “완벽하게 결혼한 영화” <맘마미아!>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소피 역을 따낸 그녀는 기라성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 뮤지컬 배우 수준의 독보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가늘지만 흡입력 있는 목소리로 자신이 주인인 장면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했다”는 그녀의 기질이 과잉 에너지가 특징인 뮤지컬에 잘 맞기도 했다. 그러나 소피 역으로 ‘아는 소녀’의 이미지를 탈피하긴 어려웠다.

모델 시절, 프랜신 파스칼의 하이틴 로맨스 소설 표지 모델로 유명세를 떨쳤던 시프리드는 여배우로서도 “로맨스영화 속 ‘프리티 걸’을 전전했다”. 포스트 9.11 시대를 배경으로 한 멜로드라마 <디어 존>에서는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하는 이타적인 중산층 청순녀 사바나를, <트와일라잇> 제작진이 늑대인간 판타지와 동화를 결합해서 만든 <레드 라이딩 후드>에서는 마을에서 가장 예쁜 탓에 삼각관계에 빠지는 소녀 발레리를 연기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무대인 이탈리아 베로나로 날아간 로맨스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에서도 소박한 글재주로 헤어진 지 50년 된 노커플을 이어주고 본인 역시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예비 저널리스트 소피를 맡았다. 그렇게 그녀의 필모그래피에는 비슷한 캐릭터들이 이어졌다.

“마냥 순진하고 청순한 로맨틱영화의 주인공 역할만 하고 싶지 않았다.” 동물 박제 수집이 취미인, 알고 보면 평범하지 않은 시프리드는 아톰 에고이얀의 <클로이>를 통해 기존의 이미지에 흠집을 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클로이>는 남편과의 권태기를 견딜 수 없는 상류층 커리어우먼이 왕년의 열정을 되찾고자 클로이라는 창녀를 고용해 남편을 시험하는 내용의 영화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 위에 선 팜므파탈 클로이 역에 그녀를 캐스팅한 에고이얀은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바로 저 여자야!’라고 직감했다”고 한다. 그의 직감대로, 그녀는 이 영화에서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하나의 가면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특히 시원하게 드러난 둥근 이마와 튀어나올 것만 같은 큰 눈은 사마귀를 연상케 하는데, 그 인상은 한 가정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만큼 위협적이다. 비록 영화는 클로이의 죽음을 통해 갈등을 봉합하고 중산층의 가치를 보존하지만, 인간의 성적 욕망을 형상화한 그녀의 가면은 쉬이 증발하지 않는다.

시프리드의 모험은 계속됐다. <인 타임>에서는 돈으로 영원한 젊음을 살 수 있는 기득권층 자제지만 처음 보는 게토 출신 남자를 따라 무모한 혁명에 가담하는 실비아였다. 그리고 <레미제라블>에서는 아버지와의 안전한 도피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남자와의 로맨스를 위해 혁명의 물결이 거센 파리에 남기를 고집하는 코제트였다.

‘러브레이스’라는 도전

‘포르노그래피’라는 장르명은 ‘할리우드 여배우’라는 직업명과 짝짓기에 가장 아슬아슬한 단어 중 하나다. 그러니 린다 러브레이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시프리드에게 얼마나 위험한 도전이었을지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그녀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역을 원했다”고 말한다. 다행히 두 감독이 원한 방향도 린다 ‘러브레이스’의 포르노그래피가 아니라 은막에 가려진 린다 ‘보어먼’의 비극이었다. 시프리드도 린다의 목구멍이 아닌 목소리에 귀기울이려고 노력했다. 포주나 마찬가지였던 남편의 무자비한 폭력을 무모할 만큼 오랫동안 인내해온 그녀를, 어떤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마주보려 했다. “린다 러브레이스와 마이클 맥그래디가 공동 집필한 두권의 책 <속박을 벗어던지고>(Out of Bondage)와 <시련>(Ordeal)을 읽었는데 끔찍했다. 물론 린다의 주장에는 왜곡된 부분도 있다. 하지만 린다를 연기하면서 의심을 모두 버렸다. 그녀를 믿지 않고서는 그 역을 제대로 해낼 수 없으니까. … 내게 중요한 건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린다의 목소리는 육체적 폭력에 대한 공포를 무방비하게 드러내는데, 한없이 연약하면서도 단단해서 감동적이다.

영화가 끝나고, 린다는 은막 뒤로 사라진다. 하지만 10년 전에 비해 훨씬 능숙하게 어둠을 흡수하게 된 시프리드의 얼굴은 은막 앞에 남아 있다. 쉽게 부서질 것 같은 작은 체구와 어떤 상처와 고통도 희석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커다란 눈망울로 관객을 단단히 옭아맬 줄 아는 배우 아만다 시프리드. 그녀와 함께라면 어떤 그림자도 아름다워 보이리라.

<러브레이스>

magic hour

관능적인 얼굴의 시작

“대단히 힘든 역할이었지만 그녀에게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아톰 에고이얀의 <클로이>를 촬영한 뒤 아만다 시프리드의 에이전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에이전트의 말을 누가 쉽게 믿겠냐마는, 그 뒤로 할리우드를 떠돈 캐스팅설은 저 말이 속 빈 강정이 아님을 입증했다. <클로이>는 그녀에게 <러브레이스>보다 더 과감한 변신을 감수해야 했던 작품이었다. 이전까지 그녀는 주로 청순한 캐릭터들을 연기하며 “섹스 신이 나오면 손을 어디다 둬야 할지 어쩔 줄 몰랐”지만, 완성된 영화 속 그녀는 또래지만 느낌이 다른 배우 스칼렛 요한슨을 연상케 할 정도로 관능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영화를 통해 팔색조 매력을 증명한 덕분일까. 바즈 루어만 감독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무책임한 욕망을 대변하는 인물 데이지 뷰캐넌 역,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마스터>에서 마스터의 방탕한 딸 엘리자베스 도드 역에 그녀가 거론되기도 했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