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21세기의 뱀파이어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2014-01-08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뱀파이어는 ‘영생’계의 안티 히어로다. 누군가의 피를 빨아먹으며 젊음과 생의 에너지를 유지하는 이 존재는 두렵지만 매력적이어서 영화가 가장 사랑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뉴욕 한복판에서 사무라이의 ‘도’(道)를 따르고(<고스트 독>), 마음먹는 것만으로 존재 방식을 바꿀 수 있으며(<리미트 오브 콘트롤>), 돈 후안(Don Juan)의 삶에서 탕진이 아닌 고독을 찾아냈던(<브로큰 플라워>) 짐 자무시의 손을 거친 뱀파이어는 매우 사색적이다. 뱀파이어 커플인 아담(톰 히들스턴)과 이브(틸다 스윈튼)는 각각 미국 디트로이트와 모로코 탕헤르에 살며 사랑을 나눈다. 정체불명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인 아담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고 이브는 모로코의 흥취에 흠뻑 빠져 있다. 아담이 ‘인간 좀비’들에게 염증을 느껴 무력감을 호소하자 이브는 먼 거리를 날아와 그를 위로한다. 수백년 동안 이어진 그들의 사랑에는 서양 문화사의 찬란했던 유산들이 켜켜이 스며 있다.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시체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관객에게 뱀파이어처럼 극대화된 시청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디트로이트의 황량한 밤풍경은 황폐함 가운데 숨어 있는 낯선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고 모로코의 이국적인 카페에서 들려오는 매력적인 선율은 귀를 즐겁게 한다. 21세기의 뱀파이어들은 누군가를 직접 사냥하는 수고 대신 거래를 통해 혈액을 공급받아 음용하는데 잔에 담긴 피를 넘기는 그들의 모습은 웬만한 뱀파이어물의 흡혈 장면이 선사하는 에로티즘보다 더 몽환적인 쾌락을 느끼게 한다. 뱀파이어지만 최초의 인류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아담과 이브는 인간에 대한 강한 환멸과 그들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무한의 존경이라는 복합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이 영화 속 뱀파이어들은 이전의 어떤 영화 속 뱀파이어들보다 예술애호가적이고 현학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영원한 삶이란 지식의 축적을 의미한다. 단 한번의 손길로 악기의 연식을 감식하고, 촉각과 후각으로 나무의 학명까지 읊조린다. 이것은 이 영화의 덕이자 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과 이브가 나누는 대화는 흥미롭지만 새롭지는 않으며 유머는 있지만 재밌지는 않다. 수백년의 세월 동안 사랑을 나눈 그들의 대화는 고상하지만 지루하고 삶이 묻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가 명사(名士)였거나 예술 작품의 살아 있는 모티브들이었다는 설정은 흥미롭지만 한편으론 공중누각의 ‘허세’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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