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배두나가 연기한 영화 속 캐릭터들은 발이 땅에 닿아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공기인형>(2009)에서 맡은 노조미는 인형이었고, 할리우드 진출작이었던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의 손미-451은 복제인간이었다. 한국영화 복귀작이었던 <코리아>(2012)의 리분희는 실존 인물이었지만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현실적인 인물에 대한 배두나의 갈증은 커졌다. 차기작으로 <도희야>를 선택한 것도 “그런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정주리 감독의 <도희야>는 경찰대 출신의 여경 영남(배두나)이 어떤 사건을 겪고 지방의 한 바닷가 마을의 파출소 소장으로 좌천되면서 시작된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환경에 부딪히게 된 영남은 그곳에서 여중생 도희(김새론)를 만난다. 의붓아버지(송새벽),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도희는 폭력이 일상인 위험한 삶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영남과 도희, 두 여자는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간다. <도희야>의 마지막 촬영을 하루 앞둔 10월30일, 배두나를 만났다. 영남으로 사는 날이 하루밖에 남지 않은 까닭일까. 25회차라는 빡빡한 촬영 일정을 소화하고 있음에도 스튜디오로 들어오는 배두나의 발걸음은 유독 가벼워 보였다.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있다.
=내일이 마지막 촬영이다. 크랭크인한 뒤 두달이 채 안됐다. 짧고 굵게 몰입해서 그런지 실감이 안 난다. 감정적으로 중요한 신이 남아 있어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있다.
-지난해 고현정의 ‘쪽’(<씨네21> 854호)에 나와 “드라마에서 스케줄을 이유로 로케이션 촬영을 세트 촬영으로 변경하는 것이 답답하다”고 로케이션 촬영 예찬론을 펼친 바 있다. <도희야>는 여수 금오도와 돌산, 순천, 인천, 강화도 등 바다 지역의 로케이션 촬영이 대부분이라고 들었다.
=바다를 원없이 봤다. 당분간 안 보고 싶다. (웃음) 드라마도 드라마 나름이다. 드라마도 야외에서 좋은 그림을 얻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찍으면 안 힘들다. 일정이나 현장 상황을 이유로 세트에서 찍는 건 납득할 수 없다.
-대충 찍는 것을 못 보는 성격인가보다.
=연기하는 게 내 직업이니까 그냥 작품을 하는 건 아니다. 진짜 좋은 그림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좋은 그림을 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편하게 가자고 할 땐 언제나 반대한다.
-이번 영화는 세트 촬영이 거의 없다고.
=강화도, 순천, 여수 돌산을 차례로 찍은 뒤 배를 타고 금오도에 들어간다고 해서 금오도가 뭐가 다른가 싶었다. 농담으로 그랬다. 금오도가 강화도와 다르지 않으면 그냥 배타고 나올 거야, 라고. (웃음)
-강화도와 다르던가. 사진으로 보니 절경도 그런 절경이 없던데.
=너무 다르더라. 대한민국에 그런 곳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확실히 사람 발길이 적게 닿는 곳일수록 아름다운 것 같다. 힘을 내서 촬영을 했다. 스탭들도 되게 고생했고. 고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 뿌듯했다. 세트 촬영이 거의 없어서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웠다. 또 그렇게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메이크업을 하고, 어떤 곳을 돌아다니는가에 많은 영향을 받는 편이다. 그런 점에서 <도희야>는 많은 도움이 된 프로젝트다.
-제작자인 나우필름 이준동 대표는 “시나리오를 본 배두나가 한번에 오케이했다”고 하더라.
=런던에 있을 때 읽었다. 이메일로 온 시나리오를 1시간 반 만에 읽고 곧바로 하겠다고 연락드렸다. 결정하기까지 최단 시간이 걸렸다. 5분.
-종전 기록은 어떤 작품인가.
=<복수는 나의 것>. 반나절 걸렸다. 이건 5분. (웃음)
-전작들과 달리 <도희야>의 영남은 현실적인 캐릭터다. 그게 작품을 선택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나.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찍고 난 뒤 발이 땅에 닿아 있는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코리아>를 선택한 것도 본능적으로 끌린 게 있었는데 실존 인물을 연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이 많이 됐다. 그래서 발이 땅에 닿아 있으면서도 답답했다. <도희야>의 영남을 연기하면 그런 갈증들을 해소할 수 있겠다 싶더라.
-시나리오를 통해 만난 영남은 어떤 여자인가.
