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윤진서] 그녀의 그럴듯한 대답
2013-12-31
글 : 이화정
사진 : 최성열
윤진서

어쩌면 우리는 윤진서에게서 늘 ‘충격’을 받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올드보이>의 소녀로 강한 신고식을 치른 이후 지난 10년간 윤진서는 다양한 작품에서 부단히 노력해왔지만, 그녀에게 더 강한 걸 요구해왔다. <그녀가 부른다>의 ‘진경’은 윤진서가 우리에게 내놓은 아주 좋은 화답이라고 생각한다. 99%를 그녀가 오롯이 끌어가는 이 작품에서 윤진서는 늘 그랬던 것처럼 속 시원한 변화나 강한 충격을 선사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라서 잘할 수 있는 연기가 무엇인지를 영화를 통해서 분명히 보여준다. 영월 극장의 매표소 직원인 진경은 출생의 비밀과 엄마에 대한 콤플렉스를 안고 사는 여자다. 그 자신 역시 의미 없는 연애로 상처를 받지만, 그걸 삭이면서 살아갈 뿐이다. 냉랭한 껍질로 둘러싸인 진경의 아픈 내면은 배우 윤진서를 통해 비로소 생생하게 살아난다. <올드보이> 이후 10년, 배우 윤진서에게 또 하나의 분기점이 된 이 의미 있는 영화를 눈여겨보길 바란다.

-<그녀가 부른다>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지지난해 뉴욕 가서 어학 공부도 하고 요가 자격증도 따고 할 때였는데, 심심하니까 회사에 시나리오 좀 달라고 했다. (웃음) 별것 없다고 하는데 남이 보는 것과 내가 보는 건 또 다르니까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몇편 봤는데 이 영화가 유독 맘에 들더라. 시나리오를 보다보면 제작 규모나, 개봉하면 관객이 어느 정도 반응을 보일지를 알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사이즈가 크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계속 마음이 끌리더라. 읽으면서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영화였다.

-진경이라는 캐릭터와 윤진서라는 배우와의 싱크로율이 좋다. 과장되지 않은 톤으로 진경의 심리를 잘 표현해낸다. 엄마에 대한 콤플렉스로 삐뚤어진 모습이 자칫 전형적인 모습으로 굳어질 수도 있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느낌을 부여한다.
=감독님과 작가분이 모두 시나리오 쓰면서 1순위로 나를 떠올렸다고 하더라. 제일 잘 어울릴 거 같다고. 그런데 예산이 적은 영화다보니 내가 할까 싶었다더라. <마음이…>를 연출한 박은형 감독님이었는데 뵙고 보니 심성이 너무 고운 분이었다. 난 영화를 하면서 좋은 사람과 같이 작업하고 영향을 받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런 면에서도 놓치기 힘든 작품이었다.

-‘윤진서’가 가진 기존 이미지와 겹칠 거라는 걱정은 안 했나.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가령 핑크빛이라면 그 영역 안에는 붉은 핑크도 있고, 인디언 핑크도 있고, 파스텔 핑크도 있다. 이 모든 걸 보여주고 노란색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 같다. 분명한 건 내가 이런 작품, 이런 톤을 좋아한다는 거다.

-진경은 내면의 상처 때문에 마음을 닫고 살아가는 여자다. 마음을 숨기려다보니 그게 위악적으로 표현이 되고 소통에도 문제가 생긴다. 주변에서 봤다면 달갑지 않은 여자일 텐데, 진경에게는 어떻게 다가갔나.
=주변에 남자가 많고 자유로운 연애를 하다보니 대부분 이런 여자들에게 마녀사냥 같은 분위기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를 보고 얘기를 나눠보니 남자들은 아무래도 진경이란 캐릭터에 대해 접근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더라. 시나리오를 읽다보니 그녀의 과거가 보였다. 서울에서 살다 상처를 받았고, 회사생활도 했지만 다 접고 지방에 내려온 여자. 사람 많은 것도 귀찮고, 관계를 맺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 캐릭터다. 그래도 살아보려고 영월을 찾은 여자. 영화에는 이런 것들이 다 나오지 않지만 영월로 오기 전 그녀의 모습이 상상이 되고 이해가 되더라.

-짧은 커트 머리와 노메이크업, 내추럴한 의상도 캐릭터와 조화를 이루는 훌륭한 연출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경이란 캐릭터의 스타일이 진경을 더 살아 있는 여자처럼 만들어준다. 진경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여자가 될 것 같다.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게 그게 모두 내 옷과 신발이었다. 스타일리스트가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감독님도 배우들에게 그냥 본인이 입던 의상을 준비하라고 요구하셨다. 신의 연결이나 이런 것들을 생각해서 직접 다 준비했다. 다른 작품 때도 직접 한 적이 더러 있는데, 다행히 잘 맞은 것 같다.

