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의외로 아무런 압박이 없었다고 했다. 지금은 압박을 참을 수 없다고 호소하는 중이다. 삼성반도체에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고 황유미씨의 사연을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제작 과정에서부터 화제였다. 투자사들이 꺼린 탓에 크라우드 펀딩으로 종잣돈을 마련했고, 뜻있는 개인 기부자들의 힘이 모여 결국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영화가 완성된 지금 영화를 볼 곳이 없어 관객과 만나지 못한다고 아우성이다. <잔혹한 출근>(2006)으로 데뷔한 김태윤 감독은 이후 오랜 시나리오작가 생활 끝에 충무로 제작 시스템에 한계를 느끼고 차기작으로 <또 하나의 약속>의 제작을 선택했다. <또 하나의 약속>의 제작, 각본, 감독을 도맡은 그가 상영, 배급에서 다시금 한계를 맞이한 지금 사태를 바라보는 심경은 어떨까.
-이제 개봉 3주차에 접어든다. 어떻게 지냈나.
=찍을 때만큼 바빴다. 인터뷰도 하고 무대 인사도 다니고 마음고생도 좀 하고. (웃음) 단체로 예매하고 찾아주는 곳이 많아서 지방으로 무대 인사를 자주 간다. 대주교님이 초청하셔서 광주에 간 적도 있고, 청주에서는 청주라디오 식구들이 단체관람을 해서 만나러 갔다. 부산에서는 지하철 노조나 법원 노조 등이 기억에 남는다. 할 수 있는 게 몸으로 때우는 것뿐이니 불러주면 바로 달려간다.
-상영관 축소나 대기업의 외압에 관한 기사가 매일 나온다.
=거의 매일 인터뷰를 한다. 영화 찍을 때보다 더 주목받고 있는 것 같다. 외신 인터뷰도 많이 들어왔다. <블룸버그>랑 <CNN> <가디언> 등. 외신들은 눈치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써줘서 좋더라. 심지어 보수적인 <파이낸셜 타임스>에서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실었다.
-개봉 전에는 기업의 외압이 없었다고 여러 차례 말했는데 실제로 개봉하고 나서 양상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알다시피 개봉관을 예상보다 턱없이 적게 잡아서 영화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처음에는 화가 났었는데 너무 수가 얕으니까 그런 생각도 없어지더라. 지금 보면 너무 치졸하고 치사해서 웃기다.
-구체적으로 외압을 느낄 만한 지점은 어떤 것인가.
=일단 극장 문제. 예를 들어 광고를 위해 포스터를 걸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예 안 받겠다는 곳이 많았다. 포스터는 받았는데 걸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고. 예약을 했는데 예매가 안 된다고 환불 조치를 받은 관객이 제작사로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롯데시네마의 경우엔 개봉일 전국 7개관, 그것도 처음에는 직영은 아예 안 열고 서울에는 피카디리극장 하나만 열었다. 지방도 대도시 외곽 지역으로만 상영하고. 여론이 안 좋아지니 상영관이 늘긴 했는데 서울이나 대도시는 별로 없다. 간혹 열어도 아침 7시, 밤 11시에 하나씩 열어놓고 스크린 생색내기하는 거다.
-일각에서는 제작비가 10억원 남짓인데 마케팅 비용을 12억원가량 책정한 게 애초에 무리였다는 지적도 있다.
=시사 반응도 좋았고 배급사쪽에서는 영화에 자신 있으니 300개관 정도 열어주면 충분히 승부를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배급사 대표가 충무로에서 배급만 10년 넘게 한 사람인데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무턱대고 진행했겠나. 사전에 극장들과 교감을 하고 가능하겠다 싶어 그 정도의 액수를 책정한 거다. 그런데 막상 개봉할 때가 되니 극장쪽 입장이 돌변했다. 공식적으론 프로그래머가 예술영화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납득하기 어렵다. 지방에 내려가보면 지방 극장주들은 왜 영화를 안 주냐고 우리에게 달라고 하는데 이건 위에서 적극적으로 막는 거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나. 극장쪽에 물어보면 배급사에서 DCP(디지털 마스터링된 상영용 영화파일)를 주지 않아서 열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고 들었다.
-극장 이외에 다른 식으로 받은 불이익도 있나.
