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최승현] 거짓말 못한다, 꽂히면 한다
2013-11-04
글 : 이후경 (영화평론가)
사진 : 백종헌
<동창생> 배우 최승현

빛바랜 졸업앨범을 뒤적이다 보면 여러 얼굴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중 어떤 얼굴은 세월이 지나며 초점이 나간 사진처럼 흐릿해지지만, 어떤 얼굴은 사진보다 기억 속에 이미 훨씬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배우 T.O.P 혹은 최승현은 엄연히 후자에 속하는 얼굴이다. 또래의 남자배우들에 비해 훨씬 진하고 묵직한 인상의 그는, 비유하자면 목탄으로 꾹꾹 문지른 그림 같다. 그 거칠고도 부드러운 느낌의 선과 면으로 꽉 차 있는 그의 이미지들은 적은 움직임만으로도 오랜 잔상을 남긴다. 그가 배역의 대소에 관계없이 절대 배경(背景)을 연기할 수 없는 이유다. 빅뱅과 GD&T.O.P 일원으로서의 그를 비롯해 앞서 지나간 드라마 <아이리스>의 냉혈 킬러 빅이 그랬고, 영화 <포화속으로>의 학도병 중대장 오장범이 그랬다.

<포화속으로> 이후 3년 만에 영화 <동창생>으로 돌아온 그 역시 결코 평범한 동창생이 아니다. 북에 홀로 남겨두고 온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낮에는 거짓 신분으로 위장한 고등학생 강대호로, 밤에는 살인병기로서의 임무에 충실한 남파공작원 리명훈으로 살아야 한다. 임무를 마치면 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약속도 불투명하다. 남과 북, 낮과 밤의 간극, 본명과 가명, 희망과 절망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서서히 찢겨져가는 가엾은 영혼 리명훈/강대호. 빅과 오장범을 거쳐 그들을 만나게 된 T.O.P/최승현은 압축적인 대사와 경제적인 액션에 한줌의 연민을 더 얹어냈다. 이 물기 어린 청춘이 또 얼마나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댈지 미리부터 두근거린다.

확실한 것은 이번에도 그로 인해 적어도 2시간 동안은 우리의 일상이 우지끈거리리라는 사실이다. 일상을 스크린 안으로까지 끌고 들어와 좋은 배우가 있고, 일상을 스크린 너머로 추방해버리기에 유혹적인 배우가 있다. 제작사 더 램프 박은경 대표의 표현에 따르면 “‘쟤, 어디서 왔지?’ 하고 계속 궁금하게 만드는” 이 우월한 유전자의 배우는 존재만으로도 일상적 공간을 특별한 무대로 둔갑시키기에 충분하다. 그가 들어서는 순간 교실은 그냥 교실이 아니요, 옥탑방은 그냥 옥탑방이 아니다. 지난 금요일 아침, <씨네21> 스튜디오가 그냥 스튜디오가 아니었듯 말이다. 4시간 동안 그는 그곳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천천히, 그리고 완연히 홀렸다. 그라면 <동창생>의 저 절박하고도 애틋한 허구 속으로 누구든 뛰어들게 만들 것 같았다.

그가 꽃미남 남파공작원 혹은 꽃미남 액션스타의 계보에 눈부신 한점을 찍을 수 있을까. 아쉽게도 인터뷰는 영화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기대만을 잔뜩 품은 채 진행됐다. 하지만 기자의 단순무식한 질문에도 그는 시종일관 정성스레 답을 건넸다. 그 곰곰이 생각하며 말을 이어가는 표정이 너무도 예뻐서, 그 끊어졌다 이어졌다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는 목소리가 너무도 기특해서, 결국 그와의 대화를 고이 옮겨오게 됐다. “아침마다 최소 5개의 아이디어를 가져오는데, 밤새 함께 고민해준 사람이 있는 느낌이라서 감동이었다”는 박홍수 감독의 말처럼, 그의 고민들이 이 영화에 튼튼한 뿌리를 내려주었으리라 짐작된다.

-시나리오의 어떤 부분에 끌렸나.
=시나리오가 매우 생략적이었다. 대사보다 지문이 많았고. 이건 앵글 안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유치한 영화가 될 수도, 고급스러운 영화가 될 수도 있겠더라. 배우에게는 굉장히 고통스럽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리명훈이란 캐릭터에 대한 첫인상은 어땠나.
=리명훈이라는 친구가 너무 안타까워 보였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내가 안 하면 안되겠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던 것 같다. 처음 영화사 대표님을 만나서도 농담 삼아 그랬다. 이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하면 영화 망쳐놓을 것 같다고. (웃음) 결과적으로 내가 해서 더 망쳐놓은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또래 배우들 중 드물게 상남자의 외모와 분위기를 가졌는데 전작에 이어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캐릭터를 선택했다.
=T.O.P 하면 연상되는 빤한 인물에는 별로 안 끌린다. 리명훈은 아직 미완성의 인간이다. 이 어린 친구가 세상에 던져져서 자기 짐을 감당하기 버거워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 점을 설득하는 데 연민이란 페이소스가 중요하다고 봤고.

