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가족을 보지 못하고,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바로 감옥 아닐까.” 그렇게 방은진 감독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현실을 본다. 평범한 주부 정연(전도연)이 대서양 감옥에서 악몽 같은 2년을 보내고, 한국의 남편 종배(고수) 또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하나뿐인 딸과 함께 빚을 갚고 생계를 해결하며 역시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다. <오로라공주>(2005)로 데뷔해 <용의자X>(2012)를 거쳐 세 번째 장편영화 <집으로 가는 길>에 이르기까지, 그는 ‘배우 출신’이라는 표현이 어색할 만큼 굵직한 감독의 행보를 보여왔다. 방은진 감독이 이미 존재하는 실화로부터 더 캐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어느덧 감독으로서 10년의 시간을 지나온 그녀를 만났다.
-<집으로 가는 길>의 시작점이 궁금하다. 혹시 한국을 떠나 작업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였나.
=아니다. 어떤 순간에도 ‘이야기’가 먼저였다. <집으로 가는 길> 촬영을 준비할 때 류승완 감독이 <베를린> 막바지 작업 중이었는데 “왜 나가려고 그래요. 정말 죽어, 힘들어” 그렇게 경고하더라. (웃음) 그렇다고 뭘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류 감독이 마지막에는 “한국영화 많이 다운받아가세요. 그리고 언젠가 꼭 공황상태가 옵니다”라고 겁주더라.
-정말 공황상태가 왔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힘들었다.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하고 콘티를 철저히 짜도 돌출되는 변수를 제어하는 순간이 만만찮았다. 뭐랄까, 느닷없는 사건과 맞닥뜨리는 힘겨움보다 ‘피로의 누적’과 싸우는 게 관건이었다. 그리고 파리에서는 촬영할 수 없는 까다로운 조건들이 많고, 보조연기자조합도 없어서 캐스팅 디렉터의 역할이 중요했다. 당연히 보수도 너무 비싸고. 할리우드에서도 프랑스에서 잘 안 찍는다고 하던데, 그 이유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다행히 제작팀에 <황해> <마이웨이> <베를린> 등에 참여하며 해외 프로덕션 경험이 많은 친구들이 있어서 큰 덕을 본 편이다.
-<집으로 가는 길>은 전도연의 영화다. 이전 <씨네21>과 인터뷰(931호 ‘커버스토리’)에서 전도연은 “방은진은 감독임과 동시에 ‘선배 배우’라는 부담감이 컸다”고 얘기한 적 있다.
=그건 배우로서 느끼는 어쩔 수 없는 선입견일거다. 물론 그건 내가 ‘편하게’ 해준다고 해서 쉽게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오로라공주> 때도 (엄)정화가 ‘선배’와 ‘감독’ 중에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헷갈린다고 했고, <용의자X> 때는 (류)승범이한테 “그냥 선배라고 불러”라고 했더니 “한번 감독님은 영원한 감독님입니다”라며 촬영 끝나고도 끝까지 ‘감독님’이라고 하더라. (웃음) 어쨌건 기본적으로 어려워한다는 걸 느낀다. 모두의 공통된 얘기는 “(감독이 배우 출신이라) 내 마음을 다 알아줘서 편할 것 같지만, 반대로 내 마음을 들킬 것 같다”는 거였다. 도연이는 촬영 전 여러 번의 만남과 시나리오 리딩 과정에서 “감독님 믿어주세요, 잘할게요” 하던 말을 믿었다. 물론 촬영 중 이견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생각한 정연보다 훨씬 더 깊이 있고 명암이 도드라진 인물로 만들어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
-혹시 전도연의 이전 영화 중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나 장면이 있다면.
