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x&talk]
[신성일] 꽃보다 할배? 말로만 그러지 말고
2013-11-27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최성열
<야관문: 욕망의 꽃> 배우 신성일

말기 암에 걸린 노인과 그를 간병하는 젊은 여인 사이에 피어나는 욕망에 관한 영화 <야관문: 욕망의 꽃>의 주연을 맡은 신성일 선생과의 인터뷰가 있던 날이다. 선생께서 골목길을 지나 카페에 들어선 순간, 사진기자의 표정이 굳어진다. 영락없이 운동복 차림이다. 일정을 착각했다는 말씀과 동시에 장소를 당신 집으로 옮기자고 한다. “그게 사진 찍기도, 말하기도 편하겠다”며. “우리 집으로 가자. 머리에 물이라도 묻혀야 사진을 찍지, 안 그래?” 1시간 뒤쯤, 공덕동 어느 아파트. 책이 가득한 책장, 조각상, 각종 트로피가 벽에 둘러져 있다. 탁자 위에는 서양 고전음악 해설서와 피카소 전시회 자료집과 영화 사설이 스크랩되어 있는 신문 뭉치들, 먹다 남은 음식 부스러기 몇개가 널려 있다. 그리고 저 멀리 운동기구. 텔레비전 아래에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랜 토리노> <이만희 컬렉션> <로마의 휴일> DVD가 뒤섞여 있다. 그렇게 집 안 구경을 하다 어느새 인터뷰가 시작됐다.

-장소를 옮기길 잘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옷도 편하게 갈아입고 좋잖아. 내가 집이 세 군데거든. 대구, 영천, 서울. 요즘은 서울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서 여기 있지요.

-손님들도 많이 오시나요.
=최근에 방송 촬영팀이 좀 왔고. 그리고 자네 몰래, 애인 왔다 갔고. (웃음)

-책이 많네요.
=(의상을 갈아입는 동안 기자가 DVD 몇개를 만지작거린 걸 보셨나보다) 내 지금 인생에서 한 5년이나 10년 정도 봤을 때 바로 모델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야. 그 사람의 활동을 보면 지금도 굉장히 액티브하잖아.

-최근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평전이 나왔는데 읽어보셨는지요.
=그럼 당연하지. 완전히 플레이보이지. 마누라도 다 인정하는. 그런데 그게 할리우드 분위기야. 우리나라하고는 좀 다르지. 나는 애인 있다고 말 한번 했다가 광고 다 떨어지고, 나쁜 놈 됐잖아. (웃음) 그런 걸 말 안 하는 연놈들이 더 캄캄한 것들이야. 다 쏟아내버려야지, 그래야 정직해지지, 마음속에 감추고 거짓말하다 보면 거짓말한 걸 기억을 못한다고. 내 평생 신조가 거짓말하지 말자예요. 있는 대로 쏟아내면 된다고. 영화를 506편이나 하면서 젊은 여인하고 그렇게 많이 연기한 놈이 애인 없었다고 해봐, 그게 거짓말이지. 내가 애인 있다고 말해서 죽일 놈 소리 듣지만, 또 없었다고 그래봐, 저놈 내숭 떤다 그러지.

-어제도 인터넷에 도배가 되어 있던데요, ‘꽃보다 할배’들하고 여행 가는 것보다 배슬기(<야관문: 욕망의 꽃>의 여주인공)하고 가는 것이 더 좋다고 말씀하셔서. (웃음)
=그래? 그럼 그럼! 나는 인터넷을 안 해서 잘 몰라요. 골프 친구들도 다 나보다 10년 정도 아래야. 내가 할배들하고 뭐하러 움직여? 차 타고 내릴 때 손 잡아주고 부축해줄 일 있어? 앤서니 퀸도 죽을 때 스물몇살짜리 젊은 여인하고 살았어. (피카소 책을 집어들며) 피카소도 그랬다고. 이런 정력을 가져야지.

-인터넷은 안 하셔도 신문 스크랩은 하고 계시네요.
=신문은 계속 집히는 대로 읽어요. 주로 사설하고 오피니언난을 많이 봐요. (국회의원 시절, 영화 <친구>에 대해 국회의원으로서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했다가 인터넷상에서 호된 악플을 경험했던 일화를 들려준 뒤에) 인터넷이란 공간에 들어가면 그거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끊어버린 거야. 마음 편하게 살아야지. 칭찬 받으면 기분 좋지만, 오래는 안 가요. 그런데 인격적으로 당하면 쉽게 잊지 못하지. 노 대통령도, 최진실도 다 그렇게 된 거잖아. 신성일이 잘되는 거 배 아프지. 마누라가 엄앵란인 것도 배 아프고. 나는 평생 그렇게 남자들의 적으로 살아왔잖아요.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텔레비전 보는 것도 별로 즐기시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믿지 않는 매체인 텔레비전에 나오셔서 그런 중요한 말들을 하시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던데요. (웃음)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하는 거지, 대응은 안 해. 나는 스포츠도 심판에 의해서 좌우되는 건 안 좋아해요. 축구, 배구, 결정적으로 야구. 9회말 투 아웃 풀 베이스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에 심판이 잘못해버리면 승패가 갈린다고. 그런 거 보는 게 가슴이 아파. (기자를 보며) 심판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경기가 뭐가 있겠소?