-본인도 배우로서 T.O.P과 최승현 두개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감독과 리명훈/강대호 캐릭터의 정체성에 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리명훈과 강대호의 이중성이 선과 악의 대립은 아니다. 리명훈으로 태어나서 리명훈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인물인 거다. 그런 캐릭터가 가진 정체성의 커다란 부피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감독님께 처음 시나리오 읽고 상상한 감정의 영화를 2편 정도 보여드렸다.

-어떤 영화들이었나.
=리명훈의 표정이 절제됐으면 좋겠더라. <A.I.>에 나오는 꼬마 로봇을 보면 새로운 상황에 놓일 때마다 어디로 갈지 몰라 왔다갔다 하는 것을 무표정으로 다 보여주잖나. 커다란 스크린으로 봤을 때 그런 부분을 디테일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특히 극중 인물들에게는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관객만 명훈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순간에는 아이 같은 표정이 한두개씩 나오면 굉장히 근사할 것 같더라. 꼬마 로봇이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는 눈빛만으로 연민을 일으키듯. 다른 한편은 <가타카>다. 그 영화 속 인물들은 누군가가 되고 싶어서 피부를 깎는 노력들을 하는데, 그걸 반대로 가져와서 자기 삶을 살고 싶지만 살지 못하는 인물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아저씨> 같은 기존의 액션물에서 다른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게 준비해서 막상 촬영 때는 무방비 상태인 것처럼 연기한다더라.
=캐릭터에 접근하는 방식이 단순하다. 그냥 그 인물이 되려고 한다. 그러면 뭐가 나오는 것 같다. 이번에도 눈과 마음에 많은 것들을 가지고 출발하려고 노력했다. 대사가 워낙 적은 캐릭터이기도 했고. 때로는 침묵이 너무 힘들었다.

-예고편 속 “너 나 모르잖아”를 비롯해 본인의 아이디어로 바꾼 대사가 많다고.
=시나리오에 있었던 직접적인 표현들로는 리명훈의 매력이 반감될 것 같더라. “난 괴물이 되어가고 있어” 같은 대사는 오그라들잖나. “나 친구 같은 거 없어”, “나한테 이러면 안되죠.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요” 같은 단순한 대사들을 만들어 넣었다. 계산해서 만든 건 아니고, 리명훈이 돼서 리명훈이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어봤던 것 같다.

-랩을 만들 때도 생략적인 표현을 선호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연기할 때도 비슷한가.
=이번에는 그랬다. 불필요한 열마디 대신 한마디로 딱 표현이 될 때 짜릿했다. 덜 직접적이지만 더 솔직담백한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짜릿함.

-말보다 몸으로 표현해야 하는 부분은 어땠나.
=움직이기로 한 장면에서 움직이기 싫을 때가 있었다. 나도 왜 그런지 몰라 말은 못하고 가만히 있으면 감독님이 딱 알아차리시고 “움직이기 싫구나. 그 상태로 가자”고 해주셨다. 감독님도 나도 억지스러운 건 피했다. 화난다고 화내고, 슬프다고 우는 정극 연기는 리명훈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연기를 더하기보다 빼기 개념으로 생각하는 편인가.
=최대한 많이 보여주기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내가 가진 것 중에 좋은 것만 편집해서 보여주려는 성향이 강하다.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해버리면 기름기가 끼거나 군더더기가 생기는 것 같다. 오히려 절제했다가 폭발시키는 강도와 밸런스를 잘 조절할 줄 아는 것이 실력인 것 같다. 얼마 전에 TV에서 <포화속으로>를 해주기에 다시 봤는데, 지금 보니 그때의 나한테도 기름이 껴 있더라.

-꾸준히 실제 나이보다 10살쯤 어린 배역들을 연기하고 있다.
=<포화속으로> 땐 15살이었고, <동창생> 땐 17살부터 시작했다. 딱 27살 되는 1월1일에 “열일곱입니다”라는 대사치는 장면을 찍었다. (손으로 V자를 만들며) 나 자신이 너무 좋더라.

-<포화속으로> 때는 거울 보며 어린이 표정도 연습하지 않았나.
=이번에는 오히려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했던 것 같다. 정상적인 상황에 놓인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평범한 고등학생의 모습은 아예 배제했다.

-태도가 달라진 점은 없나.
=이번에도 내 청춘을 불사르자는 마음이었다.

-감독도 이 영화에 최승현의 청춘을 담고 싶었다더라. 본인에게 청춘이란.
=그냥 내 나이가 청춘인 것 같다. 죽을 때까지 청춘이고 싶기도 하고. 20대 때 20대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을 과감하게 다 해봐야지, 나태하게 있거나 겁먹고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을 어느 순간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그때의 내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려 한다. 단, 과하지는 않게.

-정박에 맞춰 춤을 추던 리듬이 몸에 박혀 있어 액션 연기할 때 고생했다고.
=박자 없이 몸을 갖고 놀려니 힘들더라.