=미성숙하지만 성장하는 여자. 그런 캐릭터를 좋아한다. <플란다스의 개>(2000)나 <고양이를 부탁해>(2001)에서 연기한 캐릭터들도 성장하는 역할이었다. 영남은 좀 답답하고 어떤 결단을 하기 어려운 캐릭터이기도 하다. 현실을 도피하는 겁쟁이 같은 면모도 있다. 그동안 연기했던 캐릭터 중 이렇게 답답한 여자는 처음이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이었다.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가진 힘이 좋았다.
-시나리오가 어땠나.
=평범한데 또 비범하고, 잔잔한 것 같은데 또 날카로운 것 같아서 너무 좋았다. 캐릭터만 보고 작품을 선택하는 나이는 이제 지난 것 같다. 그건 20대 때 욕심이고. 요즘은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보게 되고, 내가 합류했을 때 이야기가 더 풍부해질 수 있는 작품을 보게 되는 것 같다.
-영화 속 영남은 어떤 사건을 겪고 어쩔 수 없이 지방의 바닷가 마을로 내려가는 경찰이다. 영남의 마음이었다면 촬영하러 바다로 가는 길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슛 들어가기 전까지는 배두나와 영남의 마음이 반반이었던 것 같다. 엄청난 메소드 액터가 아닌 까닭에 곧바로 캐릭터에 몰두하진 않는다. 촬영하러 바다로 내려가는 길에 영남의 기분이 들긴 했다.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기도 하고, 새로운 환경을 만날 생각에 신기하기도 하고. 시나리오를 본 배두나는 영남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지만 영남은 아무 정보 없이 내려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에서 떨리기도 했고.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촬영 중 언제 영남의 마음이 이해가 되던가.
=첫 촬영 들어가기 전날, 감독님이 방에 놀러오셨다. 첫 로케이션인 까닭에 준비가 됐는지 상의하는 시간을 함께 가졌다.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 빵 터졌지. 그때 느낀 건 복잡한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찍어야겠다는 것이었다. 관객이 영남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나를 보고 감정적으로 힘들어할 수 있으니까. 초반에 그렇게 누르고 또 누르고 임하다가 도희의 등을 처음 봤을 때 도저히 숨길 수 없는 감정이 확 올라오더라. 그때부터 걷잡을 수 없이 내가 영남 속으로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
-여성 감독과의 작업은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감독 이후 오랜만이다. 정주리 감독은 어땠나.
=어떻게 보면 정재은 감독님을 떠올리게 하는 감독님. 음… 뭐랄까. 그 사람은 이 영화 같은 사람이다. 촬영장에서 큰소리 한번 낸 적 없을 만큼 부드럽지만 날카로움을 가진 사람. 친구 같아서 좋았다. 마음도 잘 통하고. 내 연기에 믿음도 가지고 계신 것 같고. 여성 감독이라고 다를 건 없다. 그런 편견도 없고. 그건 개개인의 문제지.
-현재 매니저가 없다고 들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매니지먼트사와 일할 때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매니저가 없는 지금은 정신적으로 자유로워서 날아갈 것만 같다. 물론 몸은 힘들다. 촬영이 끝나고 새벽에 들어가고, 새벽부터 일어나 촬영장에 가야 하고. 하지만 영화 작업에 들어가면 혼자서 스케줄 관리를 할 수 있다. 연출부가 매일 스케줄을 알려주니까 매니저가 필요없다. 중간에 광고를 하게 되면 큰일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도와주는 분도 있어 ‘매니저의 케어’는 필요없는 것 같다. 그게 편하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하고 싶은 건 무엇인가.
=친구들 만나는 것? (양손을 들어보이며) 매니큐어? 시골에서 지내다보니 그런 혜택을…. 커피숍도 가고 싶고, 와인도 마시고 싶고, 잠도 자고 싶다. 이렇게 체력이 달릴지 몰랐다. 속상해. 나 이렇게 늙었나봐. (웃음)
<도희야>의 두 주인공, 배두나와 김새론
배두나와 함께 <도희야>를 이끌어가는 배우는 김새론이다. 배두나는 영화 속에서 도희(김새론)와의 첫 만남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해일이 막 지나간 상황에서 도희라는 소녀를 처음 만나게 되는데, 새롭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았다. 비가 내린 뒤 무지개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하던(위) 영남과 도희는 방학을 맞아 함께 지내면서 조금씩 가까워진다(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