-음… 골… 프요?
=그렇지, 골프밖에 없지. 그건 본인이 하는 대로 하는 거야.

-말씀하시니까 생각났는데요, 수감 중이실 때(국회의원 재직 당시 뇌물을 받은 혐의로 신성일 선생은 2006년 즈음부터 2년여의 옥살이를 한 적이 있다), 벽에 힝기스, 미셸 위, 이신바예바 등의 사진을 붙여놓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배우가 아니라 전부 스포츠인들이었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게 참 오해가 없어야 하는 건데… 교도소 안에 있는 친구들이 자기들이 봐도 나이는 내가 더 많은데 몸이 더 단단하거든. 그러니까 나한테 인사도 잘하고 선물도 주고 싶어 하고 그랬어. 그런데 선물이란 게 뭐가 있겠소. 여체, 여자의 누드 사진, 음화거든. 선생님 보여드릴까요, 그러더라고. 그런데 교도소에 감찰이 있을 때면 꼭 내 방을 보여준다고. 그런데 그런 게 내 방에 있으면 되겠어? 물론 보고 싶었지, 하지만 음화를 가져다놓을 수는 없잖아. 그런데 그때가 세계육상경기를 하던 때라고. 스포츠 사진기자들이 사진 잘 찍잖아. 이신바예바가 다리 딱 벌리고 뛰어넘는 거, 그런 사진을 화장실에 붙여놓았다는 그 얘기야. 물론 나도 다른 그림을 붙여놓고 싶었지만…. (웃음)

-영화 얘기도 좀 해볼까요? 주연은 오랜만이십니다.
=딱 20년 만이에요.

-아무래도 이 영화에 출연하게 되신 계기는 그간에 방송에서 하신 발언이나 두권의 책 안에 있는 내용들하고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신성일 선생은 인터뷰집 한권과 자서전 한권을 출간했고 그 안에는 과거 연인과의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방송에 출연해서는 아내와 애인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한 발언들과 연관 있는지 없는지를 내가 말하기는 어렵지. 그때 시나리오가 한 여섯개쯤 들어와 있었어요. 어떤 힘 떨어진 유공자 노인네가 연금받고 사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는 자기도 과거의 공을 찾아다니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어요. 요양소에서 병마에 시달리는 작품도 있었고. 그런데 요양소에서 그러는 거는 싫더라고. 가장 마음에 든 시나리오가 있었는데, <그랜 파더>라는 거였어요. 강직한 성격을 지녔으면서도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는 베트남 파병 용사가 시골의 버스 운전사인 거야. 그런데 아들이 원인 불분명한 상태로 죽은 걸 계기로 조직폭력배를 소탕하는 이야기예요. 제일 나중에 들어온 게 <야관문: 욕망의 꽃>이에요. 나는 사실 그때 <그랜 파더>를 하려고 몸을 만들고 있었다고. 그런데 이 작품이 제작에 빨리 안 들어가는 거야. 그런데 이 영화는 바로 촬영에 들어가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바로 출연을 결정하셨나요.
=아니. 그러다가 올해 3월인가 골프를 치러 나갔어요. 아침에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안 온다고 했는데 나가봤더니 오전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라고. 우리 나이에 감기 오면 크게 애먹어요. 그래서 어쩔까 고민을 했지. 그런데 골프 약속이라는 게 또 어길 수가 없는 거거든. 비를 좀 맞았는데 그게 안 좋아졌어. 그 다음 날 다른 모임에도 가고 하느라 심해졌고. 감기가 엄청나게 왔어요. 3월 늦추위에 끙끙 앓다가, 딱 그때 생각이 난 거예요. 이렇게 아예 운동도 못하게 됐으니까 이참에 근육을 빼서 <야관문: 욕망의 꽃>에 출연해야겠다, 그냥 앓는 대로 앓자, 이렇게 된 거지. 영화 봐서 알겠지만 그거 근육이 다 빠져 있는 거예요. 보름인가 앓고 감기가 완전히 떨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갔거든.

-주연 맡으신 작품이 506편에서 507편이 되는 셈인데요, 이 작품은 어디쯤 위치한다고 생각하시나요.
=A, B, C로 나눈다고 하면, 최정상에 있는 작품은 <만추>예요. 그리고 상영금지당했던 <휴일>. 그건 비교가 안되지 뭐. 이번 영화도 A급이지. 저예산이라서 좀 위축되는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영화 그 정도면 잘 나왔지 뭐.

-다작을 많이 하셨는데요, 요새 배우들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부럽지, 너무너무 부러워. 그렇게 해서 연기 못하면 바보들인 거지. 제일 부러운 게 바로 그거예요.

