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음지에서 건진 통쾌함이여! <마스카라>
2002-02-20

지난해 하리수의 등장은 상당한 파장을 몰고왔다. 그녀는 국내 트랜스젠더 연예인 원조로 부각됐고, <노랑머리2>는 트랜스젠더 배우를 내세운 첫 번째 영화로 일컬어졌다.

물론 누가, 혹은 무엇이 처음이냐는 기록을 두고 소모적 논쟁을 하는 것은 분명 바보짓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약 7∼8년 전에 이미 국내에서 실제 트랜스젠더를 내세운 <마스카라>(고 이훈 연출)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6천만원의 예산, 그리고 12회 촬영으로 완성된 35mm 장편 <마스카라>는 개봉 즉시 시장에서 외면당했고, 솔직히 작품면에서도 너무 많은 허점을 보인 엉성한 영화였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무모하게도 데뷔작의 연출과 제작을 겸한 한 열혈 영화학도의 순진한 열정과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영화 곳곳에 스며 있는 음지의 인간들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자세, 그리고 고상함과 우아함 대신 자유와 게으름으로 무장한 영화의 사상 때문이다.

비록 감독의 천성적 게으름으로 인한 준비 부족과 부족한 예산 탓에 포장은 엉망이었지만, 주인공 하지나가 성전환 수술을 한 뒤 자신을 괴롭혔던 남자놈들을 모조리 잡아죽인다는 내용은 매우 통쾌했다. 영화 전체에 흐르는 잘난 체하는 인간들에 대한 ‘좆까!’(fuck-you) 정신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을 가장 강도높은 수위로 모욕한 속물 사진작가를 처단하지 못하는 감독의 나약한 태도에는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재력가 부모를 둔 덕에 이훈은 어릴 때부터 빈둥거리고 놀며 엄청난 양의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며 성장했다. 나는 단 한번도 누군가가 그에게 영화나 음악에 관한 질문을 했을 때 그가 답을 하지 못하는 걸 보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한동안 음악평론가로 밥먹고 살았던 나보다 몇배 더 많은 양의 음악 정보를 습득하고 있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그를 통해 다양한 음악과 영화를 접했고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누구보다도 음악과 예술을 좋아했던 이훈이지만 불행히도 선천적 재능은 없었던 듯하다. 그리고 재능 부족을 투지로 메우려는 의지도 박약했다. 남이섬 촬영을 끝내고 배에서 내린 어느날 그는 주차장 나무밑에서 너무 힘들어 제작을 접어야겠다고 말했다가 나로부터 심한 핀잔을 들어야 했다. 나는 이훈 생애 말기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마스카라>에 무보수로 출연중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구인 박찬욱, 윤태용, 곽재용 등이 매우 비참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무료 출연 등 여러 면에서 이훈의 영화를 도왔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스카라>는 전국 1만명의 관객도 동원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약 2년 동안 <다이아몬드 아이>(Diamond Eye)란 새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들을 전전하며 재기를 모색하던 이훈은 어느 추석날 밤 신촌에 있는 카페 ‘롤링스톤즈’에서 발생한 화재로 이 세상을 떠났다. 죽기 몇분 전 나는 그와 통화했다.

이훈이 죽은 뒤 꽤 오랫동안 우리는 그의 생일이나 기일이면 어김없이 마지막으로 그를 떠나보냈던 양수리 호숫가를 찾곤 했으나, 요즘은 상당히 소홀해졌다. 역시 망각이란 참으로 편리하다.

솔직히 이훈과 교류했던 철없고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전혀 없다. 단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살아 숨쉬던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과 만약 계속 살 수 있었다면, 최소한 한국의 에드 우드(Ed Wood) 정도는 뒤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소망뿐이다.

마지막으로 ‘내 인생의 영화’에 거창한 영화를 소개하지 못한 데 대해 죄송스런 맘을 금할 길 없다. 하지만 <마스카라>가 내게 있어 가장 안타까운 영화임에 쓸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하리라 믿는 것이 마음 편하겠다.

글: 이무영/ 영화감독·<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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