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 x cross]
[trans x cross] 나를 위로하지 마, 내가 위로할게
2014-01-13
글 : 윤혜지
사진 : 오계옥
스피커 디자이너가 된 MBC 해직기자 박성제

기자와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동시에 가질 수 있을까. 2012년 MBC 파업 중에 해직된 박성제 기자는 요즘 수제 스피커를 제작하고 있다. 고상한 취미가 아니다. 직접 만들어 판매까지 한다. 유려한 곡선 형태에 자작나무 고유의 문양이 그대로 살아 있는 ‘쿠르베(Courb′e) 스피커’는 뛰어난 기능에 비해 합리적인 가격으로 오디오 애호가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에게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하냐고 물었더니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한다. “어쨌든 기자니까 선배라고 불러주면 되지 않을까요.” 향긋한 나무 냄새로 가득한 공방을 찾아 박성제 ‘기자’를 만나 그간의 일들을 물었다. 그의 투박한 손에서 탄생한 스피커에선 내내 박력 있고 맑은 현악 선율이 흘렀다.

-뜻하지 않게 디자이너로 만나게 됐다. 해직기자임을 모르고 스피커 디자이너로 인터뷰 요청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어떤 방송사에선 명품 만드는 국내 장인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날 포함시키고 싶다고도 했다. 스피커 자체의 매력이 먹혔다는 방증이기도 하니 나쁘지 않은 현상이라고 본다. (웃음)

-2012년 6월, 김재철 MBC 전 사장에 의해 해고됐다.
=해임된 김재철 전 사장이 모 매체와 했던 인터뷰에서 사실상 나를 파업의 배후세력으로 지목한 적이 있다. 전직 전국언론노동조합(이하 노조) MBC본부 위원장이었던 나와 최승호 PD가 파업을 조종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마 그에겐 우리가 노조와의 협상 카드였을지도 모른다. 노조는 해고자가 발생하면 그들의 복직을 최우선으로 두니까.

-2013년 11월엔 이상호 기자의 해고가 위법하다는 1심 판결이 나왔다. MBC에서 해고된 다른 세 기자(박성제, 박성호, 이용마)의 해직무효소송 1심 판결은 1월10일인데.
=잘못된 해고였다는 판결이 나올 것으로 보고 있지만 회사로 돌아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YTN 같은 경우는 2009년에 해고를 당했는데 아직도 대법원 판결이 나지 않았다. 일종의 정치적 사건으로 보고 판결을 미루는 거지. 이상호 기자의 경우 회사가 항소를 했고, 경영진이 대법원까지 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고 하더라.

-19년간 일해온 직장이 망가져가는 걸 바깥에서 보고 있는 심정이 참담했겠다.
=아무렴. 지난여름께 전철을 탔는데 어떤 분이 쭈뼛쭈뼛 일어나더니 앞치마를 파시더라.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품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번듯한 직장을 다녔을 것 같은 분이었다. 동병상련이 느껴져 두장을 샀는데 계산을 하다 말고 그분이 내 손을 붙든 채 해고된 기자 아니냐면서 힘내라고 응원해줬다. 정말 놀랐다. 후배 기자들에게도 이 얘기를 해줬다. 나보다 안에 있는 후배들이 더 힘들 것 같아서다. 내가 당신들을 위로할 테니 날 위로하지 말라고 했다.

-해직 뒤 목공을 시작한 것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나.
=처음엔 그랬다. 잘린 직후부터 공방에 다니며 가구를 만들었다. 남들이 감각 있다고 해주기에 오랜 꿈이었던 스피커 만들기에도 도전했다. 내 손으로 만든 첫 번째 스피커는 ‘뉴스타파’에 기증했다. 그렇게 시험삼아 몇개를 만든 뒤 평생 쓸 스피커를 만들어보잔 생각에 이르렀다.

-스피커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이 선뜻 그러라고 하던가.
=부인도 기자였던 사람이라 내 상황을 이해해준다. 예전에 부인은 자기가 보기엔 다 똑같은 스피커를 내가 취미라면서 자주 바꿔치우니 지겨워했다. 그런데 내가 만든 건 예쁘다고 좋아하고 주변에 자랑도 한다. 아이들은 기자 아빠가 더 좋은 모양이다. 언제 복직하냐고 가끔 묻는 걸 보니.

-스피커 판매 전까지 생계는 어떻게 유지했나.
=노조가 해고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있다. 급여의 일부를 지원해주고 있고, 그 돈은 복직한 뒤에 갚으면 된다. 그 덕에 생계에 심각한 타격을 받진 않았다. 예전처럼 취재비가 따로 드는 것도 아니니 아껴쓰면 살 만하다.

-쿠르베는 인클로저가 동그란 모양에다 세개로 분리돼 있는 점이 독특하다.
=스피커 사진도 올리고, 조언도 듣곤 하는 동호회가 있다. 큰 기업에서 오랫동안 오디오 전문가로 일하신 분도 계신데 내가 스피커를 직접 만들겠다고 하니 이분이 설계자문을 돕겠다고 먼저 연락해오셨다. 디자인 수십장을 그려 보여드렸고, 그분이 음향학적으로 소리가 잘 구현될 수 있을지를 봐주셨다. 지금의 쿠르베 디자인을 보여드렸더니 어디서 베꼈냐고 하시더라. (웃음) 인클로저를 분리하면 고음, 중음, 저음이 따로 들리게 돼 각 악기의 소리가 더 선명하고 깨끗하게 들린다. 고급 스피커에만 드물게 쓰는 방식이다.

-자작나무 합판을 일일이 원통형으로 잘라 손으로 붙여 만들었다고.
=0.1mm의 오차도 없이 붙여야 하는 점이 까다롭다. 다 붙인 걸 하루 정도 눌러놓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게 굳으면 망치로 때려도 안 부서지는 단단한 나무통이 된다. 이걸 손으로 사포질한 다음 오일을 발라주고, 또 사포질, 오일을 한번 더 발라주고 광을 낸다. 기성품 스피커는 인클로저를 만들기 쉽게 네모 모양으로 대량생산하는 경우가 많은데 쿠르베는 인클로저 만드는 과정이 전체 공정의 80%다.

-갤러리 페이퍼버스에서 1월17일부터 19일까지 제품발표회도 연다.
=가볍게 내가 디자인한 스피커를 소개하는 자리다. 많이들 와서 청음도 해보고 만드는 공정도 보고 부담 없이 구경하고 갔으면 좋겠다.

-복직하면 스피커 디자인은 그만두나.
=이 일을 접지 않으려고 지금 열심히 하는 거다.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좋은 스피커란 자부심이 있으니 어떻게든 브랜드를 유지해보고 싶다. 내가 복귀하지 않을까봐 내 사업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후배도 있다. 내가 왜 안 돌아가겠냐고 달래면서도 단호하게 말한다. 사업은 망하면 안 된다고. (웃음) 운이 좋다면 노후대책이 될 수도 있지 않겠나. 나도 십년밖에 안 남았으니.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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