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근처에 나온 건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인터뷰 장소에 들어온 김유미는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카페 벽에 걸려 있는 액자 속 그림을 살펴보기도 하고, ‘셀카’를 찍어 자신의 SNS에 올리기도 했다. 오랜만의 외출만이 그녀의 마음을 들뜨게 한 건 아니다. 출연작 <붉은 가족>과 <블랙 가스펠>이 11월6일과 14일, 한주 간격으로 연달아 개봉했다는 사실도 그녀를 자극했을 것이다. 두 작품은 김유미가 <리턴>(2007) 이후 6년 만에 출연한 영화다. “기분이 어떻냐고요? 씨앗을 뿌렸다가 한꺼번에 추수하는 기분? 여배우들이 작품이 없어 많이 힘들어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참여한 영화 두 편이 동시에 개봉하는 건 행운인 것 같아요.”
딱딱한 여자. <붉은 가족>에서 김유미가 연기한 백승혜는 위장 가족 간첩 ‘진달래’의 조장이다. 시아버지 조명식(손병호), 남편 김재홍(정우), 딸 오민지(박소영) 등 가짜 가족을 통솔해 북에서 내려오는 지령을 수행하는 게 그녀의 임무다. 사람을 감시하거나 죽이는 일을 주로 하는 탓에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내놓지 않는 강인한 여자이기도 하다. 김유미는 “동시에 나약한 여자”라고 덧붙인다. “북한의 이념과 사상이 이 여자의 전부였는데 그 믿음이 남한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무너지잖아요. 강인함과 나약함, 양면성을 보여줄 수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였어요.”
가깝게는 <간첩>(2012)부터 멀리는 <이중간첩>(2002)까지 한국영화에서 여간첩이 등장한 적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쉽게 만나기 어려운 캐릭터이기에 백승혜는 배우로서 충분히 욕심을 내볼 만했다. 하지만 김유미는 영화 제작자이기도 한 김기덕 감독의 출연 제안을 처음에는 고사했다고 한다. “시나리오가 굉장히 두꺼웠는데 읽어보니 쉽지 않겠더라고요. 기존 작품 중 참고할 만한 모델도 없었고, 북한 사투리도 어려웠어요. 새로운 길을 가야 하는 캐릭터라 자신이 없었고, 불안했어요.” 데뷔 14년차 여배우의 이 고백이 선뜻 이해되는가. “원래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을 힘들어해요. 정말 잘할 수 있을까? 관객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해요. ‘그래, 할 수 있어. 가자’고 마음먹으면 그때부터는 앞만 보고 가요.”
장애물 없는 길은 없다. 크랭크인이라는 출발선에 서기 전에 그녀는 필요한 준비물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북한 사투리가 입에 붙어야 하는 게 무엇보다 시급했다. “북한 뉴스나 관련 영상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대화를 보면서 억양과 뉘앙스를 연습했어요. 촬영하기 전까지 항상 북한 사투리로 말했어요.” 시나리오에 드러나지 않은 백승혜의 과거를 채워넣는 것도 그의 과제였다. 북한에서 특수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남편과 왜 헤어졌으며, 어떤 경로로 한국에 들어오게 됐는지 등 백승혜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김기덕, 이주형 감독과 함께 나눴다. 가중되는 불안이야말로 꼼꼼한 준비의 바탕이었고, 그렇게 빚어진 백승혜라는 인물의 뼈대는 촬영 기간 동안 김유미의 든든한 길잡이가 되었다.
