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의 정중앙을 차지하는 꽃꽂이처럼, 영화에도 종종 센터피스 구실을 하는 장면이 있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의 오스카(마이클 B. 조던)는 집행유예 중인 청년이다. 너무 늦기 전에 좋은 아빠와 파트너, 아들이 되고 싶어 안달하지만, 남아 있는 나쁜 습관과 사회의 선입견 탓에 진전은 더디다. 영화가 담은 그의 힘든 하루 중 오스카는 길 잃은 온순한 개가 뺑소니 사고를 당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가해자는 자취를 감추고 결백한 피만 아스팔트를 적신다. 죽은 개에게 감정을 이입한 오스카가 가족사진을 응시하는 동안, 지금까지 중립적 기록자의 자세를 유지하던 영화는 잠시 숨을 죽이고 속도를 늦춤으로써 무언의 해석을 개입시킨다. 감독이 보는 인물의 DNA가 축약된 시퀀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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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집을 떠나 독립한 10여년 전 겨울, 나는 좁은 원룸에 입주할 책을 엄선하느라 책장 앞에서 고심을 거듭했다. ‘안데르센 동화전집’ 10권 중에서는 <주석병정>이 수록된 7권과 <눈의 여왕>이 실린 9권이 ‘결선’에 올랐는데 이삿짐에 들어간 최종 우승자는 9권이었다. <눈의 여왕>이 원작인 데다가 앞서 개봉한 나라에서 호평까지 들려오는 <겨울왕국>을 맞이하는 나의 자세는 “입가엔 미소, 두팔은 활짝”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겨울왕국>은 악마가 만든 거울조각이 심장에 박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소년 카이를 소녀 겔다가 천신만고 끝에 구원하는 <눈의 여왕>의 여정을, 자매가 서로를 구하는 이야기로 변용했다. 이 지점에서 <겨울왕국>은 포스트 페미니즘 시대에 태어난 부모 세대와 그들의 어린 딸들이 흔쾌히 받아들일 만한 두개의 서사적 포인트를 취하는데 하나는 멋진 남자와 짝짓기에 성공하는 것이 여주인공의 최우선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고 두 번째는 ‘진정한 사랑의 행위’(act of true love)란 사랑- 왕자의 입맞춤- 을 받는 행운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노력이라는 해석이다. 물론 현모양처 레이디 유형을 벗어난 활달한 여성주인공이 디즈니 장편애니메이션을 지배한 지는 20년도 넘었지만 기존의 현대적 디즈니 히로인들이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는 대신 남자를 위기에서 구하고 입맞춤을 주도하는 식으로 주체성을 입증했다면 <겨울왕국>의 안나(크리스틴 벨)와 엘사(이디나 멘젤)는 로맨스의 성사라는 범주 바깥에서 사랑의 대상을 찾고 행동력을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엘사는 디즈니 왕조에서는 드물게도 공주라는 이름이 드레스를 입고 성에 산다는 사실 이상을 의미하는, 실제로 통치의 업무도 보는 로열 패밀리이기도 하다.
아무튼 <겨울왕국>은 또 한편의 공주 이야기다(원작 소설의 겔다는 평민 소녀였지만 애니메이션은 겔다와 악역 ‘눈의 여왕’을 합친 다음 나눠 자매 공주로 변형했다). 지난해부터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이 영화가 구가한 성공은 “공주는 여전히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유효하고 강력한 브랜드”임을 확인시킨다. 즉, <겨울왕국>은 10대 초반 소녀들을 중심에 포함한 오늘날 관객이 가장 원하는 공주의 구체적 모습을 적중시켰다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이는 영화를 여는 노동요 합창 중 얼음을 묘사하는 “아름답고 강하고 위험하고 차가운”(beautiful, powerful, dangerous, cold)이라는 가사에 얼추 요약돼 있다. 엘사와 안나는 혈통이 준 권력과 후천적 행동력이 있고 간혹 치명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쁘다. 자매 공주의 미모는 철저히 주류적인 아름다움의 이상을 따른다. 같은 빨강머리 말괄량이 공주라 해도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메리다와 <겨울왕국>의 안나는 개성과 백인여성의 이상적 미를 배합한 비율이 완전히 다르다. 엘사와 안나의 몸은 비욘세의 실루엣을 200% 과장한 형상이고 눈 크기는 ‘왕눈’으로 유명한 재패니메이션의 그것에 육박한다. 달리 말해 둘은 ‘연예인처럼’ 예쁘다. 언니 엘사의 보랏빛 펄 아이섀도는 무대 화장을 방불케 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한때 진한 화장은 백설공주의 못된 계모나 동물학대자 크루엘라의 몫이었지만 지금 소녀들은 화려한 메이크업이나 마녀- 엘사는 일종의 마녀다- 라는 호칭을 꺼리지 않는다. 아니, 동경한다. 아름답기 위해 착해 보일 필요는 없어졌다.
