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이세영] 초지일관 2라운드
2014-02-11
글 : 이화정
사진 : 최성열
이세영

<아홉살 인생>과 <열세살, 수아>의 소녀를 거쳐 이세영이 아주 오랜만에 <피끓는 청춘>으로 돌아왔다. 활동을 쉬는 동안 그저 평범한 또래의 삶을 경험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지내서였을까. 웃음이 많고 털털하고, 질문을 하면 주저하지 않고 속내를 털어놓는 모습이 예쁘다. 새침한 소녀의 이미지를 지우는 동안 이세영은 어느새 어른이 됐다.

1982년을 배경으로 한 농촌 고교생들의 연애 성장담인 <피끓는 청춘>에서 그녀는 바람둥이 소년 중길(이종석)을 첫눈에 사로잡은 전학생 소희를 연기한다. 얼핏 이세영의 대표작인 <아홉살 인생>의 우림이 떠오른다. 서울에서 전학 온 우림은 산골 소년 여민의 마음을 단박에 뒤흔들었더랬다. <피끓는 청춘>의 소희는 여전히 ‘서울서 온 예쁜 전학생 소녀’지만 사각관계에 변화를 선사하는 흥미로운 반전 캐릭터다. 양 갈래로 곱게 땋은 머리, 아놀드 파마 로고가 새겨진 새하얀 양말, 값비싼 CD 플레이어같이, 세련되고 예쁜 소희를 규정해줄 단정한 소품들로 치장한 소녀는 알고 보면 파우치에 몰래 담배를 숨겨 다니고 욕설과 폭력도 서슴지 않아 서울 학교에서도 쫓겨난 채 고향으로 내려온 꼴통 문제아다.

겉과 속이 다른 소희는 전에 봤던 새침한 캐릭터의 이세영에게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색다른 모습이다. 같은 이미지의 반복이었다면 이세영 역시 선뜻 이 작품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제안을 받고 ‘또 전학생이야?’ 하는 마음이 들어서 처음엔 아니다 싶었는데 시나리오를 보니 소희는 다르더라. 이건 해야겠다 싶어서 바로 결정했다. 소희를 연기하면서 도도하다, 새침하다 이런 전형적 이미지 대신 남들에게 무관심하고 자기 할 일만 하는 좀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려고 애썼다.” 흥행이 저조한 데 대한 아쉬움이 없진 않다. “<겨울왕국>이 이렇게 셀 줄 몰랐다. <피끓는 청춘>이 아직 상영 중이니 안 보고 있다. (웃음)”는 귀여운 대답을 내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배우들과 함께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세영에게 <피끓는 청춘>은 각별한 작품이다. 활동을 꾸준히 하던 2000년대 초/중반 당시 영화계에서 이세영에 대한 평가는 꽤 좋았다. <여선생 VS 여제자>에서는 성인 연기자 염정아의 성숙한 연기에 밀리지 않고 하모니를 이루는 신통한 아역배우였고, <아홉살 인생>에서는 같이 출연한 많은 아역배우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당찬 배우였다. 아역배우라고 해도, 나이에 비해 조숙한 분위기와 능숙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이세영은 나름의 확고한 지점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돌연 그녀는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사이 실력 있는 아역배우들은 많아졌고, 아이돌이라는 후광을 지닌 신인배우들도 대거 등장했다. 뉴페이스들의 끊임없는 등장에 이세영은 어떤 배우보다도 빠르게 잊혀졌다.

<피끓는 청춘>은 그렇게 사라지고, 또 잊혀졌던 이세영의 복귀작이자 신고식 같은 작품이다. 그사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무서운 이야기2>에 카메오로 잠깐 출연했고, 드라마와 단막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한동안 쉬었던 연기의 감을 찾기 위한 워밍업이었다. <열세살, 수아>를 찍던 당시 나이가 16살. 낯가림 심하던 이세영은 이제 영상미디어를 전공하는 22살의 대학생이 되었다. “어릴 때 현장 가면 언니, 오빠들과 떠들 수 있어서 좋았는데 이번 촬영을 하면서는 ‘나도 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으로 ‘프로’의 세계로 접어든 기분이었다. 예전엔 실수해도 다들 어리니까 넘어가줬는데 이제는 나 스스로 책임감이 생기더라.” 오랜만의 영화 현장에서 그녀가 가장 크게 절감한 건 스탭들에 대한 고마움이었다고 한다. “십년 전 현장에서 함께했던 분들이 이젠 다들 나이가 들었다. 붐대 들었던 오빠가 오디오 감독님이 되었더라. (웃음) 내가 이분들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감사하고 재밌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동안 그녀가 현장을 떠났던 이유는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송만 하다가 영화를 하게 된 계기도 드라마 <대장금>에서 굳어진 아역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영화를 선택한 이후에도 계속 아역 연기만 들어오니 내 딴에는 맘이 좋질 않았다. 평생 연기할 거니 좀 쉬고 어른이 돼서 해야지 한 거다.” 어린 나이에 현장의 고된 일정 때문에 키가 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 밑도 끝도 없는 구설도 힘들었다. “주목받는 직업이지만 그만큼 질투를 감당해야 했다. 매니저도 밴도 없는데 내가 학교에 매니저를 대동하고 밴을 타고 왔다는 소문이 퍼지고, 제일 친한 친구가 알고 보니 내 안티카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했다. 중학생 때는 왕따도 당했다. 상대방의 잘못도 있겠지만 내가 원인 제공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반성도 들더라.”

