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당일, 명필름 심재명 대표에게서 약속 시간을 늦추자는 연락이 왔다. 바쁘기도 할 것이다. <관능의 법칙> 제작 발표회까지 있던 날이다. 1995년 창립 이래 명필름은 한해도 거르지 않고 작품을 발표해왔는데 2013년 딱 한해만 예외였다고 한다. 부진했거나 게을렀던 게 아니라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2014년에 그 결과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관능의 법칙>이 2월 개봉을 앞두고 있고 임권택 감독의 <화장>과 부지영 감독의 <카트> 촬영을 동시에 진행 중이며 명필름영화학교의 첫 신입생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도 분주하다. 이것저것 궁금하고 물어볼 것이 많은 만남이었다.
-<관능의 법칙>은 롯데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작이다.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원래 시나리오에는 갱년기를 맞은 여자의 고민이 있었다. 그게 발칙하고 신선했다. 하지만 주인공의 연령대를 50대에서 40대로 낮췄다. 그렇게 하면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나이가 좀 있는 언니들의 19금 로맨틱 코미디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출자로 권칠인 감독을 택한 건 수긍할 수 있는 선택이지만 너무 정답이라는 인상도 사실 있다.
=맞춤옷을 입은 것처럼, 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한국영화계는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번처럼 기획이 먼저 되고 그다음에 적절한 감독을 찾는 경우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런 면에서 안전한 쪽을 택했다. 권칠인 감독이 굉장히 적극적으로 나섰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캐스팅이 중요했겠다. 엄정화, 문소리, 조민수가 주연이다. 캐스팅에서의 방점은 무엇이었나.
=엄정화는 반드시 성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를 <싱글즈>의 10년 뒤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싱글즈>의 동미가 40대가 된다면 이런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했던 거다.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는 골드 미스랄까. 19금 묘사가 좀 있어서 걱정했는데 흔쾌히 승낙하더라. 그러니까 주변 여배우들도 신뢰를 갖더라. 문소리의 경우는 솔직히 그녀가 과연 할 것인가 고민했다. 전업주부인데 성적으로 솔직한 캐릭터라 거기에 맞는 대사나 상황이 많은 편이라서. 하지만 역시 흔쾌히 수락했다. 조민수의 경우는 소녀 감성이지만 얼굴에 스펙터클이 있는 배우다. 문소리는 코미디, 엄정화는 로맨스, 조민수는 드라마를 담당한다고 우리끼리는 말한다.
-<관능의 법칙>은 영화산업 표준근로계약서를 지키며 제작한 작품의 선례로 꼽히기도 한다. 실제로 촬영현장 운용에 큰 영향을 주었을 텐데.
=표준근로계약서의 내용을 정확하게 반영하게 위해서는 제작자 이하 스탭들의 프로덕션 운영 능력이 보다 탁월해야 한다는 걸 새삼 느꼈다. 예전 같으면 아침에 모여서 낮 촬영, 그거 끝나고 나면 밥 먹고 밤 촬영, 뭐 이런 식이었는데, 12시간 이상 촬영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전부 집에 가서 저녁 먹는거다. (웃음) 그게 낯선 풍경이었다. 주말 촬영 원칙 다 적용하면서 37회차에 찍었는데 권칠인 감독의 연출 협조가 매끄러웠다.
-다른 제작사들도 이행하는 추세인가.
=아직은 아닌 것 같다. 제작비가 상승하니까. 우리도 원래보다 1억4천만원 정도가 오르더라. 촬영 회차가 많은 대작영화들은 아무래도 부담이 많이 될 거다. 보다 활성화되어야겠지만 아직은 시작 단계인 것 같다.
-임권택 감독의 <화장> 제작을 맡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현역 영화인으로서, 영화계 후배로서 언젠가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프로듀싱하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상업적인 목적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 감독의 영화가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임 감독님은 사실 다른 차기작을 열심히 검토하던 중이셨다. 그런데 우리가 <화장> 원작 판권을 사고 제안을 드리면서 성사됐다. 원래 판권 계약을 맺고 있었던 허진호 감독쪽과의 계약 기간이 만료됐다고 해서 가능했다. 최근 임 감독님이 다룬 영화세계와는 결이 많이 다른 영화가 될 것 같다.