TV에 나오는 스타를 닮은 공주. 다이아몬드 광채를 내는 드레스로 갈아입은 엘사가 척척 얼음 궁전을 창조하는 광경의 부감 숏에서 나는 그래미 시상식에서 손수 무대를 짓는 디바의 판타지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잠깐 딴소리를 하자면 내가 제일 동요한 장면은 많은 동료 관객과 마찬가지로 엘사가 설원을 달리며 추방의 고난을 해방의 위풍당당한 행진으로 바꿔놓는 <Let it go>를 부르는 대목이었는데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점은 이 장쾌한 팝 발라드의 감흥보다 이 신을 소화하는 엘사의 연기 양식이었다. 그녀의 손동작과 표정 연출은 감정 연기의 일환이라기보다 쇼 무대에 선 솔로 가수의 매너로 보였다. 수많은 디즈니의 뮤지컬애니메이션을 보았지만 예전엔 없던 체험이었다. <겨울왕국>은 향후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가공될 잠재력을 탑재한 애니메이션을 넘어 이미 자체 문법에 브로드웨이 쇼를 내장했다는 인상이다.
몸소 전투를 감당한 <뮬란>의 아시아 평민 소녀와 레스토랑 개업을 꿈꾸는 <공주와 개구리>의 아프리카계 웨이트리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절대 펴지지 않는 고수머리와 통통한 뺨을 가진 명궁사를 제쳐두고 엘사와 안나에게 가장 능동적이고 흥미로운 디즈니 여주인공의 작위를 준다면 불공평하다(<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디즈니 합병 뒤 픽사 작품이지만 픽사 역시 여성 인물 만들기에는 전통적으로 취약하다). 주인공에서 시야를 넓혀보면 <겨울왕국>은 이렇다 할 여성 조연이 전무한 영화이기도 하다. <겨울왕국>은 다만 공주 캐릭터에 관한 한 우주 최고의 연구기관인 디즈니가, 변화한 성 역할과 트렌드에 적응하면서도 주류 시장이 받아들일 만한 요소와 저항이 있는 요소를 저울질해 제출한 답이다. 뭐랄까, 눈은 머리보다 훨씬 보수적이라는 교훈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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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겨울왕국>은 흠잡을 데가 없는 동시에 붙잡을 데도 없는 영화다. 캐릭터, 유머, 메시지, 음악, 애니메이션 등 모든 부문이 고르게 훌륭해 평균점은 높지만 10년 뒤에 다시 꺼내보고 싶을지는 의문이다. 경험상 반복해서 다시 방문하게 되는 영화는 매혹적이되 고르지 않은 영화들이다. 대체 왜 훌륭하다고 느꼈는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니 자꾸 근질근질 들춰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예컨대 <겨울왕국>에 비해 결코 ‘진보적’이라 할 수 없는 <인어공주>를 나는 극장에서 네번, 다른 형태로는 수없이 봤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영화를 보았는지도 중요한 변수다. 친구의 열두살 먹은 딸은 <겨울왕국>을 아마도 나와는 아주 다르게 간직할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영화의 객석에 앉을 때 깔고 앉는 보이지 않는 쿠션은 여태 보고 듣고 체험한 영화들의 부피다. <겨울왕국>은 시간의 시험을 통과한 성공적 공식들의 깔끔한 종합이다. 타인과 접촉을 피하고 장갑으로 초능력을 봉인해야 하는 엘사의 비애는 <엑스맨> 시리즈의 로그(안나 파킨)를 통해 맛본 기억이 있다. 그러고 보면 얼음조각이 심장에 박힌 뒤 희게 물드는 안나의 머리칼도 로그의 증세와 일치한다. 동생을 다치게 한 트라우마는 <레인맨>의 더스틴 호프먼의 고백을 빌려 관객을 울린 바 있다. 그리고 단연 사랑스럽게 디자인된 눈사람 올라프. 목이 잘려도 헤헤거리는 피학 성향의 조연이며 간간이 놀랍도록 현명한 주석가 역할도 병행하는 그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집 요정 도비와 <오즈의 마법사>의 허수아비를 한몸- 엄밀히 말해 여럿으로 분리되는 몸- 에 가졌다. 한편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일곱 조연을 조상으로 둔 게 분명한 유쾌한 트롤 무리는 <슈퍼배드> 시리즈 미니언 일당의 라이벌이 분명하다. 