=다양하다. 예를 들면 <출발! 비디오여행> 같은 영화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공중파 3사 어디에서도 소식을 다루지 않는다. 꼭지를 만들어놨는데 위에서 압력이 들어와 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오죽하면 JTBC 뉴스에서 <또 하나의 약속> 외압 논란을 보도한 게 화제가 되겠나. 내가 <가디언>과 인터뷰했다는 소식은 또 어떻게 알고 삼성에서 그 취재기자를 찾아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영화 속 윤미의 아버지 상구가 삼성 건물 앞에서 시위를 할 때 삼성쪽 버스가 상구를 둘러싸는 장면이 있는데, 공식적으로 그런 일은 없었다는 입장을 전했다더라. 웃긴 건 그 기사 바로 밑에 우리 회사 앞에서 매일 벌어지는 일인데 뭘 아니냐는 댓글들이 쭉 달린 거다. 삼성 다니는 분들의 증언도 많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는 거지.
-사실 그 장면이 영화에서도 가장 영화적인 설정처럼 보인다.
=재밌고도 슬픈 건 모두 실화라는 점이다. 고 황유미씨 아버님이신 황상기씨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일인 시위를 하고 있는데 버스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출퇴근하는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차단시켰다고 했다. 그때 나온 음악이 걸그룹 음악이었는데 저작권 때문에 그것만 트로트 음악으로 바꾼 걸 제외하곤 사실 그대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만 관객을 돌파했다. 단체로 표를 사서 서로 선물하는 등 이색적인 사연들도 많다고 하던데.
=광주에서 시민들이 돈 모아 신문광고를 내기도 하고 속초에서는 ‘속초의 딸 황유미의 이야기입니다’라고 플래카드를 건 것도 봤다. 트위터에 글 남기면 표 20장을 사주겠다는 해외 거주자도 계셨다. 표를 사서 주변에 돌리는 등 자발적인 응원과 홍보 사례가 많다. 고맙지만 안타깝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영화가 영화로 관객을 만나야 하는데 둘러싼 잡음들이 많으니 피곤한 일이다. 관객의 판단에 맡겼으면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는데 이렇게 되니 도와주신 분들에게 미안해서라도 손 놓고 있을 수가 없다.
-예전에 이 영화 제작 과정에서 상업영화에서 지친 마음을 위로받았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심정이 복잡하겠다.
=주변에서 너 앞으로 영화 만들 수 있겠냐고 걱정 많이 해주시는데 그럴 때마다 이야기한다. 네 걱정부터 하라고. (웃음) 영화 만들기 어려운 건 어디서 작업하나 마찬가지다. 대기업 자본 받는다고 영화를 쉽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나도 그 시스템이 갑갑해서 이번 영화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한 거다. 만약 이번 일로 투자를 꺼린다면 그런 사람들과는 내가 함께하고 싶지 않다.
-타고난 반골 기질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영화를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다. 세번이나 학교를 옮긴 끝에 스물여덟살에 영상원에 들어갔다. 원래 91학번이었는데 2년 다니다 그만두고 군대 다녀와 수능 보고 다른 학교 들어갔다가 또 그만뒀다. 학력고사, 수능, 영상원 시험까지 3시 패스를 한 셈이다. (웃음) 시험은 잘 보는데 공부가 정말 재미없더라. 적응을 못했다. 조직 생활이 이렇게 안 되는데 직장을 다닐 수 있을까 걱정도 됐다. 그런데 영상원을 가보니 다 나랑 비슷한 사람만 모여 있는 것 아닌가. 마음이 편해지면서 학교 공부, 수업도 재밌어졌다. 마냥 좋았던 건 아니지만 시나리오 쓰는 긴 습작 시간도 버틸 만했다.
-처음 만든 영화 기억나나.
=영상원을 지원한 계기가 타르코프스키 영화였는데 졸업할 땐 좀비영화 찍고 나왔다. (웃음)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굉장히 거리가 먼 것 같다. 막상 입학하니까 주변에서 다 타르코프스키 같은 영화를 하려고 하는 거다. 그래서 일부러 웃긴 걸 했다. 3학년 때 코미디, 4학년 땐 좀비 코미디 찍고 졸업했다. 내가 봐도 반골 기질이 있는 것 같긴 하다.
-제목이 뭐였나.
=<그녀는 좀비>. 2002년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좀비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 마니아영화 취급받았다. 다행히 영화판에서 그 영화를 보고 좋아해준 사람들이 많아 비교적 일찍 데뷔할 수 있었다.
-데뷔작 <잔혹한 출근>이 2006년이었다. 그사이 스탭으로 참여하진 않았나.
