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3월 4일에 발행된 잡지 94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올해 오스카야말로 근래 들어 가장 심한 경쟁이 예상된다고들 하는데,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의견이다. 다만 그 이유가 부문마다 뛰어난 작품과 배우가 넘쳐나서라기보다 평균 수준의 비슷한 후보끼리 주로 맞붙었기 때문이라는 점이 아쉽다. 그래도 할리우드의 심장부에서 벌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영화 시상식이 안기는 베팅의 재미란 쉽게 가실 만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올해도 점괘를 던져봤다. <씨네21>이 생각하기에 상을 받아야 하는 후보와 오스카가 상을 줄 것으로 예상되는 후보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웃자고 시작한 게임이니 죽자고 달려들진 마시라. 더불어 당신의 선택도 궁금하다.
작품상 후보
<그래비티> <네브래스카> <노예 12년>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아메리칸 허슬> <필로미나의 기적> <캡틴 필립스> <허>
<씨네21>의 선택
<그래비티>가 받아야 한다. <인사이드 르윈>이 모든 주요 부문에서 이토록 철저히 외면당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다른 답안지를 끼적여볼 수도 있었겠지만, 아카데미는 여전히 코언 형제의 영화에 냉담한 편이다. 애석한 마음을 뒤로하고 후보에 오른 준작들로 눈길을 돌리자면, <그래비티>가 최선이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역대 최고의 영화”라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격찬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장르를 불문하고 이 영화가 지난해 가장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킨 영화 중 하나임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한없이 무섭고도 에로틱한 우주 체험을 선사하는 몇몇 장면은 오랫동안 회자될 만하다. <라이프 오브 파이>를 뛰어넘진 못했지만, 적어도 3D 체험에 관한 한 이 영화가 할리우드 기술력을 가늠케 하는 또 하나의 최전선임은 분명하다.
아마도 오스카의 선택
<노예 12년>이 받을 것이다. <인디와이어>의 지적대로, 최근 오스카는 “비평과 흥행 양면에 성공한 3D영화와 어떤 식으로든 역사에 개입하려는 좀 더 작은 영화의 대결”에서 줄곧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2010년엔 <아바타> 대신 <허트 로커>가, 2012년엔 <휴고> 대신 <아티스트>가, 2013년엔 <라이프 오브 파이> 대신 <아르고>가 작품상을 가져갔다. 통계적으로만 따지면, 올해도 <그래비티> 대신 <노예 12년>이 영예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미국의 흑역사를 고발하는 이 영화는, 자유인으로 살고 있던 흑인 음악가가 어느 날 갑자기 남부의 노예로 팔려가 온갖 고초를 겪는 과정을 다룬다. 전작 <헝거>와 <셰임>에서 ‘고통받는 육체’에 천착해온 스티브 매퀸이 고통받는 노예의 몸을 거침없이 전시하니, 오스카의 양심이 시험에 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감독상 후보
<그래비티>의 알폰소 쿠아론 <네브래스카>의 알렉산더 페인 <노예 12년>의 스티브 매퀸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마틴 스코시즈 <아메리칸 허슬>의 데이비드 O. 러셀
<씨네21>의 선택
작품상이 후보작 중 최고의 작품에 돌아가야 하는 것이라면, 감독상 역시 그 최고의 작품의 창조 과정을 총지휘한 감독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상을 <그래비티>가 받아야 한다면, 감독상도 <그래비티>의 알폰소 쿠아론이 받아야 한다. 물론 이 영화의 비전이 쿠아론의 연출력 자체보다 에마뉘엘 루베츠키 촬영감독이나 다른 기술 인력의 창조성에 더 많이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자원들을 활용해 이만 한 우주영화를 만들어낸 것 또한 쿠아론의 역량이라 해야할 것이다. 이런 선택을 하게 된 데에는 다른 후보들의 부진도 한몫했다. 스티브 매퀸, 알렉산더 페인, 데이비드 O. 러셀 모두 각자의 세계 안에서 멀리 나아가지 못한 채 우리의 기대치에 못 미치거나 겨우 일치하는 연출력을 보여줬다.