12회차라는 빡빡한 일정 탓에 촬영이 끝날 때까지 풀지 못한 수수께끼도 있었다고 한다. “부담감이 많을수록 욕심을 버리고 나를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보였”단다. 촬영이 끝난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는 게 김유미의 고백이다. “촬영할 때는 그냥 지나치다가 늘 촬영이 끝났을 때 뭐가 아쉽고 잘못됐는지 알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항상 안타까워요. 그것도 욕심이긴 하지만 말이죠.” 어쨌거나 김유미는 <붉은 가족>의 백승혜를 통해 연기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백승혜로부터 받은 기운으로 올여름 방영됐던 JTBC 드라마 <무정도시>의 팜므파탈 진숙을 선택할 수 있었”다(<붉은 가족>이 <무정도시>보다 먼저 촬영했지만 <무정도시>가 먼저 방영됐다.-편집자).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는 아니었지만, <무정도시>의 술집 마담 진숙은 그간 배우 김유미 하면 심드렁했던 시청자의 고개를 고정시킨 역할이었다. 몸매를 과감하게 드러내는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보석을 온몸에 치장하고, 붉은 립스틱을 바른 치명적인 입술 같은 그의 외양 때문만은 아니었다. 말 한마디로 거친 남자들을 움직이는 카리스마는 김유미 속에 있던 ‘끼’를 꿈틀거리게 했다. “밑바닥에서 마담까지 올라온 끈질긴 생명력.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남자들을 거느리는 힘. 정치에 능하면서도 순애보적인 사랑을 꿈꾸는 마음. 그런 면모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이제는 내 속에 숨겨진 욕망과 어떤 섹시함을 보여줄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진숙을 만난 거죠.”
솔직하게 말해서 <무정도시>에 출연하기 전 김유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심심했던 게 사실이다. <폰>(2002), <인형사>(2004) 같은 호러영화나 <리턴> 같은 스릴러영화에서 비명을 지르는 여주인공이나 <로망스>(2002), <종려나무숲>(2005) 같은 멜로 드라마의 청순한 여성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온 그가 아닌가. 그렇다고 영화를 하지 않는 시간 동안 드라마를 열심히 찍었던 것도 아니다. 영화든 드라마든 작품을 하지 않았던 해도 있었다. 김유미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게 참… 지금도 그래요. 가슴이 설레면서 작품을 하고 싶어요. 어떤 배우들은 어떤 작품이든 빨리 선택해서 경력을 이어가려고 하잖아요. 반면 저는 한 작품을 하더라도 가슴 설레면서 하고 싶어요. 최근에 연기한 <무정도시>의 진숙이나 <붉은 가족>의 백승혜가 그랬어요. 그동안 고사한 작품 중 흥행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잘된 작품도 있었지만 후회는 없어요. 앞으로도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작품을 선택하고 싶어요.”
천천히 가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자신이 하고 싶은 역할이 오기를 기다리겠다는 뜻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연이 있는 것처럼 작품과 배우 사이에도 인연이 있다고 굳게 믿는 그도 이제는 30대가 되었다. “20대 때 연기했던 작품을 아주 가끔 봐요. 안다고 한 연기인데 하나도 모르고 했더라고요. 40대가 돼서 30대 때 했던 작품을 보면 비슷한 느낌을 받을 것 같아요. 스스로 만족하는 연기를 하려면 지금보다 나를 더 열어야겠구나. 무언가를 더 많이 채워넣어야겠구나 싶어요. 조급함이요? 없어요. 다양한 경험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 연기를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붉은 가족>으로 6년 만에 영화계에 외출한 그의 말은 앞으로도 <붉은 가족>이나 <무정도시>같은 특별한 인연을 만나고 싶다는 얘기로 들렸다.
magic hour
“너도 떠날 수 있을까”
“드라마 <무정도시>는 연기 인생 중 가장 특별한 작품이에요. 촬영이 끝난 뒤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겁게 촬영했어요. 유성열 작가님께서 대사를 입에 딱딱 붙게 써주셔서 연기를 하면서도 카타르시스를 느꼈고요. 자리에 앉을 때도 진숙의 자세가 그냥 나왔어요. 손에 꼽기 힘들 정도로 기억에 남는 장면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애착 가는 장면이 있어요. 진숙이 시현(정경호)에게 주먹 세계에서 떠나라고 말하는 장면이에요. ‘나는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너(시현)도 떠날 수 있을까. 네가 떠난다면 지금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많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이 장면을 찍을 때 (정)경호도, 나도 마음이 굉장히 아팠어요. 드라마 초반부에 있는 장면인데, 이 신 덕분에 이야기를 수월하게 끌고 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