=연출부를 하고 싶었는데 졸업을 33살에 했으니 연출부 하기에는 나이가 좀 많았다. 그래도 큰 영화의 연출부에 인터뷰하러 갔는데 처음으로 하는 말이 커피를 잘 탈 수 있겠냐는 거였다. 당시 조감독이 이런 일을 잘해야 자기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다며 뿌듯해하는 걸 보고 뭐 이런 사람들이 있나 싶었다. 그나마도 나이가 많다고 떨어졌다. 물론 그 영화는 제작되지 못했다. (웃음) 그 와중에 아는 PD가 시나리오를 쓰라고 해서 쓴 게 <인사동 스캔들>이었다.
-<인사동 스캔들>은 원안으로 되어 있던데.
=내가 기획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그런데 제작사쪽에서 시나리오 수정 요구가 계속되어 이대로는 안 될 거 같아 접고 나왔다. 그때 마침 <잔혹한 출근> 제의가 들어왔고 그 영화로 데뷔하게 됐다. 나중에 <잔혹한 출근> 끝나고 <인사동 스캔들> 연출 제의도 왔는데 거절했다. 그런데 이름만 제대로 넣어달라고 했더니 각본이 아니라 원안으로 넣었더라. 영화도 안 봤다.
-<잔혹한 출근>에 대해서는 만족하나.
=그것도 사연 많은 영화다. 원래 시나리오는 스릴러 누아르였다. 마지막에 처절하게 끝나는 이야기였는데 중반부터 각색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니 배우 캐스팅이 안 돼 있고 김수로 배우가 메인으로 들어오면서 코믹 드라마로 바꾸라는 거다. 지금이라면 안 한다고 하고 나왔겠지만 그때는 하던 작품이 두번이나 어그러져 마음이 급했다. 완성 뒤엔 코미디로 마케팅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편집도 내가 한 버전이 아니었다. 그때 제일 많이 들었던 질문이 코미디인데 왜 안 웃기냐는 거였다. 정말 힘들었다. 내 영화가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결국 평생 따라오는 꼬리표다. 배급에 의해 영화가 바뀌는 가장 안 좋은 예를 경험한 셈이다. 그러고 나서는 한참을 헤맸다.
-<또 하나의 약속> 제작을 결심한 게 그즈음인가.
=그 뒤로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시나리오는 계속 썼고 그 와중에도 내 영화를 잘 본 사람들이 있어 제안은 꾸준히 들어왔다. <용의자 X>(2012)가 그때 쓴 것 중에 영화화된 작품이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돈 주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쓰다가는 큰일나겠다 싶더라. 돈 몇 천만원에 영혼을 갉아먹는 짓인 것 같고. 대략 7~8편 정도 시나리오를 쓰고 난 뒤 더이상 미룰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찰나 고 황유미씨 사연을 알게 됐고 <또 하나의 약속>을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시나리오작가로 경험한 한국영화 제작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나.
=제기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데 시나리오 입도선매 방식을 첫 번째로 꼽고 싶다. 미국 같은 경우 완성된 시나리오를 팔아 에이전시와 작가가 나눠가지는 것에 반해 우리나라는 아이템만 가지고 미리 판매를 한다. 당장 돈이 급해서 그런 경우가 많지만 그 순간 모든 권리가 투자사로 넘어간다. 그러면 결국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다 써줘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결국 이야기가 산으로 간다. 거기서 오는 괴리감이 크다. 3, 4년씩 갈아엎다 무산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나도 쓰기만 하고 묻어둔 채 나온 작품이 3편 정도 있다. 후배들에게는 작가의 권리를 찾고 싶으면 힘들어도,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다 쓴 다음에 계약하라고 충고한다.
-그 모든 답답함을 떨쳐버리려고 만든 이번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제작 과정에는 만족하나.
=당연히 힘들었다. 제작비 10억원이라고 하지만 처음엔 1억2천만원 들고 시작했으니 안정적일 수 없었다. 완성도라는 게 화면의 질에 관련된 것이기도 하고 원하는 화면을 충분히 연출할 여건도 아니었으니. 그럼에도 행복했다. 죽어가던 영혼이 살아나는 기분이랄까. 내가 영화를 만들려고 했던 이유가 새삼 떠올랐다.
-차기작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소재의 영화인가.
=몇 가지 눈여겨보고 있는 소재가 있는데 그중엔 물론 실화도 있다. 실화라고 무조건 영화화하기 좋은 건 아니다. 자극적인 소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영화로 만들 만한 드라마를 갖추고 있는지, 실화를 바탕으로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제작비 등 여건이 충분히 허락한다면 만들어보고 싶은 영화는.
=좀비영화? (웃음) <또 하나의 약속>도 좀비영화 같다. 영화 자체가 아무리 억누르고 쓰러져도 죽지 않고 계속 일어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