아마도 오스카의 선택
오스카는 대개 한 영화에 작품상과 감독상을 몰아주는 편이다. 하지만 압도적 1등이 없으면 작품상과 감독상을 각기 다른 영화에 나눠주기도 한다. 작품상을 놓고 <그래비티> <노예 12년> <아메리카 허슬>이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는 올해는 후자에 해당할 것 같다. 그런데 작품상과 달리 감독상의 주인공은 “빤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다들 입을 모아 말하는 예상 수상자는 알폰소 쿠아론. <디파티드> 때 이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마틴 스코시즈를 제외하고, 늘 각본상에 더 유력한 알렉산더 페인을 건너뛰고, 흑인 감독이란 이유로 수상 자체가 이변이 될 스티브 매퀸을 뒤로하면, 남는 건 알폰소 쿠아론과 데이비드 O. 러셀뿐인데, 데이비드 O. 러셀과 오스카의 궁합은 줄곧 나쁜 편이었다. 그래서 알폰소 쿠아론이란 것. 물론 스티브 매퀸과 데이비드 O. 러셀의 반전을 기대하는 이도 더러 있다.
남우주연상 후보
<네브래스카>의 브루스 던 <노예 12년>의 치웨텔 에지오포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매튜 매커너헤이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아메리칸 허슬>의 크리스천 베일
<씨네21>의 선택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받아야 한다. 이 부문의 지난해 후보가 대니얼 데이 루이스, 와킨 피닉스, 덴젤 워싱턴 등이었던 걸 떠올리면 올해는 베팅의 묘미가 좀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크리스천 베일이나 매튜 매커너헤이에 비해 디카프리오가 대단히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준 것도 아니다. 거기다 셋 다 오스카 상복이 없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들이 아닌가. 그래도 한명을 고른다면, 자신의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한 디카프리오에 한표를 던져야 할 것 같다. 이번 영화에서 그는 <J. 에드가> 때와 정반대로 조증 에너지를 마구 발산하며 무려 3시간 동안 돈, 섹스, 마약의 품속에서 질펀하게 뒹굴었고, 아마도 그것이 그가 도달할 수 있는 광기와 도취의 한계가 아닐까 짐작게 했다.
아마도 오스카의 선택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매튜 매커너헤이가 받을 것이다. <매직 마이크> <머드> <킬러조> 등 최근 몇년간 그는 매 영화에서 실로 온몸을 던져 열연해왔지만 들인 노력에 비해 많은 주목을 받진 못했다. 그래서 그가 오스카 후보로 지명됐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의 때가 왔다”고들 했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그는 에이즈 진단을 받은 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마초 카우보이 역을 맡아 특유의 앙상한 육신과 퀭한 눈빛을 극단적인 수준까지 소진시킨다. “그보다 훨씬 못한 연기로도 오스카를 가져간 배우가 얼마나 많은데”라는 일각의 볼멘소리가 이해 갈 정도다. 한편, <올 이즈 로스트>의 로버트 레드퍼드, <허>의 와킨 피닉스, <인사이드 르윈>의 오스카 아이작 등이 이 부문의 후보에 오르지 못한 데 대한 원성도 자자하다.
여우주연상 후보
<그래비티>의 샌드라 불럭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란쳇 <아메리칸 허슬>의 에이미 애덤스 <어거스트: 오세이지 카운티>의 메릴 스트립 <필로미나의 기적>의 주디 덴치
<씨네21>의 선택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란쳇이 받아야 한다. 우아함과 중성미가 매력적인 여배우 블란쳇이 신경증을 기본으로 장착한 우디 앨런의 영화 세계 속으로 걸어들어가 이런 기막힌 반전을 만들어냈으니, 이 상은 그녀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남편의 배신 이후 ‘겨땀’에 전 몰골로 자낙스를 들이켜며 혼잣말을 지껄이게 된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재스민’을 그녀만큼 세련되게 표현하고 그 세련미를 다시 아이로니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배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 영화에서 그녀는 기존의 자신의 이미지를 부분적으로는 능란하게 이용하고 부분적으로는 철저히 깨부숨으로써 배우로서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애니홀>의 다이앤 키튼이나 <부부일기>의 주디 데이비스 이후 앨런이 만난 최고의 여배우란 평가가 과언이 아니다.
