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1946)는 ‘리타 헤이워스의 모든 것’이다. 오직 헤이워스에 초점을 맞춰 만든 작품이기도 하고, 또 마치 헤이워스의 실제 삶을 암시하듯 비밀스런 과거에, 강박적인 관계의 현재, 그리고 모호한 미래가 섞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헤이워스는 당시 ‘천재 청년’ 오슨 웰스의 아내였는데, 막 딸을 출산한 뒤 2년여의 공백을 깨고 <길다>에 출연했다. 말하자면 스크린으로의 복귀를 알리는 작품이었다. <길다>는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여신이 돌아왔다’는 뉴스들이 경쟁하듯 나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불과 28살이었던 그때가 삶의 절정이었고, 이후로는 팜므파탈의 운명을 보듯 탄식과 불안이 교차하는 복잡한 순간들이 이어졌다. ‘길다’라는 캐릭터와 헤이워스의 운명이 겹쳐 보이는 것이다.
<길다>, 관능의 정점
1943년 오슨 웰스와의 시끌벅적한 결혼은 천재와 미녀의 찬란한 결합으로 보였다. <시민 케인>(1941)과 <위대한 앰버슨가>(1942) 같은 걸작을 이미 발표한 청년은 28살이었고, 당시 최고의 핀업 걸이던 헤이워스는 25살이었다. 영화사에 명감독과 스타배우의 결합은 종종 있었지만, 결혼 당시 부부가 20대이고, 이미 스타의 위치에 있었던 경우는 매우 드물다. 천재 연출가를 남편으로 둔 헤이워스의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 말 그대로 이들의 미래는 스릴러처럼 호기심을 자극했다.
배우로서의 헤이워스의 성공은 프레드 아스테어를 만나며 시작된다. 어릴 때부터 익힌 춤솜씨 덕분에 뮤지컬의 코러스 걸로 가끔 출연하던 헤이워스는 1941년 루벤 마물리언 감독의 고전 <혈과 사>에서 조연 댄서로 나오며 영화계의 주목을 끌었다. 이때의 춤 실력으로 헤이워스는 당시 최고의 뮤지컬 스타였던 아스테어의 파트너가 된다. 그가 뮤지컬 콤비였던 진저 로저스와 막 결별한 뒤, 새로운 파트너를 찾을 때였다. <당신은 부자가 될 수 없어>(1941), <당신은 이렇게 사랑스런 적이 없어>(1942) 등 두 히트작에 연이어 아스테어의 파트너로 출연하며, 헤이워스는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던 뮤지컬영화의 스타가 된다.
아스테어 옆의 헤이워스는 건강한 젊음이 넘치는 신성이었다. 힘이 넘치는 발동작, 동시에 가볍고 우아한 몸동작, 그리고 한번씩 쓸어넘기는 긴 머리칼은 관능의 표상이었다. 전쟁 중에 미군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배우는 단연 헤이워스였다. 하지만 그런 대중성과는 좀 거리가 느껴지는 ‘괴짜’ 감독의 아내가 됐으니, 헤이워스가 너무 급격한 변화를 겪지는 않을지 염려가 되기도 했다.
할리우드의 장인 찰스 비더가 연출한 <길다>는 헤이워스에 대한 이런 염려를 불식시킨 작품이다. 아니 헤이워스의 대중적 관능미를 최대한 이용했다. <카사블랑카>(1942)처럼 이국 정서를 이용한 <길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전개된다. 길다는 이 지역의 불법 카지노 클럽의 주인인 재벌 남자의 아내다. 궁전 같은 집에서 모피를 휘감고 살고 있는데, 늘 외로워 보인다. 길다는 과거 뉴욕에서 댄서로 일했고, 지금 남편과는 사실 돈 때문에 결혼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남편이 새로 고용한 카지노 지배인을 집으로 데려오며 드라마는 점점 ‘어두워’ 진다. 조니(글렌 포드)라는 그 남자는 하필이면 길다의 과거 애인이었다. <길다>는 이 세 인물의 사랑, 질투, 그리고 범죄에 관련된 전형적인 누아르이다.