-1월1일에 촬영을 시작했다. 예상보다 조금 늦어진 걸로 아는데.
=시나리오 수정 작업에 시간이 좀 들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일주일 늦어진 거다. 시나리오는 송윤희 작가라고,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을 연출한 다큐 감독 출신이다. 우연히 다른 시나리오를 읽은 것도 있고 그리고 감독을 하기 전에 의사 출신이기도 하니 이런 이야기를 잘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암으로 죽어가는 투병 과정 같은 것들. 아마 지금까지 감독님과 같이 일한 작가들 중에서는 가장 어린 작가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마지막 각색 과정은 육상효 감독이 맡아 해줬다. 그래도 임 감독님께서 시나리오에 대해 워낙 고민을 많이 하시고 얼개나 대사에도 정성을 쏟고 하신다. 명필름 영화는 프리 프로덕션 때 확정된 시나리오가 있고 철저하게 거기 맞춰서 가는 스타일인데, 이번에는 임 감독님 스타일을 따라 현장에서 약간씩 바뀌기도 한다.
-명필름과 임권택이라는 거장과의 작업은 어떤 점에서 색다른가.
=음, 일단은… 회의 문서의 글자 크기를 아주 크게 뽑아야 하고, 회의도 영화사보다는 임 감독님 댁 거실에 가서 해야 한다는 정도? (웃음). 명필름 영화들이 기획영화이다 보니 확실히 제작사가 주도를 해왔다면 지금은 모양새가 좀 바뀐 거다. 늘 새롭고 조심스럽다. 100편이 넘는 영화를 하면서 쌓아올린 그 영화적 경륜을 지켜보는 것도 놀랍고. 대략 3월7일까지 끝낼 계획으로 찍고 있다.
-안성기, 김규리, 김호정이 캐스팅됐다.
=반드시 안성기라는 배우가 꼭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다행히도 시나리오를 보기 전에 하겠다고 말씀해주시더라. 안성기라는 배우가 마음의 결을 따라 가면서 아내와 젊은 여자 사이에서 번민하는 중년의 남자 역을 하는 건데, 그런 걸 보는 게 흔한 기회는 아닐 것 같다. 자신에게도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말씀하셨다. 김규리는 우리가 미처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부산영화제 개막 축하 공연 때 춤을 추는 걸 보고 감독님께서 깊은 인상을 받으신 것 같다. 김호정은 감독님 보시기에 지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아내의 역할에 잘 맞다고 판단하신 것 같다.
-한편 부지영 감독의 <카트>는 ‘펀딩21’을 통해 크라우드 펀딩을 공고했다. 그런데 방식이 약간 남다르다. 일정 금액에 따라 일괄적으로 보상받는 방식이 아니라, 후원자들이 선택한 특정 물품으로 보상받는 자선 바자회 방식을 도입했다.
=신선한 방식으로 신선한 호응을 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다. 1차 모금 목표액은 5천만원이었는데, 이틀 만에 60%에 육박했다. 그게 다 아이돌의 힘이다(<카트>에는 아이돌 그룹 엑소의 멤버 디오가 출연한다). 1차, 2차, 3차로 나눠서 할 계획이다. 2차는 크랭크업할 즈음, 3차는 개봉 4주 전쯤. 그렇게 해서 1억5천만원 정도를 목표로 한다. 전체 예산에 비춰보면 큰 부분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제 측면에서 볼 때 상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소나마 제작 리스크를 낮추는 것도 중요하고.
-<카트>는 1월11일 촬영을 시작했다.
=50회차 남짓 찍고 3월 말에 크랭크업 예상이다. 무엇보다 대형 마트를 찾아내는 게 어려웠다. 기존의 마트를 빌리는 것도 어려웠고. 고민 끝에 화성 동탄에 있는 700평 규모의 공장을 빌려서 대형 오픈 세트를 만들었다. 촬영은 그 내외부에서 거의 이뤄진다.
-이른바 충무로영화가 해고 여성노동자와 점거 농성을 그리는 일은 없었거나 희귀한 일이다.
