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에이미 애덤스] 과시하지 않고 응시하는
2014-02-25
글 : 김보연 (객원기자)
에이미 애덤스
<아메리칸 허슬>

에이미 애덤스는 세살짜리 딸을 둔 올해 마흔한살의 엄마로서 평소 일상을 물어보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담담하게 말한 적이 있다. “알다시피 제가 VIP는 아니잖아요?” 실제로 그녀는 1999년 <드롭 데드 고저스>(감독 마이클 패트릭 잔)에서 작은 역할을 맡으며 영화에 데뷔한 뒤(참고로 이 작품의 주연은 커스틴 던스트였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지만 할리우드 파파라치가 따라붙는 화려한 스타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는 물론 화려함을 즐기지 않는 그녀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녀가 맡아온 캐릭터들의 일관된 특징 때문에 굳어진 그녀의 이미지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에이미 애덤스가 처음으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작품인 필 모리슨 감독의 <준벅>(2005)에서 그녀는 사랑을 갈구하는 해맑은 임신부를 맡았다. 애슐리란 이름의 이 여성은 물론 매력적이었고 에이미 애덤스의 연기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지만(이 영화로 그녀는 선댄스영화제 등에서 처음으로 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배역 자체가 도드라지거나 화려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주연배우가 앞에 나서서 열심히 갈등을 만들고 해결하는 사이 그녀는 주변에서 소박한 사랑스러움을 연기하며 주위 풍경과 이야기에 완전히 동화된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준벅>을 회고하며 “그 역을 연기할 때 나는 정말 자유를 느꼈어요”라고 말한 것을 보면 자신을 억지로 드러내지 않는 이러한 연기 스타일이 그녀에게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그녀의 빛나는 모습 중 하나는 상대방을 바라볼 때 떠오르는 그녀의 표정과 눈빛이다. 즉 에이미 애덤스는 상대를 정말 ‘잘’ 바라보고, 그 순간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배우이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배우가 대사를 하거나 고난도의 감정 연기를 할 때보다 상대 배우를 바라볼 때 더 돋보인다니 말이다. 하지만 크고 둥근 눈과 회색과 녹색이 섞인 눈동자를 가진 그녀가 가늘게 솟아오른 코를 살짝 들고 상대 배우를 바라볼 때 그녀의 그 말없는 얼굴은 몇 마디 대사보다 더 강한 흡입력을 자랑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에이미 애덤스가 보는 것을 따라서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때 그 장면의 감정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전적으로 에이미 애덤스의 연기에 달려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녀가 출연했던 모든 영화의 장면을 예로 들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연기 경력에 큰 도약을 가져다준 <다우트>(감독 존 패트릭 셰인리, 2008)를 보자. 이 영화의 주인공인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과 메릴 스트립 사이에서 자신의 연기를 하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대배우가 정확히 우리가 기대한 만큼의 불꽃 튀기는 연기 충돌을 펼칠 때 이들의 연기를 더 돋보이게 만들고 그 맥락을 풍성하게 만든 것은 이들을 바라보는 에이미 애덤스의 얼굴이었다. 검은 모자를 써 더 도드라진 그녀의 불안한 얼굴은 두 사람의 연기가 표현하는 강한 신념과 큰 대조를 이루며 영화의 감정선을 이어나가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

에이미 애덤스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맡은 인물은 대답을 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질문을 하도록 허락된 인물도 아니었고, 오직 들은 것에 대해 침묵의 서약을 지켜야 하는 캐릭터였다.” 그렇게 그녀는 대사 없는 연기를 해야 했지만 그녀의 겁먹은 듯 떨리는 눈빛은 영화 전반에 깊게 스며들어 <다우트>의 숨은 감정선을 잡아준다. <다우트>가 에이미 애덤스의 얼굴을 보여주며 끝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화려하게 눈에 띄는 연기 없이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어떻게 영화의 정서를 이끌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녀는 <마스터>(2012)에서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아내를 연기하며 날카롭게 지그시 응시하는 눈빛으로 이 심각한 영화에 또 하나의 시선과 무게축을 담당했다(그리고 이 두편의 영화를 통해 그녀는 오스카를 포함한 여러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다).