남미 특유의 라틴음악은 헤이워스의 관능미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는데, 이를테면 검정색 드레스에 검정색 팔 장갑을 끼고, 마치 스트립을 하듯 춤을 추는 <모두 메임 탓으로 돌려요>(Put the Blame on Mame)는 헤이워스를 페티시의 화신으로 기억하게 했다.
짧지만 긴 영광
길다가 화면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얼마나 유명한지, 이를테면 <쇼생크 탈출>(1994)에서 죄수들이 영화를 보며 괴성을 지르는 순간이기도 하다. 남편이 그 지배인을 침실로 데려가 아내를 부르며, “길다, 제대로 입었어?”(Are you decent?)라고 묻자, 탈의실 뒤에서 머리칼을 뒤로 젖히고, “네, 제대로 입었어요”(I am decent)라며 나타나는 순간이다. 이는 중의적인 질문인데, 옷차림이 제대로 됐냐는 뜻이기도 하고, 또 ‘당신 바른 사람이냐’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이 순간에 관객은 그녀가 절대 바른(decent) 여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까지 말이다.
‘제대로’(decent)라는 말은 헤이워스와는 무척 거리가 먼 단어이다. 그녀는 다섯번 결혼했는데, 어느 것 하나 세속적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경우는 없었다. 첫 남편은 아버지뻘 되는 할리우드의 프로모터였는데, 그 덕분에 배우는 됐지만 운 없는 신인에게 상상되는 안 좋은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다. 오슨 웰스가 두 번째 남편인데, 그때 헤이워스는 자연스럽지 않은 관계에 구속된 인형처럼 비쳤다. <길다>에서 그녀가 지금의 남편에게서 ‘빠져나오고 싶다’라고 말할 때 많은 관객은 웰스와의 관계를 떠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약 5년간 이어졌던 웰스와의 결혼 시기가 배우 헤이워스의 전성기였다. 이때 그녀의 두 대표작, 곧 <길다>와 웰스 연출의 <상하이에서 온 여인>(1947)이 발표된다.
<상하이에서 온 여인>은 시네필들에겐 걸작이지만 헤이워스의 팬들에겐 저주였다. 짧은 금발로 바뀐 외모, 남편과 연인을 배신하는 이기적 팜므파탈은 흠모는커녕 미움의 대상이 됐다. 남성 판타지의 대상으로 인기를 얻은 스타배우가 천재를 만나 ‘억지로’ 이미지 변신에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비치기도 했다. 흥행은 실패했고, 헤이워스는 ‘도저히 천재의 요구에 맞출 수 없다’는 말을 남기며 웰스와 이혼했다.
헤이워스는 찰스 비더 감독과 글렌 포드와 다시 3인조를 만든 뒤, ‘길다’의 이미지로 돌아가서 <카르멘의 연인들>(1948)에 출연했다. 곧이어 역시 글렌 포드와 공연한 필름누아르 <트리니다드의 정사>(1952)로 헤이워스는 대중적 인기를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 두 작품 모두 <길다>의 이미지를 반복하는 것인데, 특히 인상적인 춤 장면은 빠지지 않고 써먹었다. 그러나 두번의 반복까지는 관객도 좋아했지만, 그 이상으로 관심이 이어지진 않았다. 사실상 여기서 헤이워스의 스타로서의 삶은 끝난다. 게다가 이후의 세번의 결혼생활도 전부 불행의 연속이었다.
헤이워스는 <길다>를 통해 스타덤에 올랐고, 그 이미지를 수차례 반복하며 정상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영화사는 서른살 이전에 두편의 걸작을 남긴 대표적인 여배우로 헤이워스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세속적인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지만, 스크린에서만큼은 헤이워스보다 더 젊게 빛나는 별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