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한지민] 완전히 변할 거야 계획 따윈 없어
2014-01-06
글 : 윤혜지
사진 : 백종헌
<플랜맨> 한지민

1분1초까지 알람소리에 맞춰 살아온 ‘플랜맨’ 정석(정재영)은 짝사랑을 하고 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지원(차예련)은 정석만큼이나 정연하고 깨끗하다. 정석은 용기를 내 보지만 그의 고백은 단정치 못한 소정(한지민)에게로 향하게 된다. 계획에 없던 상황, 정석의 머릿속에선 혼란의 적신호가 울려댄다. 게다가 인디밴드가수인 소정은 지원을 빌미로 자기가 꾸린 밴드에 정석을 몰아넣어버린다. 그런데 말이다. 이것 참, 묘한 일이다. 그를 한손에 쥐고 흔드는 이 여자에게 정석은 알 수 없는 두근거림, 혹은 모종의 연대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칠칠맞지 못한 데다 지저분하기까지 한 소정의 이상한 매력, 대체 뭘까. 소정의 노랫말들이 그녀를 알아가는 데 작은 힌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지나칠 수 없었어. 혼자 웅크리고 있는 널. 외면할 수 없잖아. … 슬퍼 말아요. 삼각김밥. 30초면 돼. 충분해요. 두려워 말아요, 삼각김밥. 이젠 들어와요. 내 입속으로.” <삼각김밥>

아주 잠깐이면 된다. 누군가에게서 색다른 매력을 발견하기까지는. 한지민에겐 <플랜맨>이 그랬고, 우리에겐 한지민이 그러하다. 다수의 TV드라마를 통해 한지민이 우리에게 보여준 얼굴은 대개가 예쁘고 씩씩한 캔디형 여주인공이었다. <플랜맨>에서의 한지민도 언제나처럼 기운차고 밝다. 다만 직진하는 동시에 방황하며,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한쪽 마음을 감추고 있는 건 조금 달라진 면모다. “한 사람의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을 단정짓는 경우가 많다는 걸 <플랜맨>의 시나리오를 보며 생각했어요. 정석도 소정도 그래요. 그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계기가 있고, 그들은 사실 스스로를 바꾸고 싶어 하죠.” 한지민도 그랬던 것 같다. “오랜 시간 보여주다보면 들통날 것 같은 느낌”에 대중에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와 다른 역할을 선뜻 맡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역할로서 그 이미지를 깨보고 싶다는 갈증”도 심했다.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보다는 부딪쳐보고 싶다는 스스로와의 경쟁의 마음”으로 한지민은 소정을 받아들였다.

“나처럼 얘처럼 쟤처럼 외로운 너~ 개처럼 소처럼 닭처럼 개나 소나 외로운 너~.” <플랜맨>

소정은 그의 짝사랑을 구실 삼아 정석을 곁에 붙잡아둔다. 한지민이 <플랜맨>을 붙든 첫 번째 이유는 캐릭터였고, 두 번째 이유는 상대배우 정재영 때문이었다. 정재영이 “<플랜맨>은 신화다. 인간과 여신의 사랑 얘기를 다뤘으니까”라고 농담했을 정도로 현장 분위기 자체가 로맨틱 ‘코미디’였던 모양이다. 서글서글하기로 이름난 두 사람이 주인공인 만큼 화기애애했을 분위기는 말 안 해도 알 것 같다. 표지 촬영이 있던 날도 한지민은 “날 챙기느라 스탭들이 밥도 못 먹었다”며 스탭들의 입에 직접 간식을 넣어주곤 했다. 촬영현장에선 어땠을까. “결국 제가 편하려고 스탭들과 사이좋게 지내려는 거죠. 이번엔 과감한 캐릭터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현장 스탭들을 더 잘 챙기지 못해 미안했어요. 정재영 선배가 워낙 현장을 잘 챙겨주시기도 했고요. 보통 여배우가 현장의 꽃이라고 하잖아요. 우리 현장의 꽃은 정재영 선배였어요. (웃음)”

