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래비티>의 초반에 이상한 장면이 등장한다. 탐사선의 우주허블망원경을 수리하던 여성 우주비행사 라이언 스톤(샌드라 불럭)은 위성 파편들의 습격으로 우주 공간에 내동댕이 쳐진다. 지지할 곳도 탐사선과의 연결선도 모두 잃어버린 그녀의 몸은 텅 빈 우주 공간에서 빙글빙글 돌며 어둠이 깃든 지구 반대편 상공으로 빨려들어간다. 동료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와의 통신도 이제 끊겼다. 이곳은 지구의 600km 상공, 중력도 소리를 전달할 매개체도 없고 영하 100도를 넘나드는, 생명이 살 수 없는 공간이다. 그녀는 죽음의 문턱에 있다.
카메라는 라이언의 주변을 돌며, 방향도 속도도 짐작할 수 없이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그녀의 육체와 함께 조난의 움직임을 체화한다. 그러다 한순간, 라이언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카메라는 그녀의 헬멧에 점점 가까워지더니 헬멧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눈이 된다. 이제 스크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속절없이 유영하는 그녀의 육체가 아니라 그녀의 눈이 보는 것이다. 비인칭적인 카메라의 시점과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이 한몸으로 이어진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보고 잠깐 동안 멍해졌다. 물론 클로즈업과 줌인 그리고 시점숏은 수없이 봐온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편집 없이 한 테이크로 이어진 카메라워크를 본 기억은 없다. 클로즈업과 시점숏이 편집으로 연결될 때, 우리의 지각적 관습은 재빨리 카메라의 시점에서 인물의 시점으로 이동할 수 있다. 그런데 클로즈업과 줌인과 시점숏이 한 테이크로 이어진 이 장면은 보는 이에게 시점 이동의 이면에 그녀의 헬멧을 관통한 카메라의 행위를 은밀한 잔상으로 남긴다.
물론 <시민 케인>에서 오슨 웰스의 카메라가 케인의 저택 문을 관통한 이래, 유리창 밖의 카메라가 컷 없이 유리창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 정도는 드물지 않게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건 단순한 기술적 유희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후로도 라이언의 헬멧 안 시점숏은 두어 번 더 등장하지만, 모두 컷으로 이어져 있다. 그럼에도 초반의 이 카메라워크가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그 순간의 카메라가 은밀한 외설성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잘 정리되지 않는 이 느낌은 뒤에 다시 말하려 한다.
2.
SF작가 배영훈은 지난호 <씨네21>에 기고한 글 ‘상상이 아닌 진짜의 세계’에서 <그래비티>는 “리얼한 SF가 아니라 그냥 리얼한 영화”라고 말했다.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는 현행 과학기술을 넘어서는 상상력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채택하지 않았다. 이 영화의 사건은 지금 바로 상공 600km 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씨네21> 편집자로부터 인상적인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한국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이소연 씨에게 이 영화에 대한 평을 부탁했을 때, 그녀는 “<그래비티>가 내가 본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무서운 영화였다.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객관적인 무언가를 말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실제 우주비행 경험이 있는 그녀에게 이 영화가 탈진할 정도로 무서웠다면 상황의 개연성뿐만 아니라 표현의 현장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그래비티>는 거의 실시간 영화다. 러닝타임은 90분이지만, 허블망원경 수리 장면에서 시작해 지구 귀환으로 끝나는 영화 내적 시간도 3시간 안팎에 불과하다. 카메라는 여주인공의 시점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이 영화를 아이맥스 3D로 본 관객이라면 시종 죽음의 공포를 겪는 여주인공과 유사한 지각의 장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요소들이 <그래비티>의 ‘리얼’을 강화한다.
사실 이 영화는 SF영화에 대한 우리의 예상과 기대를 효과적으로 거역함으로써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외계인도, 우주전쟁도 없다’는 홍보문구는 그 거역의 대중적 호소력을 자신하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SF의 미니멀리즘을 과시하는 듯한 <그래비티>를 다소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거역의 서사적 기획과 시각적 기획이 어긋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자체는 장점도 단점도 아닌 이 어긋남의 방식을 살피는 것이 <그래비티>라는 영화가 놓인 자리를 말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거역의 서사적 기획은 선명하다. 기존 SF영화들이 수많은 행성 중 하나로 사소화하거나 황폐화한, 때론 폭파되어 사라진 지구의 복권이다. 아마도 우리는 암울한 SF영화에 지쳤을 것이다. 올해 개봉한 <엘리시움> <월드워Z> <애프터 어스>만 놓고 봐도 SF영화에서 디스토피아적 비전은 장르적 관습에 가깝다. 중력으로의 회귀라는 <그래비티>의 소박한 서사는 디스토피아적 SF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라면, 혹은 해체, 숭고, 탈주, 유목과 같은 유행이 된 인문학언어에 지친 동시대인들에게라면, 소란스런 대도시를 떠돌다 문득 평온한 전원 마을에 이른 것과 같은 아늑한 느낌에 젖게 할지 모른다.
