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포커스] 한국 다큐의 힘을 떨치다
2013-12-02
글 : 한선희 (서울국제건축영화제 프로그래머·한국 통신원)
사진 : 전상진 (영화감독)
2013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참관기
영화제 메인 상영관인 파테 투신스키 극장에 걸린 <노라노> 영문 포스터.

11월20일부터 12월1일까지 열리는 2013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현재 제작 진행 중인 한국의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들이 소개되었다. 다큐멘터리의 경향과 시장이 빠르게 바뀌는 국제 무대에 국내 창작자들이 단체로 선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3년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이하 IDFA)는 캐나다의 저명한 다큐멘터리 작가이자 교육자였던 피터 윈토닉(1953∼2013)에 대한 헌정으로 시작되었다.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부문에서 마스터클래스를 갖기도 했던 윈토닉은 이번 영화제가 개막하기 3일 전에 세상을 떠났다. 영화제 데일리와 공식시상 부문, 마켓 프로그램 등에서 그에 대한 추모 열기가 이어졌다. 개막작 <리턴 투 홈스>(Return to Homs)와 마켓 인기 작품인 <시카고 걸>(#chicagoGirl: The Social Network Takes on a Dictator) 등이 다룬 시리아 반정부 소요 사태는 총 288편의 작품을 초청한 이번 영화제의 화두 중 하나가 되었다.

이번 영화제는 특히 캄보디아의 거장인 리티 판(<잃어버린 사진>)에 대한 회고전과 리티 판이 뽑은 톱10 다큐멘터리 특별전을 포함해, 서남아시아 다큐멘터리 감독들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창작의 경계를 실험하는 작품들을 초청한 ‘패러독스’(Paradocs), 디지털 스토리텔링과 인터랙티브 다큐멘터리 경쟁 섹션인 ‘독랩’(DocLab) 등의 선정작도 호응을 얻었다.

IDFA 포럼 센트럴 피치에서 발표 중인 <춘희막이>팀.

한국 다큐의 해외 진출 본격화

한국 다큐멘터리 감독과 프로듀서들에게 올해 IDFA는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아이언 크로우즈> <오래된 인력거> <달팽이의 별> 등이 이곳에서 주목받은 이래로, 올해는 역대 가장 많은 한국 다큐멘터리 전문가들이 이 영화제에 참가했다. 연분홍치마의 <노라노>는 신인 감독 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올 전주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피칭 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춘희막이>는 영화제 산업 프로그램인 IDFA 포럼의 하이라이트 ‘센트럴 피치’에 초청되었다. 무엇보다 <춘희막이>를 포함해 제작 진행 중인 총 5개의 한국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의 감독과 프로듀서가 팀을 이뤄 한국전파진흥협회(RAPA)와 방송콘텐츠진흥재단(BCPF)의 후원으로 현지에서 적극적으로 소개되었다.

두 기관은 한국 다큐멘터리 창작자들의 해외 시장 진출을 위해 올해 처음으로 IDFA와 적극적으로 연대했다. 이들은 지난 10월 초 서울에서 제작 진행 중인 11편의 프로젝트를 대상으로 피칭 워크숍을 실시했다. 당시 모의 피칭에서 최종 선발된 프로젝트의 감독과 프로듀서가 IDFA에서 직접 피칭과 홍보를 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45년 동안 한 남자의 두 아내로 살아온 두 할머니의 인간애를 그리는 박혁지 감독의 <춘희막이>, 죽음을 앞둔 90대 노부부의 사랑에 대한 관찰기인 진모영 감독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북한 체제에 대한 풍자화를 그려온 탈북화가 송벽의 스토리를 담은 서민원 감독의 <붉은 화가>, 북한을 탈출한 뒤 중국과 동남아를 거쳐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중년 여성의 여정을 기록한 윤재호 감독의 <조국땅을 떠나며>, 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다시 쓰는 전상진 감독의 <살아남은 아이들> 등이 그 작품들이다.

지난 20년 동안 피칭은 전세계적으로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투자를 위한 하나의 업계 문화가 되었다. 그리고 IDFA 포럼은 그 문화를 전파하는 일종의 산파 역할을 했다. 좋은 피칭에는 일정한 규칙과 테크닉이 있고, 유럽의 강사들은 한국 다큐멘터리 작가들에게 세계 무대에서 통용되는 피칭의 가이드라인을 전수했다. 3분 분량의 트레일러를 포함해 피칭 7분, 질의응답 시간 8분을 포함해 총 15분 동안 자신의 프로젝트를 알리는 ‘기술’을 터득한 것이다.