=<너는 내 운명>(2005)의 면회실 장면도 좋지만 역시 <밀양>(2007)의 교회 장면이다. 사실 이창동 감독님과도 잘 알지만, 구체적인 디렉션을 원하는 배우에게 언제나 딴 얘기를 하면서 그저 “느껴라”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웃음) 그 상황에서 전도연이 그런 연기를 한 건 정말 어마어마한 순간이다. 게다가 <밀양> 첫 촬영 때는 현장에 직접 내려가서 구경하기도 했다. 트럭 타고 밀양으로 가다가 잠깐 세우고 아이와 함께 있는 장면이었는데, 그걸 무려 30테이크 이상 갔다. 도연이도 ‘이걸 왜 계속 다시 찍지? 왜?’ 하면서 답답한 마음이었을 거다. 어쨌건 내가 느끼기에 전도연의 연기는 <밀양> 이전과 이후 큰 폭으로 달라진 것 같다. 그로부터 시간이 더 지나 이번에 만난 전도연이라는 배우는 굉장히 예민하고 명쾌했다. 감독으로서는 굉장히 까다로우면서도 또한 편한 두 가지 모습이 다 있다.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는데, 무엇보다 ‘정확한’ 배우라는 느낌이었다.
-해외 연기자들을 캐스팅하고 디렉팅할 때는 TV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와 싸워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웃음) 송정연을 괴롭히는 교도소 간수 ‘헬보이’나 정연과 함께 지내는 ‘얄카’는 꽤 비중이 높다.
=헬보이를 연기한 코린 마시에로는 <러스트 앤 본>(2012)에 출연하면서 국내에도 꽤 얼굴을 알렸는데, 프랑스 현지에서도 상당히 평가가 높은 배우다. 사실 1안은 <세라핀>(2008), <페어웰, 마이 퀸>(2012) 등에 나온 앤 베누아라는 배우였다. 코린 마시에로가 어딘가 게르만족 같은 딱딱하고 전형적인 간수 느낌이라면, 앤 베누아는 약간 뚱뚱하고 착하게 생긴 아줌마 스타일이다. 두 배우의 ‘룩’이 전혀 다른데, 후자의 간수 느낌이 더 맞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일정상 함께하기 힘들게 돼 마시에로에게 넘어갔는데, 두 배우가 원래 굉장히 친한 사이였다. 코린 마시에로와 ‘스카이프’로 미팅을 하는데 “다른 배우가 안 돼서 연락하는 거지?”라며 웃더라. (웃음) 마시에로는 ‘감독과 뭔가 통한다 싶으면 무조건 하겠다’는 생각이었고 결정적으로 “원했던 배우와 하지 못해서 아쉬울 수 있지만, 이게 다 운명”이라더라. 너무 멋있었다. (웃음) 그리고 촬영장에서는 너무나 유쾌한 배우여서 작업이 즐거웠다. 아, 그러고보니 촬영 도중 공황상태가 한번 온 적 있다.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 있을 때였는데, 마시에로가 다가와서는 “어쨌건 이건 네 영화야, 네가 먼저 즐겨야 해”라고 했다. 정말 큰 힘이 됐다. 얄카 역의 요안아 쿨리크도 폴란드에서는 꽤 유명한 로커이자 배우다. <파리 5구의 연인>(2011), <엘르>(2011)에서 정말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정연과 종배가 어렵사리 첫 통화를 하게 됐을 때, 종배는 괜찮냐는 안부부터 묻기 전에 지질하게‘왜 간 거냐’며 따진다. 그러니 정연도 ‘당신 때문’이라며 싸우기 시작하고.
=음, 그냥 그게 부부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족에게 그러는 것처럼, 가까운 사람에게 더 함부로 대하는 모습이 있지 않나. 물론 ‘지금이 어떤 상황이고, 얼마나 힘들게 전화 연결이 됐는데 저러고 있나’ 하면서 싫긴 하지만 그게 진짜 현실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전까지 종배는 이리저리 뛰어다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최대한 인물을 작게 보이게 만들고 싶었다. 어쩔 수 없어 막막한 무기력함이랄까. 정연과 종배가 각자의 공간에서 느낀 일상의 고통은 감히 영화로 다 담아내기 힘든 정도였을 거다.