4살 때 엄마 따라 MBC의 <뽀뽀뽀> 활동을 시작으로 줄곧 일만 하며 살아온 그녀에게 자연스러운 인간 이세영을 되찾을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연기를 쉬는 동안은 철저하게 평범한 고등학생이 되었다. 노량진 입시학원에도 등록하고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는 수험생활도 견뎠다. 남들 다 가는 학교 매점에도 가봤고 종 치기 전에 친구들과 뛰어다니기도 했다. 대학에 가서는 과외를 비롯한 각종 아르바이트도 하고 배낭여행도 하면서 또래가 할 법한 평범한 생활에 젖어들었다. 물론 그사이 연기에 대한 갈증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한창 연달아 작업을 했을 때라 쉬는데도 들어오는 작품들이 꽤 많았다. (웃음) 처음엔 작품이 계속 들어오니 불안감을 못느꼈는데 안 한 작품 중에 아쉬운 것도, 내가 하면 더 잘했을 것 같은 욕심도 생기더라. 가끔 현장에서 일하는 꿈도 꾸고 그랬다. 내가 좀 낙천적인 편이라서 지금은 ‘다시 하면 되지’ 이런 마음이다. (웃음)”

이세영은 내년이면 벌써 햇수로 연기 20년차 배우다. 결국 그간의 휴지기는 배우 이세영으로 온전히 서기 위한, 자신을 더 많이 각인시키기 위한 극단의 조치였다. 그동안 항상 혼자 작품 고르고 알음알음으로 감독님 만나고 그랬던 것과 달리 이제는 소속사도 생겼다. “회사에 들어가서인지 모르지만 요즘은 전과 달리 보이시한 작품도 들어오고 대작 출연 제의도 있다. <피끓는 청춘>에서의 다소 냉소적인 모습도 분명 이런 변화 중 하나인 것 같다. 회사에서는 내 의견을 많이 물어보시는데, 당분간은 회사의 제안도 받아들여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다.” 인터뷰 할 때마다 “대비마마 역할까지 하고 싶다”고 평생 배우의 꿈을 다지던 아역배우 이세영은 이제 본격적인 연기활동 2라운드에 돌입했다. “이 세계에선 잘되는 것도 한순간, 추락하는 것도 한순간이다. 굴곡이 있는 곳이다. 나도 그런 풍파를 겪을 수 있겠지만, 그런 날이 오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연기하고 싶다. 우리집 가훈이 ‘초지일관’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연기에 대한 애정을 가진 배우로 오랫동안 남고 싶다.”

<열세살, 수아>

magic hour

사랑스러운 평범함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똑 떨어지는 미녀다. <열세살, 수아>는 그전까지 예쁜 얼굴을 무기 삼았던 이세영이 일대변신을 감행한 작품이었다. 아빠를 잃고 엄마와 살고 있는 수아는 진짜 엄마를 찾겠다며 집을 나가게 되고 아픈 성장통을 겪는다. 당시 16살이었던 이세영은 13살 수아를 연기하면서 화려한 외모도 새침한 캐릭터도 모두 내려놓은 맨 얼굴로 작품에 임했다. 앞머리를 자르고 촌스러운 안경을 끼고 일부러 살을 찌우고 그것도 모자라 펑퍼짐하게 바지를 껴입고 그 위에 치마를 입어 몸의 굴곡을 죽였다. 어쩌면 그녀에겐 가장 어려웠을 ‘평범함’이라는 변신을 통해 배우 이세영도 그렇게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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