그런데 이 영화들의 목록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생긴다. 그녀가 비중이 좀 더 큰 역할을 맡아 그 에너지를 작정하고 밖으로 끌어내 발산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호기심 말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끌어내 준 것은 물론 <파이터>와 <아메리칸 허슬>을 같이 작업한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이었다. 그런데 ‘열정적인’ 연기지도로 영화에 특유의 활력을 불어넣기로 유명한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은 왜 하필 그녀를 선택했을까. 그것도 다른 여자와 주먹다짐을 하거나(<파이터>), 가슴이 깊게 팬 섹시한 옷을 입고 사기극을 벌이는 여자(<아메리칸 허슬>)로 말이다. 심지어 <파이터>로 두 사람이 처음 만나기 전 에이미 애덤스는 <마법에 걸린 사랑>에서 문자 그대로 디즈니 동화 속 인물을 연기하기도 했었다.

“러셀은 나를 만나자마자 ‘어, 너는 공주 타입이 아니구나’ 하고 말했어요. ‘공주가 아닌 쪽으로 뭘 좀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가 그런 걸 다 지울 수 있는 기회를 줄게. 넌 공주가 아냐’라고 말이죠.” 이때 데이비드 O. 러셀이 에이미 애덤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가 에이미 애덤스의 섹시하고 거친 면을 보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녀는 <파이터>에 이어 <아메리칸 허슬>을 통해 감독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한다. 전에 없이 짙은 화장을 하고 두 남자를 동시에 유혹하며, 본능에 아낌없이 몸을 맡기는 그녀의 모습은 당연히 공주는 아니며 이전까지 그녀가 보여온 모습과도 전혀 다르다.

하지만 노출까지 불사한 그녀의 섹시한 사기꾼 연기를 보았다고 해서 에이미 애덤스가 지금껏 숨겨왔던 끼를 드디어 발산했다는 식으로, 또는 그녀가 연기 변신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인물을 연기했다는 식의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될 것 같다. 오히려 <아메리칸 허슬>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앞에서 설명했던 그녀의 연기 스타일, 즉 섣불리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지 않은 채 상대 배우를 가만히 응시하며 그 장면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연기가 변함없이 이 영화에도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 그녀와 가깝게 지내는 두 남자, 즉 크리스천 베일과 브래들리 쿠퍼가 차례로 인생의 큰 변화를 겪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에이미 애덤스는 예의 깊고 뜨거운 눈빛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그때 그 눈빛이 이들에게 때로는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때로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자기 발밑을 돌아보게 한다. 이야기의 진짜 키는 그녀가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폭발적인 연기를 보여준 크리스천 베일이나 제니퍼 로렌스에 비해 그녀의 연기 온도는 덜 뜨거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고 다니며 영화의 전체적인 온도를 조절한 것은 결국 에이미 애덤스이다. 그러니 처음에 그녀의 인상이 뚜렷하지 않다고 한 말을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그녀는 배우로서 자기 개인의 인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전체적인 인상을 주도하는 연기를 펼친다. 그게 그녀의 방식이다.

<프로포즈 데이>

magic hour

내겐 너무 사랑스런 허당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와 장난기 어린 눈매, 들뜬 듯 가벼운 목소리가 가장 빛을 발하는 장르는 당연히 로맨틱 코미디이겠지만, 알다시피 그녀는 의외로 ‘로코물’에 많이 출연하지 않았다. 왜 그 타고난 재능을 썩히는 것인지 안타까워 할 에이미 애덤스의 팬들이 절대 놓쳐서 안 될 영화가 바로 <프로포즈 데이>이다. 우리에겐 <스토커>로 유명한 매튜 구드와 함께 호흡을 맞춘 이 영화에서 에이미 애덤스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사랑스런 새침데기 허당 숙녀’를 연기한다. 기본적인 웃고 울고 화내기는 물론, 장르의 약속인 ‘외간 남자와 우연히 한 침대 쓰기’와 비 내린 비탈길을 굴러 웅덩이에 얼굴을 박는 몸연기까지 보고 나면 그녀가 더욱 좋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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