순록 스벤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말(馬)의 전통을 충실히 이어받아 반려견의 행태를 보이며 산을 등지고 물을 면한 아렌델은 <반지의 제왕>과 <호빗>의 엘프 주거지 리벤델과 자매 결연을 맺어주고 싶어지는 풍광을 자랑한다. 이것은 나의 명세서일 뿐 다른 연륜 있는 관객은 <엑스맨>과 <레인맨>을 보며 그들이 인용한 원전 영화를 그리워할 것이다. 이쯤 듣고 나면 친구의 상냥한 어린 딸은 ‘영화 많이 보는 이모’를 가엾게 여기며 손을 내밀지도 모르겠다. “눈사람이나 만들래요?”라며.
“나는 남들이 보아주기에 존재한다”는 믿음이 단연 우세한 시대에 젬 코헨 감독의 <뮤지엄 아워스>는 내가 보는 행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영화다. 이 에세이 필름을 보고 나서, 콘서트 무대 위의 뮤지션이 아니라 그것을 듣고 보는 청중의 초상을 찍은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을 다시 꺼내 보았다. 액션 없는 열개의 리액션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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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멕 라이언이 알코올중독으로 고통받는 여성으로 연기 변신을 꾀한 <남자가 사랑할 때>(When a Man Loves a Woman)라는 멜로영화가 있었다. 한국 개봉 당시 이 영화의 수입사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라는 온전한 번역 제목을 1년 먼저 개봉한 엉뚱한 원제의 다른 영화- 제니퍼 챔버스 린치 감독의 <Boxing Helena>다- 가 선점해버렸다고 아쉬워했다. 어느 쪽 영화건 기억하는 관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마당에 혼동의 우려야 없을 테지만, 한동욱 감독의 신작 <남자가 사랑할 때>의 제목을 들었을 때 귀에 감기는 작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지금은, 내용을 그보다 단도직입적으로 예고할 수 없는 정직한 제목이라고 여기게 됐다. <남자가 사랑할 때>는 그야말로 통념적으로 ‘남자다운 남자’가 ‘싸랑’할 때- 사나이에게 오직 한번뿐인 진실한 연애, 그래서 어떤 장애에도 불구하고 이뤄져야 하는 사랑을 뜻하고 싶은데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경음으로 표기했다- 일어날 법한 사건들을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순서로 우직하게 두루마리를 펼쳐 보인다. 나쁜 일을 하는 선한 남자가 사랑을 계기로 나쁜 일을 하지 않는 선한 남자로 거듭나려고 하지만 발목을 잡는 불운이 겹치면서 피와 눈물을 보게 된다는 친숙한 공식의 이야기다. 한국 대중영화에서 ‘남자다운 남자’ 캐릭터는 많은 경우, 물리적 폭력이 일상의 자연스런 일부로 용인돼 있는 폭력조직원이나 경찰인데 <남자가 사랑할 때>의 태일(황정민)은 고리대금업체의 수금 담당으로 전자에 가깝다. 이 영화가 이용하는 무형의 자산은 황정민 배우가 쌓아온 카탈로그로, 태일은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신세계> <행복> <너는 내 운명>을 비롯한 이 배우가 연기해 온 남자들의 개성- 물불 가리지 않는 집념, 무책임함, 순정- 을 뭉뚱그려 전유한다. 하지만 전형적인 서사와 관객에게 충분히 각인된 배우 이미지를 조합했다는 전제는 뒤집어 말하면, 안전하게 관객에게 접근한 다음 독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각본과 연출이 반드시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테면 승부의 지점은 누구를 사랑하는지, 왜 사랑하는지, 어떻게 사랑하는지에서 발굴될 수 있을 터다. 사랑할 만한 여자를 사랑한다거나, 죽도록 사랑한다 정도의 대답으로는 부족하다. 영화 관객이란 원체 변덕스러워서 아무리 무난한 취향의 소유자를 자처한다 해도 본인의 예상이 세번 이상 맞아떨어지면 속으로 외치기 마련이다. “자, 이제 내가 모르는 사실을 말해줘!” 그러나 <남자가 사랑할 때>는 목적어가 빠져 있는 제목처럼, 끝까지 ‘누구를’의 문제도 ‘어떻게’의 문제도 ‘누가’ 사랑하는가만큼의 무게로 다루는 데에 실패한다. 태일이 우리가 지지해야 할 주인공이고 남자다운 남자이므로 때가 되면 호정(한혜진)은 그를 사랑하게 되고 다시 정해진 때가 되면 고난이 닥치고 쐐기를 박기 위해 더한 불운이 마지막 코너에 몰아친다. 이 영화에서 호정의 성격에 일관성이 부족해 보이는 원인도 여기에 있다.