-그런 종배의 모습은 지질하면서도 답답하고 어떨 때는 귀엽기도 하다. 어쨌건 미워할 수 없는 ‘징그러운 남편’ 혹은 ‘가족’의 모습이랄까.
=종배가 아내를 위기에 빠트린 문도를 찾아다니면서 알게 된 조폭과 함께 일종의 ‘형사 놀이’를 하면서, 마치 원래 그 조직원의 구성원이었던 것마냥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같이 가시죠” 하거나, 답답함에 행패를 부리면서 “씨발, 검찰이 그런 것도 몰라!”라고 할 때 정말 철없지만 귀엽긴 하더라. 솔직히 시나리오에 있던 그 대사들을 그렇게 살려낼지 몰랐다. (웃음) 그러면서 엄청난 위기를 지나온 부부애와 가족애, 그 사랑을 되찾는 과정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들에게 활짝 웃는 해피엔딩을 선사하고 싶었다. 살면서 그 어떤 순간에도 돌아보면 거기 있는 가족?
-종배가 딸 혜린(강지우)을 누나에게 맡겨뒀다가 다시 데리고 나갈 때, 그 누나가 “저 계집애(혜린)는 (오랫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했는데도) 한번 돌아보지도 않네”라고 말하는 디테일이 좋더라. 종배가 굳이 누나의 아들과 인사하는 장면도 보여주면서.
=나처럼 개 두 마리만 데리고 살며 늦도록 결혼 안 한 여자들은 그런 경험 많을 거다. 이모랍시고 조카들하고 한참 놀아주면 찰싹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다가, 나중에 자기 엄마가 오면 “엄마~”하고 뒤도 보지 않고 쌩 달려가버린다. (웃음) 종배의 남자 조카도 그렇고, 그런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중에 정연이 공항에 돌아오는 장면을 찍을 때 그 남자 조카를 연기한 학생이 안 보였다. 그래서 왜 걔가 없냐고 하니까 내가 지시한 적이 없다는 거다. 큰 실수였지. (웃음)
-정연이 탈출해서 카리브해의 너른 바다와 마주한 순간은, 당신으로서도 고된 해외 촬영을 참으며 기다려온 단 하나의 이미지였을 것 같다.
=맞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 너무 아름다워서 순간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먹먹한 해방감을 한컷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전까지 정연은 교도소 안에만 갇혀 있어서 바다를 보지 못했을 것이고, 이송 중에 해안도로를 지나가긴 하지만 쇠창살이 그 시선을 가로막고 있다. 말하자면 그때 진짜 바다를 본 것이다. 물론 헬보이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혼란스런 상황에서도 탈출을 감행하는 모습이 다소 관습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왠지 교도소의 독방과 재판장만 오가는 정연에게 꼭 그런 순간을 선사하고 싶었다. 전도연과도 그냥 딱 두 마디만 주고받았다. “어떤 느낌인지 알지?” “네, 알아요.” 다른 말이 전혀 필요 없었다.
-더불어 그 탈출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역동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바다 장면은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찍었는데, 현지에서 고용한 스테디캠 기사가 전도연의 뛰는 속도를 따르지 못했다. 배우를 쫓아가지 못하는 스테디캠이 말이 되나. (웃음) 그래서 결국 우리 식대로 핸드헬드 촬영을 했다. 그러고 보면 정연이 다른 수감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교도소 내 싸움 장면도, 현지에서 고용한 무술감독이 너무 ‘바래 나는’ (가짜 티가 나는) 액션 신을 짜와서 우리가 직접 했다. 역시 한국 스탭들이 최고랄까. (웃음)
-또한 정연과 종배가 편지와 통화를 넘어 실제로 만나게 되는 첫 ‘스킨십’의 순간도 무척 고심했을 것 같다.
=당연히 정연은 남편이 온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다. 당시 실제 다큐를 보면 고층 아파트의 1층에서 보안 창살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실화의 주인공인 장미정씨는 그 문을 열어주기에 앞서 그냥 주저앉아버리더라. 영화도 그렇게 갔다.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서 있을 힘도 없이 바로 다리가 풀려버렸을 거다.
