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왜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에피쿠로스는 이 질문을 파고들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고귀한 쾌락’을 있는 그대로 즐기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 익숙해져라. 왜냐하면 모든 선과 악은 지각에 근거하는데, 죽음은 이런 지각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올바르게 통찰하면 우리의 유한한 삶은 즐거울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통찰이 우리 삶에 무제한적인 지속성을 부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구를 없애기 때문이다. (…) 가장 끔찍한 악인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오지 않고, 죽음이 오자마자 우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혼자 죽는 것’이라고들 답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오랫동안 버려지는 무연사가 가장 두렵다고 한다. 그들은 마치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에피쿠로스가 2300년 전에 통찰했듯이 그런 상태를 바로 죽음이라 한다. 그러므로 혼자 죽든 함께 죽든 혹은 가족들 앞에서 죽든 죽음은 우리를 똑같은 상태로 인도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무와 침묵의 세계다.
그런데 ‘혼자 죽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노인들의 말은 그냥 어리석기만 한 것일까? 혹시 그들은 죽음이 아닌 ‘혼자’를 강조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인간이 정말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처절하게 혼자가 되는 것이라고 읽을 수는 없을까? 죽음은 개별적이다. 탄생은 어미의 고통과 함께 하지만 죽음은 홀로 겪는다. 요컨대 우리는 모두 혼자 죽는다.
우울증을 겪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자살률이 매우 높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우울증에 걸리면 세상과 인간관계에 대해 비관적이 된다. 세상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나는 처절하게 혼자이며 무가치한 존재다. 어차피 인간은 결국 죽는다. 아무도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울증 환자들은 인간이 혼자라는 것, 죽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운명이라는 것을 냉철하게 직시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현실적이다. ‘혼자 죽는’ 고통을 미리 맛보고 있는 그들에게는 삶이 이미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들은 죽음으로 이 절대고독을 끝장내고자 한다. 고층아파트에서 아이를 밖으로 던져 죽이고 자기도 자살을 시도하는 우울증 환자는 ‘이런 세상 살아봐야 고통이다. 이게 아이를 위하는 길이다’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삶의 고통에 대한 무서운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가 죽음의 무의미성이라는 계단을 통해 고귀한 쾌락의 세계로 들어갔다면, 우울증 환자들은 삶의 무의미와 고통이라는 다이빙대에서 죽음의 세계로 점프한다.
영화 <그래비티>의 무대는 행성과 행성 사이의 우주 공간이다. 그곳은 매우 춥고, 산소와 물이 없는 무중력 상태다. 거기에 주인공 라이언 스톤 박사(샌드라 불럭)가 떠 있다. 그녀는 유일한 혈육인 어린 딸의 사고사를 겪고 이 우주 공간에 와 있다. 우주 공간은 죽음에 대한 은유로 쓰기에 딱 좋다. ‘거기 있다’는 것은 알지만 가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거대한 무와 침묵의 세계로 어떤 생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라이언 박사는 수리하던 허블 망원경으로부터 멀어져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관객은 누구나 알고 있다. 저대로 계속 멀어진다면 그녀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주는 끝이 없으므로 그녀의 육신은 마치 혼령처럼 영원히 우주라는 이름의 구천을 떠돌게 되리라는 것을.
그런데 그녀는 동료에 의해 구조된다. 살아남기는 했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세계는 아직도 우울증 환자의 그것이다. 허블 망원경 수리라는 임무, 딸의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과제는 무산되었으며 우주 왕복선 안팎에는 사고로 죽은 동료들의 시체가 떠다닌다. 지구와의 통신은 모두 두절되었다. 마지막 남은 동료 역시 그녀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면서 광막한 우주 공간으로 떠나간다. 이제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우주는 육중한 침묵 그 자체다. 게다가 우주선에는 남은 연료도 없다. 그쯤에서 그녀는 전형적인 우울증자의 선택으로 기운다. 죽음이 자신을 찾아오기 전에 스스로 죽음의 길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여기까지 영화는 우울증 환자가 겪는 심리적 풍경을 우주 공간이라는 표상으로 인상적으로 보여주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사로잡은 것은 절대고독 속에 유폐된 라이언 박사의 눈에 비친 광대무변한 우주 공간의 압도적 공허였다. 한번이라도 우울증을 앓아본 사람이라면 그런 공허를 겪기 위해 굳이 우주복을 입고 대기권 밖까지 나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연료가 떨어진 우주선 안에서 그녀는 지구의 어떤 가족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우연히 잡은 라디오 전파로 듣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살고 있을 저 아름다운 푸른 지구를 내려다본다. 행복한 이들, 그러나 그들은 너무 멀리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녀의 정신 역시 무중력 상태에 머물러 있다.
잠깐의 임사 체험 이후, 라이언 박사는 마지막 남은 비상연료와 소화기의 분사력까지 이용해 중국 우주선에 다다르고 그 우주선을 조종해 지구로 귀환한다. 이 영화가 딸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한 우울증 환자의 심리적 풍경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그녀가 어떻게 이 ‘정신적 무중력’ 상태에서 벗어나 강력한 중력이 존재하는 지구로 되돌아올 수 있었는지도 물어야할 것이다. 프로이트라면 아마도 그녀가 우주 공간에서 비로소 행한 애도의 덕분이라고 해석할 것이다. 반면 에피쿠로스라면 동료들의 진짜 죽음이 그녀로 하여금 죽음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올바르게 통찰하게 하였고 이를 통해 유한한 삶에 대한 갈망을 새롭게 느꼈다고 말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울증자는 매를 먼저 맞기를 원하는 학생처럼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해 그것에 온종일 사로잡혀 있는 이들인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이 과도한 공포, 삶의 소소한 즐거움마저 파괴하는 이 두려움은 어떻게 극복되는 것일까? <그래비티>의 카메라는 위성의 파편에 얼굴이 관통당한 남자 동료의 시체를 오래 응시한다. 사라진 그의 얼굴- 소거된 인격 너머로 우주가 보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다. 고작 이게 죽음이라면 에피쿠로스가 옳은 것이다. 얼굴 없는 동료의 시체와 조금 전까지 춤을 추고 있던 동료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들 사이에는 저 무정한 우주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라이언 박사가 비로소 자신이 떠나온 작은 행성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진짜 죽음에 대한 직면과 통찰이 그녀에게 에피쿠로스적 계시의 공간을 열어준 것이다: 가서 지구의 공기와 물과 중력, 늘 네 곁에 있었지만 알지 못했던, 저 찬란하지만 유한한 것들을 죽음이 찾아오기까지 마음껏 즐기라.
지구에 막 도착한 그녀에게는 에피쿠로스의 이런 말이 이제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삶이 이어지지 않을 죽음 뒤에는 전혀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에게는 삶 또한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