-진경의 독특함은 그녀의 대사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남들이 일상의 대화를 구어체로 할 때, 진경은 문어체 화법으로 자신의 내면을 묘사한다.
=목소리 톤이나 어투 같은 부분에서 고민이 많았다. 문어체 말투가 도드라지긴 하지만, 만약 이걸 일상 언어로 바꾸면 진경의 캐릭터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책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더라도 문어체적인 성격을 버리지 않았다. 워낙 쓰는 언어가 다르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캐릭터라 촬영 내내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영월에 한달 정도 머물면서 다른 배우들과 숙소를 따로 썼다. 차 타고 10분 정도 가는 거리였는데 같이 한잔하자는 유혹도 떨쳐버릴 수 있더라. 촬영 끝나면 방에 들어가 혼자 있으면서 진경의 내면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새어머니의 죽음 이후부터 진경이 속마음을 표현하는 오열 장면까지가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준다. 진경은 꾹꾹 감정을 누르고 있지만, 언젠가 터져버릴지 모르는 상태이기도 하다. 내면을 숨기고 있던 진경이 자신의 감정을 가장 강하게 표출하는 장면이기도 한데, 그 장면을 찍을 때 고충도 있었을 것 같다.
=그 장면에서의 폭발이 내겐 고맙더라. 내가 영화의 99%에 등장하는데, 거의 대부분 예민하고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눌려 있는 상태를 계속 유지한 거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오열하니 속이 시원하더라. 한번에 오케이가 됐는데, 감독님에게 내가 한번 더 하자고 했다. (웃음)

-진경이 혼자 극을 온전히 이끌어가는 작품이고, 결국 윤진서라는 배우가 끌어가야 할 몫도 큰 작품이었다.
=같이 작업했던 영화인들에게서 칭찬도 들었다. <올드보이> 때 같이 작업한 분도, 지금까지 내 연기 중 제일 좋았다고 하더라. 아끼는 친구들에게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게 흐뭇하다. 연기를 하는 데 자신감도 많이 생겼다. 그들이 소수라고 해도 통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감동을 줄 수 있겠구나 싶고. 내 경우에는 <러스트 앤 본>의 마리온 코티아르나 <시스터>의 레아 세이두가 그들의 이전 작품들보다도 더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대표작은 아니지만, 유독 그 캐릭터가 인상에 깊게 남았다. 내가 그 영화의 소수의 관객 중 하나가 된 것처럼 <그녀가 부른다>도 공감해주는 관객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소수에게 통하는 뚜렷한 색채가 장점이지만, 상업영화를 일부러 피하는 것 아닌가 싶은 아쉬움도 있다.
=대중성이 담보되는 좋은 캐릭터를 자주 못 만나서지 상업적인 영화가 싫은 게 아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나 <바람피기 좋은 날> 같은 흥행작도 있었다. 그런데 ‘윤진서가 왜 했지, 안 어울려’ 할 것 같은 영화에까지 나를 끼워넣고 싶지는 않다. 사실, 유행상품 같은 캐릭터를 잘 못 입겠다. 타고난 성격 때문인가. 내가 좀 귀가 두꺼운 편이다. 남들이 다 이상한 남자라고 해도 좋아 보이고. (웃음) 남들은 주로 내가 연기한 캐릭터들에 대해 ‘섹시하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그런 전형적인 여자들에게서도 외로움이 보이고 다른 모습이 보인다.

-올해는 <올드보이>가 10주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올드보이>와 지난 10년, 윤진서라는 배우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10년 만에 다시 영화를 보고, 그때 그 멤버들과 모여 아침까지 술 마시고 그랬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두 똑같더라. 그게 너무 좋았다. 그땐 현실이었지만, 이제는 추억이 됐다. 스무살의 그때보다는 나이가 들었지만 지금 더 열심히 잘 살고 있는 거 같다. 당시엔 아무것도 모르고 했는데, 지금은 힘든 일인 줄 알면서도 열심히 연기를 해나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여섯 장면밖에 안 나왔는데, 상상도 못할 만큼 주목받았다. 어릴 때라 노출 장면도 있고 좀 무서운 생각도 들어서 안 하겠다고 했다. 박찬욱 감독님 영화를 좋아했는데도 좀 두렵더라. 그러다가 한두달 만에 설득당했다. 첫 영화를 박찬욱 감독의 작품으로 했다는 건 분명 크나큰 축복이다. 이후 어떤 현장을 가도, 그 현장을 통과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스탭 모두가 영화에 미쳐 있었고, 영화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던 것도 그때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서다. 마치 마약 같았던 그 때의 현장을 다시 만날 거라는 기대감이 있다.

-에세이집 <비브르 사 비>의 북콘서트를 하는 날이기도 하다. 책을 보니, 자신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어 보인다.
=글을 쓰고 싶었던 건 오래전부터였다. 첫 책을 뭘로 낼까 생각하다가,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한 거다. ‘배우 윤진서가 이렇다’가 아니라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이렇게 배우가 되고 이별을 하고, 이렇게 꿈꾸며 산다. 규모가 큰 영화뿐만 아니라 작지만 공유할 수 있는 영화도 이렇게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음악이나 영화, 문학을 자연스럽게 접하며 살아왔고, 내 몸 안에 그런 감성이 많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소설을 준비 중이다.

-시나리오 작업도 하고 있는 걸로 안다.
=계속 쓰고 있긴 한데, 아직 이렇다 할 작품은 없다. 냉정하게 봤을 때 가치 있는 작품을 하려고 한다. 아직은 계속 쓰는 중이다.

-다음 작품은 어떤 건가.
=로드무비 <산타바바라>(감독 조성규)와 <태양을 향해 쏴라>(감독 김태식)가 있고. 장률 감독의 <경주>에도 출연했는데, 어쩌다보니 이것저것 제작에 도움을 준 덕에 공동프로듀서로 이름도 올라간다. 좋아하는 여행은 당분간 보류해야 할 것 같다. 감독님들이 모두 후반작업해야 하니 어디 가지 말라고 하시더라. 들어가는 작품은 아직 미정인데, 어떤 영화를 해야 좋을 것 같나.(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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