-어떻게 고쳤나.
=현장 모니터를 많이 했다. 최대한 내 모습이 추하다고 생각하고 봤다. 나를 내가 모니터할 때 이상한 악마가 들어온다. 나도 잘 몰랐던 못된 표정이 막 나오고.

-연기 모니터를 주로 스스로 하나.
=그렇다. 내 주변 사람들은 오히려 전문적이지 대중적이진 않기 때문이다. 그들 말만 들으면 오히려 내가 산으로 갈 수 있다. 그래서 듣되 따라가지 않고, 내 갈 길을 열어두려 한다.

-일할 때 알아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유형인가.
=대중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대중에게 내가 잘하는 것을 더 많이 보여주려면 내가 내 배설물의 냄새도 맡아보고 맛도 보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 내가 봐도 이렇게 괴로운데 남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더 우스울까’ 생각하면서 억지로 본다. 그렇게 내가 오글거려보면서 조금씩 바뀌어가는 것 같다. 괴로운 만큼 카타르시스도 있고.

-음악할 때 카타르시스와 연기할 때 카타르시스가 어떻게 다른가.
=음악은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으면서 대중의 심리를 배워가는 재미가 있다. 반면 연기는 장기간 준비한 것을 한번에 평가받는 거잖나. 오래 고민해서 어떤 인물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아주 근사하게 느껴진다. 조금조금 차곡차곡 한 신 한 신 만들어나가면서 가시 돋친 부분을 느끼기도 하고 방심해서 무언가를 놓치기도 하는 것이 스릴 있다.

-캐릭터 준비 기간이 긴 편이더라. 에너지 소모가 많은 편인 만큼 작품 선택에 더 신중하겠다.
=아니, 그냥 꽂히는 걸 한다. 안 꽂히는 건 못한다. 나 자신한테 거짓말을 잘 못하는 편이라.

-연기는 거짓말을 잘하는 것이라고도 하지 않나.
=나도 공부하는 단계지만, 두 가지 성향의 배우가 있는 것 같다. 거짓말을 잘하는 성향의 배우와 거짓말을 잘 믿는 성향의 배우. 나는, 거짓말을 잘 치는 ‘테크닉’을 못 배워서 그런지 후자인 것 같다. 테크닉만으로는 100명이면 100명 모두를 감동시키기 어렵다는 생각도 하고.

-연기를 배운 적이 없나.
=없다. 어릴 때부터 쉴 때면 음악 듣는 것과 영화 보는 거, 두 가지밖에 안 해서 영화를 보면서 배운 게 다다. 그런데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 오히려 열정이 생기는 것 같다. 정석적인 연기를 못하는데, 한편으로는 정석적인 연기를 하게 될까봐 두렵기도 하다.

-좋아하는 배우는 누군가.
=많은 배우를 좋아하지만 롤모델은 없다. 나한테는 다른 배우들이 다 교과서라 그렇기도 하고, 누군가를 따라가는 것은 내 감성에 대한 나의 폭력이라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히려 나를 공부해나가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한다.

-롤모델로 삼지 않더라도 어떤 배우의 이미지를 좋아할 수 있지 않나.
=(한참 고민하다) 미키 루크의 젊은 시절을 좋아한다. 뭔가를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앵글이 꽉 찬다. 그러면서도 섬세함과 예민함이 있고. 요즘엔 라이언 고슬링도 좋다. 진짜 고급스럽게 표현하는 것 같다. 과잉이 하나도 없는데, 그렇다고 평범하지도 않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연기하는 과정이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진 않나.
=아니다. 내 자아를 버리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에는 나를 알아가진 못한다. 오히려 촬영이 끝나고 다시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 괴롭다.

-<포화속으로> 때 촬영 끝나고 3주간 칩거했다고 하던데, 이번에는 허탈함이 더 컸겠다.
=5~6개월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다른 걸 할 에너지가 없더라. 사람이 이상해질까봐 억지로 일주일에 한번씩 사람들 만나서 밥먹고 그랬다.

-<포화속으로> 때 “이번 영화에 대한 평가를 받고 나서 연기를 계속할지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인가.
=사람들의 질타를 받을 정도로 못하는 건 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근데 한편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내 안에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저 무대가 놀이터가 되느냐 가시방석이 되느냐는 종이 한장 차이인 걸 잘 아는 만큼 나를 열심히 채찍질했으니까.

-그 가시방석 위에 자청해 앉은 것을 후회할 때는 없나.
=불안할 때. 선배님들은 영화 개봉하니 즐기라고 말씀해주시는데,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 엄청 불안하다. 실패와 성공에 대한 불안이 아닌, 사람들 앞에 내가 몇달 동안 준비해온 것을 한꺼번에 발가벗고 보여주기 바로 직전의 불안이다. 내가 나를 못 믿는 거다. 내가 정말 잘한 걸까.

스타일리스트 지은/헤어 김태현(이가자헤어비스 청담점)/메이크업 임해경/의상협찬 TOMFORD, DRIES VAN NOTEN, RAF SI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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