늙은 에스키모의 음성, 개 짖는 소리, 그리고 아이의 울음소리…. 연료가 바닥난 우주선 안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여인의 귀에 들려오는 지구의 음성은 아름답다. 그녀는 우주의 침묵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이제 지구의 작별인사와도 같은 그 보잘것없는 소리들에 눈물을 참지 못한다. 그녀는 아이를 잃고 운전만 했다고 했다. 아이는 어이없게도 계단에서 미끄러져 죽었다. 그녀에게 지상의 시간, 지구의 중력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끝없는 운전은 아이의 머리를 바닥으로 끌어당긴 지구의 중력에 대한 소극적 저항이었을 것이다. 우주비행사가 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지구의 중력을 그리워한다.
여기서 지구의 복권이라는 기획은 그녀의 개인적 애도의 기획과 정확히 겹친다. 이제 지구 복귀의 마지막 시도를 하면서, 라이언은 자신을 살리고 죽은 맷을 떠올리며 “내 딸을 만나거든 반갑게 안아달라”고 씩씩하게 독백한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죽음을 기다릴 때 죽은 딸을 떠올리지 않았고, “너를 곧 볼 수 있겠구나”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실낱같은 생존의 가능성을 가까스로 찾았을 때 그녀는 딸을 비로소 떠나보냈고 애도는 완수된다.
이 대목이야말로 정말 리얼하다. 애도는 상실한 대상을 일정한 방식으로 상징화시켜 일상적 삶으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복잡한 정신분석 논의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상징화가 파토스의 중핵을 제거하거나 억압하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나아가, 애도는 자기기만을 동반하지 않으면 완수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애도의 기획이 삶으로의 복귀를 결심했을 때 완수된다는 사실을 지구 귀환의 버튼을 누른 라이언만큼 잘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제거되거나 억압된 것은 무엇일까. 물론 개인적 애도의 기획에서는 죽은 딸을 향한 병적인 집착일 것이다. 지구의 복권이라는 기획에서는 다름 아닌 우주다. 두 주인공이 사랑한 침묵 혹은 아름다움의 우주, 그리고 뒤이은 절대 고독과 공포. 거역의 시각적 기획은 이것이다. 많은 SF영화들에서 우주는 시공간적 장벽이거나 기껏해야 이국적 풍경의 확장판이었다. <그래비티>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동시에 이소연씨를 공포에 떨게 한 것은, 아름답고 무서운, 그저 아득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우주의 공간 감각을 고스란히 전이시키는 이 영화의 시(청)각적 기획이다. 이건 소재나 대상으로 전락한 우주의 복권이라고 부를 만한 사태다. 기묘한 일이다. <그래비티>는 시각적으로는 우주를 복권시킨 다음, 서사에선 우주를 제거하고 지구를 복권시킨다. 여주인공의 사적애도의 기획이 이 어긋난 결합을 봉합한다.
이 교묘한 봉합을 영리하다고 말할 순 있겠지만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망설여진다. 여기서 <그래비티>를 만든 알폰소 쿠아론 감독에게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두편의 SF 영화를 언급하고 싶다. <그래비티>가 우주를 ‘복권’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두 영화가 그것을 선취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모두가 칭송하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감독 스탠리 큐브릭, 1968)이다. 이 영화의 위대성은 장황한 형이상학이나 45년 전 영화라고 믿기 힘든 장대한 스케일과 경이로운 세공술의 프로덕션 디자인에 있는 게 아니라(물론 그것도 훌륭하지만), 무중력 공간에서 완전히 새로운 영화적 리듬을 창안했다는 데 있다. 저 유명한 360도 조깅뿐만 아니라,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배경음악으로 디스커버리호의 둔중한 우주 운행을 어떤 카메라 기교도 없이 담아낸, 거만하게까지 느껴지는 롱테이크 장면은 이전의 어떤 영화에서도 체험하지 못한 장엄한 시청각적 충격을 선사했다.
다른 하나는 명백히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영향을 받은, 그리고 개봉 당시 극소수의 지지를 얻었지만 이후론 부당하게 잊혀져가는 <미션 투 마스>(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 2000)다. 인용과 짜깁기의 대가 브라이언 드 팔마는 숨막힐 듯 아름다운 그리고 21세기 SF의 가장 창의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를 빚어낸다. 그것은 우주비행사 팀 로빈스 부부가 무중력의 우주선 내부에서 춤추는 장면이다. 중력이 지배하는 지상에선 불가능한 부드러움과 우아함과 자유로움의 몸짓. 이 장면의 아름다움이 뼈저린 이유는 뒤이은 장면에서 조난당해 우주선 사이를 이동하던 팀 로빈스가 아내와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줄을 놓고 우주의 어둠 속으로 고요히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무중력의 공간 감각이 주요 모티브라는 점에서 <그래비티>를 두 걸작 SF의 뒤를 잇는 순수 SF라고 부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그래비티>는 두 영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미션 투 마스>는 우주의 초월성을 시청각적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주인공의 사적 서사로 회수하지 않는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는 아예 사적 서사가 전무하며, 우주 공간과 400만년이라는 인류사의 전 시간이 일체화하는 4차원의 세계로 이행한다. <미션 투 마스>에서 게리 시니즈는 화성에 남아 우주 그 자체와 합일하려 한다. 그도 아내를 잃고 애도에 실패한 우울증자이지만 <그래비티>의 라이언과 반대로 죽음/기원/초월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진입한다.