-프랑스 대사관 직원들은 희화화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악질적인 모습과 그저 복지부동의 모습사이에서.
=배우 배성우씨가 주로 등장하는데, 대사 톤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누고 여러 버전으로 찍어봤다. “마약?” 그러면서 놀라 부딪히고 그러는 장면도 있는데, 너무 우스꽝스러우면 안 되고 또 지나치게 악독할 필요도 없었다. 기본적으로는 악역인데 밉지 않은 악역이랄까, 굳이 나쁘게 군다기보다 뭐든 자기 일이 아니라고 간과해버리면서 사실상 악역보다 더 미운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엔딩 크레딧을 보니 ‘프랑스 대사’로 장광이 출연했더라. 혹시 최종적으로 편집한 이유는 그가 악질 교장으로 출연한 <도가니>(2011)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다는 부담 때문이었나?
=<집으로 가는 길> 역시 거대 권력의 존재가 일차적인 분노를 일으키는 영화다. 그런 것 때문은 아니었고, 지나치게 일상적이고 희화화된 장면이 이어져서 그랬다. 대사관 직원들에게 “뭐야, 그런 일이 있었어?”라며 영사가 더듬더듬 읽어주는 신문을 듣고 있다가 “참나, 방 영사는 아직도 프랑스 신문을 못 보나”라며 야단을 친다. 영사가 프랑스 신문도 제대로 못 읽으니 정말 황당하지. (웃음) ‘참나’ 하는 그 대사 느낌이 너무 좋아서 현장에서는 완전히 유행어였다. 하여간 최종 편집에서 덜어내 매우 죄송한 마음이다.
-<오로라공주>를 시작으로 <용의자X>를 거쳐 <집으로 가는 길>에 이르기까지, 감독으로 살아온지난 10년을 정리해본다면?
=하나같이 암담한 현실 속에서 주인공들이 말 그대로 애타게 자신의 집을 그리워하는 영화들이었던 것 같다. <오로라공주> 때는 빨리 찍고 빨리 판단한다는 게 개인적인 자랑거리였는데(웃음), <용의자X> 때는 컷마다 정성스레 찍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집으로 가는 길>은 그 두 가지가 좀 섞이지 않았나 싶다. 감독으로서 우리가 사는 곳의 음지를 더 크게 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이랄까, 그런 얘기를 하고 싶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고자 하는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집으로 가는 길>의 실제 주인공은 2번 정도 자살 기도를 한다. 감옥에서 한번, 그리고 나중에 영사가 찾아와 10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얘기할 때다. 자기로 인해 가족들이 겪을 고통과 부담을 끝내버리고 싶은 거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가고 싶진 않았다. 지옥 같은 현실일지 모르겠지만 끝끝내 헤쳐나가고 지키려는 모습이 곧 희망이라 믿고 싶었다. 그렇게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야기다. (웃음)
방은진 감독에게 지난 10년 동안 ‘감독 방은진’으로서 변한 게 있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마치 준비된 답안처럼 정리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마도 감독 방은진으로서 깊이 고민해온 시간들이 단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로라공주> 때는 ‘내가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결국 안 되는구나’ 하고 느꼈다면, <용의자X> 때는 ‘내가 다 껴안으면 잘될 줄 알았는데, 역시 안 되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집으로 가는 길>을 하면서는 ‘영화는 하면 할수록 정말 어렵구나’ 하는 생각만 더해졌다. 연출자로서 이제 내가 느끼는 건 크게 두 가지다. ‘붙지 않는 컷은 없다’는 것과 ‘감독이 성장하면 그가 다루는 인물도 성장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필모그래피가 늘어나면서 오히려 감독 일이 더 힘들어진다고 했다. 그럴수록 최초의 ‘의도’를 계속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애초에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택했나,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하는 것”이야말로 흔들리지 않는 감독의 자세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