사랑에 무슨 이유가 있고 계기가 필요하냐고 반문한다면 그 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세부 에피소드의 가짓수가 부족하다고 불평하고 있는 건 아니다. 아무 일이 없다 해도 쉼표와 리듬, 시선과 시야의 얽힘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의 결핍을 불평하는 것이다. <남자가 사랑할 때>는 굵직한 설정과 안정적인 연기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대신 공력이 들어간 대목은 투박하지만 마음 좋은 형 부부와 조숙한 조카가 만들어내는 소소한 유머다. 결국 영화의 본론과 무관한 개별 장면의 재미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성공하는데 장면을 합쳐 시퀀스로 헤아려보면, 그리고 시퀀스를 더해 영화 전체로 범위를 넓혀갈수록 진부함의 크기가 각 장면이 보여준 상투성의 총합보다 커진다. 배우들이 스크린 속에서 엄청난 양의 눈물을 흘리는 영화인데 관객인 나는 짧은 웃음을 터뜨린 횟수가 눈시울이 시큰한 순간보다 많은 기현상도 생긴다. 비장하고 애달픈 사랑영화로서 태생적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남자가 사랑할 때>는 서사적으로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연상시키는 스토리의 전환을 더하고, 편집에서는 플래시백 기교에 의존한다. 플래시백은 예측 가능한 비극적 멜로 서사에 굴곡을 주는 도치법 내지 당김음으로 이용되거나, 진실을 한 발짝 늦게 발견할 때 관객의 마음에 발생하는 “아, 그것도 모르고 그만!” 하는 애틋한 안타까움을 부추기기 위해 투입된다. 그런데 그 빈도가 너무 높아 의도를 들킬 지경에 이른다. 영화가 공감보다 동정을 구한다고 인식하기 시작한 관객의 몰입은 급속도로 식어버린다. 아무리 눈이 내리고 음악이 흐르고 라디오에서 마침 슬픈 사연이 낭독된다 해도 돌이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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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못지않게 클로즈업도 아껴야 잘 산다, 고 널리 알려져 있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은 그런 ‘생활의 지혜’ 따위 개의치 않는다. 이 영화를 보다가 문득 주인공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듯한 죄스러움이 드는 까닭은, 길고 노골적이기로 소문난 섹스 신에 입회해서가 아니라 클로즈업숏들이 끈질기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본 내가 아는 한 배우는 “연기자들이 너무나 힘들었을 게 보인다”라고 같은 ‘선수’로서 촌평했는데 그녀 역시 베드신을 말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숏의 사이즈가 체감 지속시간을, 숏의 지속시간이 체감 사이즈를 변화시키는 경험을 한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고집하는 클로즈업의 집요한 연쇄는 급기야 이 숏들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느끼도록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관성’까지 만들어낸다. 영화 말미에 이르면 우리는 실연의 비탄으로 너덜너덜해진 아델이 그럼에도 지탱해야 하는 일상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교사로서 가르치는 어린아이들과 흥겨운 율동을 하는 광경을 본다. 