=독립영화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주류영화에서, 그것도 상업적인 파워가 있는 배우들이 출연하여 평균 이상의 예산으로 시도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그래서 위험한 시도이고 도전이지만 가치도 있다. 개인적으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많이 떠올렸고 용기를 얻었던 것 같다. 대형 마트에서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이 불법 점거라고 비난당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이야기를 보편적이고 대중적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게 영화의 사회적 순기능이 아닐까 싶었던 거다. 특히 비정규직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의미 있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유명 여배우들이 마트 직원 유니폼을 입고 다니니까 보기에 좀 신기하기는 하더라.
-명필름영화학교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사실 편하게 영화만 제작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부담을 떠안고 학교를 설립했다. 어떤 취지인가.
=명필름의 지금이 이은과 심재명의 노력만으로 된 건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다. 스탭의 헌신과 공유로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니 영화 제작에 연연하는 것을 넘어서 같이 나누자는 생각이 들었다. 성과를 공유하자는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다보니 명필름문화재단을 만들었고 후학을 양성하자는 생각에 이른 거다. 명필름영화학교를 통해서 좋은 장편 데뷔작을 만드는 젊은 감독들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한국에서는 기업이 문화재단을 만드는 경우는 있지만 영화인들이 손수 교육재단을 만드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외국에는 그런 사례들이 얼마든지 있지 않나. 공익적 측면에서 좋은 취지의 노력들을 하자는 것이다. 이은 대표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있었던 생각이고 나도 동의했고 2012년 말부터 구체적으로 움직였다.
-영화학교가 없진 않다. 어떤 차별점을 염두에 두고 있나.
=현장성을 중시할 거다. 교수진에 나선 분들의 면면을 보아도 그렇다. 살아 있는 영화교육 현장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명필름 영화정신을 배우는 장이 되면 더 좋겠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영화장인들의 노하우를 일대일로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무상기숙학교가 있다는 것도 차별점이다. 모든 걸 완벽하게 전액 무상으로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장편영화 제작 전액을 지원받을 수 있는 것도 유일무이할 거다. 2년 과정인데, 연출부문은 입학 자격이 장편 시나리오다. 극영화 2명, 다큐멘터리 1명이다. 나머지 연기 2명, 제작, 미술, 촬영, 편집, 사운드는 1명씩. 그렇게 해서 매해 총 10명이다. 첫 1년은 4쿼터의 정규수업, 그러니까 워크숍이고 나머지 1년은 졸업작품 실질 제작이다. 그렇게 해서 입학 당시 시나리오와 계획서로 두편의 장편영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매해 만드는 거다. 물론 기성 스탭들이 따라붙게 될 거다. 해당 작품의 예산 상한선이나 하한선은 없다. 시나리오에 따라 1억, 2억원짜리도 있겠지만 몇 십억원짜리도 나올 수 있다는 거다.
-많은 사람들이 눈독을 들일 만한 조건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파수꾼>이나 <무산일기>같이 영화정신이 살아 있는 빛나는 데뷔작이 나왔으면 좋겠다.
-입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당부의 말이 있다면.
=올해 3월에 입학 설명회를 시작으로 후반기에 1, 2차 전형을 거치게 될 것이고 2015년부터 교육에 들어간다. 포트폴리오를 얼마나 잘 준비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특히 연출 분야는 패기와 주제의식이 살아 있으면 좋겠다. 영화를 기술적으로 잘 만드는 사람보다는 의식과 영혼이 있으면서 창의력도 있는 영화인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게 명필름이 그동안 해왔던 것들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싶다.
다 듣고 보니 안이한 프로젝트가 하나도 없다. 임권택이라는 위대한 한국영화 감독과의 협업은 누구라도 그게 가치 있다는 걸 알지만 그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한 일이었다. 40대 여성들의 로맨틱 코미디나 해고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 또한 모험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명필름영화학교 추진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심 대표에게 올해의 다짐을 물었는데 그 대답이 흥미진진하다. “지금 하고 있는 영화들을 보면 여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나이 들어가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먹고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죽는 문제까지도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세편의 영화가 전부 명필름의 영화적 색깔이 반영되는 영화다. 세편 다 만만치 않을 거라는 예감은 든다. <관능의 법칙>과 <카트>조차 서로 다르고 <화장>은 물론이고. 영화학교도 그렇고. 그 일들이 거둘 결과를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적으로 많은 감동과 긴장이 있는 그런 해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