미치광이의 집착을 지닌 창작자의 산물인 두 영화는 예외적이라기보다 미국영화의 존중받을 만한 전통에서 멀지 않다. 미국영화의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는 서사로 정돈되지 않는 리비도를 풍경이 끌어안으며, 서사적 기획과 긴장하는 시각적 기획의 전통에 있다. 위대한 미국영화들에 빈번히 등장하는 불모의 황야, 성난 바다, 끝없는 사막, 위압적인 산악과 밀림, 아득한 설원은 인간 중심적 서사의 재강화를 위한 경유지이거나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를 품고 있는 큰 형식이다. 이를 미국영화의 지리학적 전통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서부극의 전통이 그것을 완성했고, 소수의 걸작 SF들도 그것을 이어받았다.
<그래비티>는 반대의 길을 택한다. 우주의 초월성은 특별한 유형의 위협이 잠복한 가혹한 환경의 하나로 대체되고, 주인공의 사적 서사의 대상으로 정돈된다. 걸출한 시각적 기획에도 불구하고, 소재가 된 과학기술의 현실성 여부와 상관없이, 이 영화를 걸작 SF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도 이것이다. <그래비티>는 차라리 훌륭한 액션영화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비티>의 시각적 기획을 이렇게만 말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서두에서 말한 카메라의 외설성 때문이다. 그 장면 이후로 이 영화의 이미지들은 불분명하게나마 성적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사적이고 주관적인 반응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또한 남성 관객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맺음말 삼아 이 영화가 성 불능자(혹은 불감자)가 성행위에 성공하는 과정이라는 가설을 짧게 말하려 한다.
<그래비티>의 주된 운동 이미지는 막의 관통이다. 위성의 잔해들은 탐사선의 벽을 관통하고, 우주비행사의 헬멧을 관통한다. 주인공이 살기 위해선 중력이라는 막을 관통해야 한다. 남근적 발상이라 해도 이 운동 이미지는 어쩔 수 없이 성적이다. 물론 최초는 카메라가 라이언의 헬멧을 에로틱하게 관통한 것이다. <그래비티>의 카메라는 서사 밖의 안정된 내레이터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이 공간의 일부를 점유하는 하나의 육체를 겸한다. 종종 이 무중력 공간을 부유하는 인물들과 같은 속도와 동선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다 최초의 관통에서 카메라 관음의 시선에 그치지 않고 욕망의 육체가 되어, 인물을 건드린다. 100kg에 달하는 우주복이라는 막으로 몸을 감싸야 생존하는 무생명, 무성(無性)의 공간에서, 이 순간 유일하게 활성화한 성적 주체는 끝없이 수다를 늘어놓은 남성 동료가 아니라 이 카메라다.
최초의 관통 이래 의미상으로는 무관하거나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이 일종의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라이언이 피신해온 무성의 공간에 위험한 리비도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우주선 소유즈가 중력의 막을 뚫는 통제된 성기라면 위성의 잔해들은 통제 불능의 난폭한 성기다. 잔해가 헬멧을 관통해 죽은 동료 비행사의 얼굴 구멍 뒤로 우주가 보이는 장면을 무섭다고만 말하는 건 솔직하지 않다. 이것은 과도한 관통이 빚은 끔찍한 형상이지만 그렇다고 관음의 쾌락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관음증이 성욕과 파괴욕을 종종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대중영화 제작자들은 관객이 비명을 지르면서도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귀환용 우주선 소유즈에 도착한 라이언이 우주복을 벗자 속옷만 입은 그녀의, 건장하고 매끈한 그리고 어딘지 중성적인 몸이 드러난다. 중력이라는 최후의 막을 뚫는 주체에게 중성적 이미지는 오히려 기묘하게 어울린다. 대기권에 진입한 라이언의 몸은 격렬하게 요동하며 신음이 터져나온다. 이 대사와 몸짓과 신음은 그녀의 귀환을 한바탕의 정사처럼 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그녀는 마침내 무성의 존재에서 성적 존재로 귀환한 것이다.
나는 <그래비티>의 또 다른 자질이 은밀한 에로스라고 생각한다. 할리우드가 대중영화의 이미지를 빚어내는 능력은 스케일과 강도에만 있지 않고, 이미지의 관능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에도 있다. <그래비티>는 그 능력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