이 장면의 대부분은 평범한 거리에서 찍힌 숏인데도, 클로즈업처럼 보인다. 우리는 기어코 새어나온 아델의 눈물이 아래 속눈썹에 발린 검정 마스카라를 미세하게 녹이는 모습을 또렷이 감지할 수 있다. 마치 우리의 눈이 순간적으로 줌 렌즈로 둔갑한 것처럼. 이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가까운 친구나 연인의 작은 표정이나 동작을 곁눈질한 것만으로도 지금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들려오는 생활 속 현상과 통한다. 2시간이 넘도록 클로즈업을 따라 지근거리에서 그녀를 따라다닌 끝에 우리는 아델과 가상의 친교를 맺게 된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날마다 확인하다시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친밀도에 따라 허용되는 적정 접근 거리가 있다. 대략 1m 이내에 잘 모르는 타인이 진입하면 사람은 위협을 느낀다고 읽은 적이 있다. 한데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만큼은 친밀도와 거리 사이의 인과관계가 전도된다. 타인과 실제로 무람없는 사이라 성큼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근접한 위치에서 바라보다 보니 그 인간을 잘 안다고 가정하게 되고, 나와 관련 있는 영혼으로 암묵적으로 간주한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카메라는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 옆에 누운 아델의 뺨에서 오스스 돋는 솜털을, 눈동자에 감도는 물기를, 항상 무방비하게 살짝 들린 윗입술을, 나이프를 싹싹 핥아먹는 혀를 지켜보도록 강제한다. 물론 클로즈업에는 보는 이의 멱살을 잡는 위협적 클로즈업도 있고 경배를 부르는 숭고한 클로즈업도 있다. 그러나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주시하는 아델의 얼굴은, 10대의 어느 날까지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아직 가면으로 굳어버리기 전의 얼굴이다. 첫사랑이 등 돌리는 순간에도 앞으로도 이런 고통이 삶에서 거듭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상상하지 못하는 얼굴이다. 거기서 관객은 본인의 ‘마스크’ 안에 퇴화된 보드라운 살성의 민낯을 불현듯 만난다. 달리 말하면 클로즈업에서 우리는 자신의 영원한 얼굴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러닝타임의 모래시계가 다했을 때 우리는 아델의 얼굴이 희미하게 나이 들었음을 발견한다. 자, 이러고도 당신은 아델에게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클로즈업은 매우 위험하며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은 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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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전>의 편집실
파주 출판도시 공동체 상영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시이 유야 감독의 <행복한 사전>을 보다가 생각했다. 자부할 만한 사전을 펴내는 데에 13년의 인생을 쏟아 넣은 사람들의 이야기 <행복한 사전>은 말과 글을 다루는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특히 교정쇄의 냄새를 아는 세대에 솔푸드가 될 만한 영화다. “사전을 배 삼아 이 세상을 건너겠다”는 포부를 가진 주인공들의 사무실은 책과 자료와 단어 카드로 포화 상태다. 과묵한 마지메(마쓰다 류헤이)와 영업사원 체질 마사시(오다기리 조)는 성격도 판이하고, 이 숏의 양쪽 끝에 멀리 떨어져 앉아 있지만 전혀 소원해 보이지 않는다. 둘 사이를 빼곡하게 메운 ‘말’의 더미 덕분이다. 영화가 들려주는 대로, 말은 곧 타인과 연결되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