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3회째를 맞은 마리끌레르영화제는 공식 명칭만 세번 바뀌는 곡절을 겪었다. 소규모 영화제라 출발이 순조롭지 않은가 싶어 일단 지켜보는데 준비된 작품들이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다. 개/폐막작으로 선정된 <아메리칸 허슬> <노예 12년>을 비롯해 지난해부터 영화계가 주목하고 있는 34편의 국내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총집합했다. 기우뚱거리는 소형선에 뷔페식 만찬을 차려낸 사람은 지난해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직을 사임하고 곧장 마리끌레르영화제로 돌아온 오동진 집행위원장이다. 그는 영화제 비수기라는 2월을 틈타 강남 한복판인 청담동에 “화톳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노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어딘가 이질적인 것들의 모음 같다는 인상이다. 그것부터 물어봤다.
-2012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이하 JIMFF)와 패션지 <마리끌레르>가 함께한 ‘마리끌레르필름페스티벌+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시작이었다.
=당시 제천시는 큰 예산을 들이는데 영화제가 일주일 만에 끝나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똑같은 영화제를 서울에서 한번 더 해주겠다고 했다. 예산은 전적으로 <마리끌레르>쪽에서 도왔고. 근데 그게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JIMFF 집행위원장을 사임하면서도 이 영화제는 없애지 말자 싶더라. <마리끌레르>도 영화로 자신들의 문화 정체성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여줬고. 11월부터 3월까지는 국내에 영화제가 없으니 일종의 기획전 형식으로 진행해보자는 생각이었다.
-JIMFF와의 분리뿐 아니라 지난해 ‘마리끌레르 필름&뮤직페스티벌’에서 음악 부문도 없앴다. 깔끔하게 ‘마리끌레르영화제’가 됐는데.
=관객을 끌어들이는 요소로 음악 공연을 가져왔는데 영화 자체에 관심을 갖는 게 좋겠다 싶어 올해는 아예 공연 부문을 없앴다. 터닝 포인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라인업만 보면 국내외에서 고루 좋은 평을 받은 근작들의 종합선물세트 같다. 좋은 것들이 모였으니 좋을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데 영화제로서는 정체성이 다소 모호한 게 아닌가.
=역설적으로 아이덴티티가 없는 게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그릇, 영화를 보며 노는 시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 영화제가 뚜렷한 컨셉을 가진다면 영화제로서의 스펙트럼은 줄어들어버린다. 또 하나는 문화다양성이나 영화 산업의 측면에서도 일반 외화의 극장 개봉 비중이 늘어야 한다. 이 영화제가 개봉조차 못하거나 개봉해도 얼마 못 가는 영화들에 게이트 역할을 하는 데 유효하다고 전망한다.
-CGV청담씨네시티에서 개최됐다. 청담동을 택한 이유가 있나.
=논쟁이 많았다. 아트나인으로 옮길까도 고민했는데 최종적으로 내가 청담을 고집했다. 상류층이 향유하는 문화만 넘쳐난다고 생각되는 공간에 젊고 진화된 문화가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둘이 충돌하는 느낌이 좋았다. 의외로 청담에는 중/장년층 관객이 많다. 지난해 <포크의 여왕, 존 바에즈>, 지지난해에 <구스타프 말러의 황혼>을 상영했는데 좌석의 60% 이상이 찼고 30대 후반에서 40, 50대 초반이 주 관객이었다. 이들을 겨냥해 연령대를 넓게 잡고 영화제를 준비하려고 한다. 예술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영화로 풀면 분명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영화제를 조직할 때마다 부딪히는 문제가 예산 운용일 텐데.
=지자체를 기반으로 하는 한 영화제는 순수성을 지키기가 어렵다. 관료적, 종속적 형태가 계속 벌어질 테니까. 제천에서는 그런 게 어려웠다.
-그럼 이번엔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계획인가.
=자생력을 갖추는 게 우선이다. 둘 중 하나일 거다. 벌어서 맞추거나 있는 예산에서 맞추거나. 나나 스탭 모두 영화제를 꾸린 경험이 많으니까 그걸 바탕으로 앞으로 만들어나가야지.
-올해 위원장의 추천작은.
=1960년대 미국 현대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더 파크랜드>와 내 또래 이야기 같은 <라스트 베가스>다. <베르톨루치가 말하는 베르톨루치>는 한때 영화학도로서 우리가 봐야 하지 않겠나, 라는 생각에서.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원작 소설이 워낙 좋았던지라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