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일본 최고의 ‘에로, 그로, 난센스’ 작가 쿠로사키(오스기 렌)는 작품의 영감을 얻기 위해 여성을 데려다 집에서 실험을 하고는 이를 소설에 적용한다. 그의 아름답고 정숙한 아내 시즈코(호시 요코)는 남편을 타락한 변태로 취급하며 각방 생활을 고집한다. 아내는 점점 밖으로 나돌며 영어회화 강사나 쿠로사키의 젊은 조수와 만나기 시작한다.
작가 남편에겐 ‘관능소설’이야말로 자신의 유일한 세계다. 하지만 실제 실험이나 관음적 자극 없이는 좀처럼 소설이 진전되지 않는다. 영화에서 작가 남편이 상상력의 고갈 상태에 처한 상황은 아내와의 부부생활에서 관능이 사라진 상황과 유사하다. 한편 아내는 남편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스스로 남편의 실험대상이 되어 불륜을 자행한다. 조수 카와다는 스승 아내와의 밀회에서 경험한 사도-마조히즘적 관계를 세세하게 전달하고, 이에 자극받은 남편은 새로운 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한다. 아내와 무기력한 관계에 빠진 작가가 제자를 통해 아내의 성적 취향을 학습하며 창작의 불모성을 돌파해가는 셈이다.
영화 <SM작가>는 단 오니로쿠의 원작 <부정의 계절>을 핑크영화의 대부 히로키 류이치가 연출한 작품이다. 2011년 타계한 일본 관능소설의 대가 단 오니로쿠는 200여편의 관능소설을 펴냈으며, 인기작 <꽃과 뱀>은 수차례 영화화되기도 했다. 한편 최근에는 순정멜로나 성장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본래 핑크영화의 거장이자 <바이브레이터> <바쿠시, SM 로프마스터>의 감독인 히로키 류이치는 특유의 관능적이고도 고요한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 SM을 소재로 삼았으나 예상보다 불편하지 않으며 오히려 분위기가 그윽하고 소슬하기까지 하다. 감독은 쿠로사키의 창작 공간인 멋진 고택과 아내 시즈코의 탈주 공간인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애처로운 유머가 섞인 성찰적 핑크영화를 선보인다. 삶의 불모성, 정서적 궁핍, 고독한 관계들에 대한 응시가 통제된 연출을 통해 잘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