“나도 완전히 변할 거야. 계획 따윈 세우지 않을 거야. … 지각도 맨날 할 거야. 알람시계 부숴버릴 거야.”<개나 줘버려>

<플랜맨>의 절반을 책임지는 소정은 한지민이 지금까지 맡았던 어느 역할보다도 낯선 캐릭터였다. 착하고 귀여운 건 마찬가지지만, 소정은 거칠고 지저분하며 잘 노는 여자다. “대중 앞에서 즉흥적이고 분방한 캐릭터를 잘 맡지 않아서” 소정을 연기하는 모습이 어색해보이진 않을지 한지민은 걱정이 많다. “드라마처럼 호흡이 긴 작품에서 과감한 캐릭터를 맡기엔 자신감이 부족해” 안전한 선택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대표작인 <대장금><경성스캔들><옥탑방 왕세자> 등의 드라마에서 한지민은 대중이 그녀에게 기대할 만한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줬다. 거리에 나가 모금을 하거나 편안한 모습으로 자원봉사를 하러다니는 등의 일상도 그 이미지를 공고히 하는 데 일조했다. 반면 영화 <해부학교실>과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에선 각각 명민한 의대생 선화와 거대 상단을 지휘하는 한객주를 연기해 지금껏 쌓아온 대중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그간 드러내보이지 않았던 “욕심”과 “갈증”을 슬그머니 내보인 선택이었다. “쭉 움츠러들어 있었던 데다 연기도 그 자체로 즐길 줄 몰라 여러 시도에 겁먹을 때가 많았어요. 원래의 제 모습보다 훨씬 좋은, 단아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봐주시는 건 굉장히 감사해요. 그런데 이제 점점 욕심이 생기고, 기대를 깨고 싶다는 갈증이 생겨요.”

“반지를 왜 빼니. 전화는 왜 끄니. 문자는 왜 씹니. 핸드폰 왜 두개니. 내 이름 왜 남자니. 외박은 왜 안 돼. 유부남이~ 유부남이~.”<유부남>

자신을 ‘미친년’으로 만들어버린 상대에게 소정은 노래로 망신을 준다. 소정뿐 아니라 관객까지 통쾌해지는 순간이다. 한지민은 <플랜맨>에 삽입된 모든 노래를 직접 불렀다. 잘한다기보다 신이 난다. 고양이 분장을 한 채 춤을 추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한지민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매력적이다. “저 노래 못하게 생겼죠? 못해요. (웃음) 다행히도 소정이가 예쁘게 노래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편했어요. 공연 장면을 촬영할 땐 부끄러웠지만 눈 딱 감고 했어요.” 녹음을 위해 보컬 수업을 받고, 기타 연습을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다 했지만 정작 스튜디오에 들어가면 머릿속이 백지가 됐다. “대상이 있는 가사니까 편안하게 말하듯이 노래하라”는 뮤지의 디렉션 덕에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캐릭터를 만드는 데 성시흡 감독, 정재영과의 대화도 도움이 됐다. “처음 셋이 만나서 주인공 둘이 붙는 장면들을 얘기하는데 일곱 시간이 넘도록 시나리오의 반도 얘길 못한 거예요. 새벽이 되어서야 우리 다음 기회에 다시 얘기 나눴으면 좋겠다고 말려야 했죠. (웃음)” “진짜 플랜맨”인 성시흡 감독에게 소정을 더 세게 만들자고 제안한 것도 한지민이다. “착하기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정석이 소정의 엉뚱하고 도발적인 면에 확 끌릴 테니까요.”

“하지만 사랑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알람대로 되지 않아. 언제나 사랑은 생각대로 되지 않아. 마음대로 되지 않아.”<플랜맨>

정석과 소정은 결국 각자 감춰왔던 아픔들을 전부 꺼내놓고서야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사랑을 완성하는 데 계획 따윈 처음부터 필요 없었다. 상대를 향해 당장 내뱉을 말조차 미리 짐작하지 못했던 두 사람이니까. <플랜맨> 이후 한지민은 소정 이상으로 그녀에게서 쉽게 연상되지 않는 과감한 캐릭터를 또 한번 맡게 됐다. “도전해보지 않았던 모습이에요. 감독님이 왜 내게 이 역할을 맡기셨을까 생각해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속에서 악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좋은 작품에 폐 끼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요. 저 이제 큰일났어요. (웃음)” 2014년의 첫 <씨네21> 표지를 장식한 한지민의 한해가 더더욱 짐작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으면 좋겠다. 그녀가 우리의 기대를 어떻게 배반하게 될지 초조하게 혹은 설레며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스타일리스트 한혜연 헤어&메이크업 제니하우스 이지현, 전성희/의상협찬 산드로, 폴앤앨리스, 필립플레인, 슈대즐, 스와로브스키, 골든구스, 이로, 레그하우스, 코인코즈, 스타카토, 수엘, 하우스오브홀랜드 바이 보이플러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