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의 어느 저녁 <감자별 2013QR3>를 보면서 흐뭇해하고 있었다. 자식, 많이 컸구나. <해를 품은 달>에서 잘생긴 김수현의 아역을 맡아 왠지 마음이 갔던 여진구가 나왔던 것이다. 분명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개봉 때만 해도 꼬마였는데 잠깐 사이에 어른스러워진 걸 보며 역시 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구나 싶어, 기특하다며 같이 보던 친구와 또 한잔을 했다. 그때였다. 친구가 말했다. “여진구 엄마가 76년생인 거 알아? 그게… &*($%^*@$&%$.” 너무 충격을 받아 그 뒤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 여진구 엄마는 내 또래였던 것이다(동갑 아니다, 또.래.다. 혹시 오해할까봐).
언제부터인가 나이가 하도 많아져서 누군가 나이를 물으면 헷갈릴 지경이 되었다. 가만있어보자, 내가 3X살이었나, 3Y살이었나? 하지만 숫자와는 별개로 내가 그사이 몇년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순간이 있으니, 영화를 볼 때다. 드라마와 다르게 영화는 같은 배우를 1~2년에 한번 정도 드물게 보는 탓이다. 설마 진짜 리딕은 아니겠지 하고, 제목을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던 <리딕>을 보면서도 그랬다.
<분노의 질주>에서 처음 봤던(<라이언 일병 구하기>에도 나왔다는데 기억 못함) 빈 디젤은 정말 팽팽했다. 근육을 한올 한올 잡아 다리미로 다린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리고 몇편의 그저 그런 영화를 거쳐 오랜만에 <리딕>을 보았던 것이다. <에일리언 2020> 이후 실패만 거듭했던 시리즈를 다시 만든 근성만으로도 놀라웠는데, 잘나가는 동네 오빠 이미지였던 빈 디젤이 아저씨가 된 것도 충격이었다.
억양도 없고 감정도 없는 내레이션을 듣다가 그러잖아도 피곤했던 참에 잠들 뻔했는데 빈 디젤이 나왔다. 두근두근 기다렸던 빈 디젤, 디젤이라는 성(姓)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맹렬했던 근육의 소유자, 뼈를 탈골해서 탈출하는 장면을 직접 해치웠다는 엔진 같은 사나이. 그런 그가 아저씨가 되었다. 예쁜 여자한테 한번 하고 싶다는 식으로 쿨하게 들이대는데, 그 말투와 표정이 지하철에서 만나는 아저씨 부럽지 않았다.
오래전에 <엑시트 운즈>를 보았던 날의 충격이 되돌아왔다. 커다란 덩치로 어쩌면 저렇게 날렵하게 움직일까 불가사의했던 스티븐 시걸이었는데, 나이 48살이 되니 보통 사람이 되었다. 그 영화에서 스티븐 시걸은 땅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아주 굳건하고도 성실하게 땅에 뿌리박은 현실적인 사나이가 되어서 영화에 볼 것이 정말 없다고 투덜거렸지만, 나중에 기사를 찾아보다 후회했다. 나이 먹은 스티븐 시걸은 체중이 늘고 몸이 굳어 더이상 하체 액션을 하지 않는다고 나왔던 것이다. 그때도 나이 먹어 어쩔 수 없는 일을 비난했다며 미안했는데, 써먹은 지 40년이 되어가는 몸으로 필라테스를 하는 요즘은 더욱 미안하다. 사실은 나도 강사가 뭐라 할 때마다 속으로 중얼거린다, 다른 사람들은 젊잖아요. 빈 디젤과 스티븐 시걸을 추억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장클로드 반담의 요즘 사진을 찾아봤다. 슬펐다. 근육질의 남자들은 왜 이렇게 노화가 빠른 걸까. 먼 옛날 장 클로드 반담이 쌍둥이로 나온다며, 다시 말해 장 클로드 반담이 두배로 나온다며 흥분한 아빠에게 끌려가서 <더블반담>이라는 기괴한 영화를 봤던 추억이 아득했다.
해가 바뀔 즈음이다. 이제 하루가 지나면 나는 3X+1살이 될 것이다. 내가 처음 봤을 때 이미 늙어 있다고 생각했던, 저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쭈글쭈글했을 거라고 믿었던 아놀드 슈워제네거나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지금에 와서 그 시절 사진을 찾아보면 꽤 앳된 얼굴이었다. 세월과 함께 그들은 탄력을 잃고 주름을 얻었다. 하지만 그 밖에도 얻고 잃은 것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많은 것을 잃은 한해였다. 잃어버린 것들의 빈자리는 채울 수 없겠지만 다른 것들을 위해 새로운 자리를 만들 수는 있겠지. 사람이 가진 공간이란 그렇게 커져가는 것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