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원의 피카추]
[김정원의 피카추] 따르릉 따르릉 사랑하세요∼
2013-11-08
글 : 김정원 (자유기고가)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를 보며 연애와 자전거를 생각하다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벚꽃 향기가 진한 봄날이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모두 함께 학교로 올라가려는데, 선배가 내 손을 잡아끌면서 속삭였다. “너는 나하고 자전거 타고 가자.” 쿵! 내 나이 스물한살, 남녀 성비 7.5 대 1의 풍요로운 대지에서 여태껏 불모로 남아 있던 이 황량한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쌀집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선배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밤은 깊었다. 인적 없는 캠퍼스를 따라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선배의 숨결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배가 속삭였다. “정원아.” “… 네.” 나는 수줍게 대답했다. “미안한데, 힘들어서 도저히 안되겠다. 우리 그냥 걸어가자.” 경사가 급하기로 악명 높은 우리 학교의 잘못이었던가, 토실토실하게 술살이 올라 해가 바뀌면서 앞자리도 더불어 바뀌었던 내 몸무게의 잘못이었던가. 어찌됐든 아아, 그렇게 나의 봄은 갔습니다.

엄청나게 잔인하다는 소문에 가슴을 두근거리며(그런 거 좋아한다)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를 보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그렇겠지, 잘되는 사람은 자전거 체인이 고장나도 잘생긴 동네 남학생이 버스에서 내리는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고장이 나겠지, 그렇게 정분이 나는 거겠지, 흥. 한동안 잊고 있던 청춘과 자전거의 기억이 밀려들면서 나는 되뇌었다. <화이…>, 엄청 잔인한데? 기대 이상이야.

<귀를 기울이면>

일본 애니메이션을 구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동시에 어둠의 루트에 밝았던 친구가 영화를 좋아하기만 했던 나에게 <귀를 기울이면>을 빌려주었다. 외모는 동네 깡패로 오해받는 주제에 몹시 로맨틱했던 친구는 비디오테이프를 돌려주는 나에게 설레는 표정으로 소감을 물었다. “나, 울었어.” 친구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이내 급격히 어두워졌다. “새파랗게 어린 것들이 연애하는 얘기잖아.” 로맨틱하기만 했지 로맨스는 없었던 친구도 울고 나도 울었다. 소녀를 태우고 달리는 소년의 자전거가 원망스러웠다. 그쯤 되자 나는 연애와 자전거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첨밀밀>도 자전거, <러브레터>도 자전거. 어렸을 적에 봤던 <겨울나그네>에서 다혜가 자전거 타고 가던 장면도 떠올랐다. 그래, 사랑이란 자전거 사고처럼 오는 것, 사고를 내려면 일단 자전거를 타자. 나는 로맨틱한 친구의 손을 잡고 여의도로 나갔다.

하지만 몰랐던 사실이 밝혀졌으니, 나는 성질은 겁나게 더러운 주제에 겁은 더럽게 많았던 것이다. “앞을 보라고, 앞을!” 고개를 바짝 돌리고 자전거 뒷자리에서 1초도 눈을 떼지 않는 나를 잡아주며 애타게 외치던 친구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결국 친구는 손바닥 껍질이 벗겨지며 피를 봤다. “자전거는 남자친구 생기면 그 사람한테 배워라. …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연애를 하고 싶어 자전거를 배우려 했으나 자전거를 배우려면 연애를 해야만 했던 내 슬픈 청춘의 딜레마였다.

<첨밀밀>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었다. 나는 아직도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폴 뉴먼이 캐서린 로스를 자전거 앞자리에 태우고 가는 장면을 정말 좋아했는데, 누가 태워주기는커녕 나 혼자 타고 갈 일도 없었다.

자전거도 없이 흘러간 청춘이 억울해 남자친구에게 자전거를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그는 질겁했다. 그리고 세뇌하기 시작했다. 세상엔 자전거를 탈 수 없는 신체 구조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극히 드물게 나타나는데, 자전거로 6년을 통학한 내가 판단하기로는 네가 바로 그 희귀한 인종이다! 묘하게 설득력 있는 그 말을 듣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 남자도 한때는 자전거 타는 소년이었겠구나, 하지만 우리는 자전거가 힘들어 자가용 타는 중년으로 만났지. 그러니까 문제는 타이밍이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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