-지금 왕성하게 작업하는 어느 배우, 어느 감독하고 함께 일하고 싶으세요.
=아니, 그건 말 안 하는 게 좋겠어요. 문화 예술계쪽에서는 그런 건 금기라고. 피카소하고 다른 화가 그림하고 비교하면 안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면 좀 다른 걸 여쭤보겠습니다. 같이 작업한 사람들 중에서는 누가 가장 많이 생각나시나요.
=물론 이만희 감독이지. 그건 말할 수가 없어요. 유신독재정권 시대에 그래도 조금이라도 반발을 하고 거부를 하고 했던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휴일> 봤어요? 그 바쁜 가운데 어떻게 그런 걸 찍었는지. 그게 놀라운 거라고. 그 영화는 이만희 감독의 생각을 신성일이를 분신 삼아서 그려낸 영화라고. 결국엔 고치라고 그래도 고치질 않았잖아요. 서슬이 퍼런 그때에 말이에요. 이만희 감독하고 나하고는 너무 잘 맞았거든. 내가 이만희 감독 영화에 출연도 많이 했어요. <들국화는 피었는데> 찍을 때는 제작자 정진우하고 이만희 감독하고 생각이 달랐어요. 정진우는 반공, 이만희는 반전을 기본으로 했거든. 둘 사이에서 내가 중재도 하고 그랬다고. <삼포 가는 길>도 사실은 나하고 같이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스케줄이 안 맞아서 못하게 됐지. 그래서 나 대신 김진규씨가 했어요. <삼포 가는 길> 찍을 때 몸이 확 안 좋아졌나봐. 저녁마다 술파티였다고 그러더라고. 김진규씨도 그렇고, 백일섭이도 그렇고 두주불사거든. 나하고 있을 때는 내가 술 못 먹게 했어요.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강원도 인제에서 찍었는데 그때 내가 돈이 좀 있었으니까 아침저녁으로 불고기 사먹이고 뱀탕 사먹이고 했어요. 그 형이 짱구였거든, 그래서 나는 짱구 형이라고 불렀고, 그 형은 일본식으로 나한테 신짱, 신짱 그랬지.

-그 밖에 또 있으신가요.
=하길종 감독. 이장호도 대마초 사건 걸렸을 때 우리 집에 와서 숨어서 밥 먹고 가고 그랬는데. 김묵 감독도 생각나고… 이만희, 하길종 감독만 있었어도 내가 파묻혀 지내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영화배우보다 ‘무비스타’라는 말로 불리기를 더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신성일이라는 사람은 늘 주인공을 해왔어요. 주인공이면 스타인 거고. 그걸 우리말로 영화배우라고 하면 감이 잘 안 와요. 미국 사람들은 전부 무비스타라고 해요. 나는 스타가 아니고 배우가 되고 싶다, 뭐 그런 광고도 있던데, 내 생각에 영화에는 스타가 있어야 돼요. 나는 500작품 이상 했지만 대체로 혼자 끌고 가는 영화를 해왔잖아요. 요즘처럼 배우들이 집단으로 출연하는 거, 그거 배우들 다 살려주는 거 아니에요.

-요즘은 신성일 영상박물관에 힘을 쏟고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구체적인 준비는 어떻게 돼가시나요.
=박물관이라고 하면 유물이나 갖다놓고 구경이나 시키고 전시회나 기획전이나 하고. 그 이상이 없어요. 하지만 나한테는 동적인 자료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걸로 볼거리를 많이 만들려고 해요. 땅값이 너무 치솟아서 시하고 조정 중이에요. 3000평 정도는 확보해야 되거든. 관광투어 코스가 될 수 있도록 해야지. 10억원 정도 필요해서 지금 투자자 몇 사람하고 얘기 중이에요. 그게 이제 내 남은 숙원 사업이지.

-그 밖에 다른 계획이 또 있으신지요.
=일절 없어요. 다른 것까지 할 여력이 없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요즘도 애인 있으세요? (웃음)
=(기자를 살짝 째려보며) 당연하지. 내가 윤동주의 서시를 가장 좋아해. “죽는 날까지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내 나이 77살이라고. 열정적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요. 한 5년으로 본다고. 그때까지 열정적으로 살고 그 뒤로는 아름답게 지어놓은 영천 집에 파묻혀 살아야지.

신성일 선생은 거짓말하는 게 가장 싫다고 했다. 그래서 거짓말하지 않으련다. 신성일 선생이 ‘그때 그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은근히 과거 정치 인맥을 과시한 부분은 지면에 거의 넣지 않았다. 이미 출간된 책에 상세히 나와 있기도 하거니와 솔직히 듣기 거북했다. 반면에 그에게는 확실히 도저한 매력이 있었다. 자신이 삶은 호박이라며 먹어보라고 다정하게 한쪽 건네줄 때는 친근했고, 끝까지 연애하며 정력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할 때는 멋져 보였고, 함께 작업한 이들과의 일화를 떠올리며 그리워할 때는 의리 있어 보였다. 한국영화의 영원한 무비스타, 그의 복잡다단한 인생의 면모를 어떻게 이 짧은 만남 한번으로 전할 수 있을까. 다만 사람으로서 그의 훈훈한 됨됨이를 조금이나마 느껴보게 된 것이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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