BCPF와 RAPA는 지난 11월23일(토) ‘한국 피칭의 날’(Korea Pitching Day)을 마련해 유럽 방송사 및 공공기금 투자 담당자(흔히 ‘커미셔닝 에디터’라 불린다)와 배급사 관계자를 초청했다. 피칭이 끝난 뒤 이들은 각 프로젝트의 내용과 한국 사회와 역사에서의 맥락, 스토리텔링과 스타일, 유럽과의 공동제작 등과 관련해 많은 질문을 던졌다. 덴마크 국영방송사 <DR>의 다큐멘터리 부문장인 메테 호프만 메이어는 “한국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의 스토리텔링 방식이 매우 흥미롭다”면서 “DR에서 한국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피칭이 끝난 뒤 초청 프로젝트팀은 이 자리에 함께한 커미셔닝 에디터들과 일대일 미팅 기회를 가졌다. 이어서 RAPA와 BCPF는 IDFA 포럼 전야에 열린 킥오프 파티를 주관하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에 대한 프로모션을 이어갔다.

IDFA 포럼이 시작되면서 영화제 열기는 점점 고조되었다. 포럼 부문에는 총 17편의 프로젝트가 초청된 ‘센트럴 피치’ 외에도 초기 단계의 제작 프로젝트를 대상으로 하는 ‘라운드테이블 피치’, 인터넷과 연계한 인터랙티브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에 초점을 맞추는 ‘크로스미디어 프로젝트’, 예술 관련 소재를 다루는 프로젝트를 따로 묶은 ‘예술과 문화’ 등에 약 50편의 프로젝트가 소개되었다.

피칭에서 큰 호응을 얻은 뒤 콤파니시어터 앞에 선 박혁지(왼쪽) 감독과 한경수 PD.
빙어 필름 랩의 시사실에서 마련된 ‘코리아 피칭 데이’. 주최쪽인 RAPA와 BCPF 관계자들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글로벌 다큐멘터리 공동체, 머리를 맞대다

IDFA 포럼의 피칭 문화는 글로벌 다큐멘터리 공동체의 우정과 신뢰, 협력과 경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실 이 무대는 경쟁과 반목보다는 서로에 대한 우애와 격려가 더 두드러지는 장이다. 프로젝트 피칭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창작자와 커미셔닝 에디터들간의 공개 토론이 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해당 프로젝트에 대한 평가와 판단이 즉석에서 이루어지고, 때로는 격렬한 논쟁과 독설이 오가기도 하지만, 대체로 창작자들의 비전을 존중하고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함께 고민하며 지지와 후원을 호소하는 과정이 돋보인다.

여기서 방송과 영화와 인터넷, 극장과 갤러리 등 미디어 플랫폼간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피칭에 선정된 프로젝트 대부분이 TV용(52분)과 극장용(90분) 버전을 동시에 제작할 것임을 공표하고, 인터넷이나 모바일 앱에서도 유통될 수 있는 트랜스미디어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메인 프로그램인 센트럴 피치에 자리한 커미셔닝 에디터는 30명 남짓. 글로벌 방송사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알자지라 네트워크>를 제외하면, 아시아에 기반을 둔 커미셔닝 에디터는 <NHK>가 유일했다.

<춘희막이>의 박혁지 감독과 한경수 프로듀서는 포럼 둘쨋날 발표에 나섰다. 이들은 다른 프로젝트들과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서정적인 트레일러와 차분한 피칭으로 장내를 가득 메운 청중의 큰 환호와 박수를 얻었다. 커미셔닝 에디터들 역시 거의 이견이 없을 정도로 호의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실제로 <춘희막이>가 해외 방송사와 공공기금에서 어느 정도 실질적인 투자를 받아낼 수 있을지 기대해볼 만하다.

한국 팀에 동행한 RAPA 교육원의 임재훈 차장은 “방송 시장이 디지털로 전환되고, 해외 시장 진출에 대한 수요가 점점 많아지면서 상대적으로 교육 기회가 적었던 다큐멘터리 창작자들을 위해 이번 프로모션 사업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BCPF의 권진희 사업팀장은 “이번 프로모션 사업의 결과를 가지고 돌아가면 국내 다큐멘터리 시장에도 어떤 자극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국내에서도 방송과 영화, 미술 등 각기 다른 분야에서 작업해왔던 창작자들이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그 교류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각국의 영화 정책 기관들이 자국의 다큐멘터리를 활발히 홍보하는 이곳에서, 한국 영화산업과 정책분야의 보다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해 보인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