아마도 오스카의 선택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란쳇이 받을 것이다. 올해 어워드 시즌의 경향 중 하나는 몰표 현상인데, 이 부문도 그에 속한다. 다만 이유가 좀 다르다. 블란쳇에게 몰표가 쏟아지는 건 이 부문 후보들이 (샌드라 불럭 정도를 제외하면) 너무 빤하게 훌륭한 배우들이기 때문이다. 오스카 수상이 취미이자 특기인 메릴 스트립은 물론이고, 주디 덴치도 이제 와서 새삼 오스카를 쥐어주기가 민망할 정도의 노장이다. 에이미 애덤스도 배역의 경중과 장르의 관습을 떠나 늘 야무진 연기를 한다. 그 사이에서 블란쳇이 빛난 까닭은 그녀가 예상치 못하게 우디 앨런의 세계로 들어가 가장 확실하게 무너져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우디 앨런의 불미스런 스캔들이 그녀의 수상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고 지적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운 것 같다.
남우조연상 후보
<노예 12년>의 마이클 파스빈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자레드 레토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조나 힐 <아메리칸 허슬>의 브래들리 쿠퍼 <캡틴 필립스>의 바크하드 압디
<씨네21>의 선택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조나 힐이 받아야 한다. 이유는 하나다. 정해진 틀에서 벗어난 변종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미국 남부의 악독한 농장주 역을 맡은 마이클 파스빈더, 에이즈로 죽어가는 드랙퀸을 연기한 자레드 레토, 피골이 상접한 소말리아 해적으로 분한 바크하드 압디가 모두 스테레오타입과의 ‘밀당’을 피할 수 없었다면, 힐은 망나니들로 구성된 주가 조작단의 일원으로 등장해 비교적 자유분방한 연기를 선보였다. 그만의 그로테스크한 유머는 마틴 스코시즈의 노스탤지어 가득한 신작에 신선한 ‘병맛’을 더하기도 했다. <머니볼>의 그를 떠올리면 더욱 재미난 간극이다. <아메리칸 허슬>의 브래들리 쿠퍼도 ‘찌질이’ 야심가로 분해 남다른 ‘똘끼’를 발산했지만, 아무래도 외모 점수에서 힐을 이길 수가 없다.
아마도 오스카의 선택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자레드 레토가 받을 것이다. 작품상 예상 수상작이 <노예 12년>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에이즈로 죽어가는 드랙퀸 캐릭터는 그 자체로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다. <가디언> 역시 레토가 맡은 역할이 “아카데미가 좋아하는” 육체적, 심리적으로 힘든 배역의 전형이자 “박애주의적 이슈들”을 거부감 없이 끌어안게 하는 캐릭터라 분석했다. 물론 정치적 책무감에 약한 건 아카데미만이 아니다. 골든글로브, 미국배우조합, 뉴욕/LA/시카고 비평가협회도 이미 만장일치로 그에게 트로피를 안겨준 상태다. 런던비평가협회와 영국 아카데미만 바크하드 압디를 택했는데, 레토는 (당시 이 영화가 영국 내 미개봉작이었던 관계로)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모두가 그의 수상을 당연시하는 분위기다.
여우조연상 후보
<네브래스카>의 준 스큅 <노예 12년>의 루피타 니옹고 <블루 재스민>의 샐리 호킨스 <아메리칸 허슬>의 제니퍼 로렌스 <어거스트: 오세이지 카운티>의 줄리아 로버츠
<씨네21>의 선택
<아메리칸 허슬>의 제니퍼 로렌스가 받아야 한다. 배역의 비중이나 ‘쌩얼’ 연기로 따지면 줄리아 로버츠나 샐리 호킨스가, 맡은 역할의 사회적 성격으로 따지면 루피타 니옹고가 더 유력한 후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하고 깔끔하게 연기력만 놓고 말하자면 단연 로렌스다. 특히 그녀는 데이비드 O. 러셀의 영화만이 지닌 종잡을 수 없는 정서와 리듬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 이어 다시 한번 남자의 관심을 갈구하는 순진하고도 공격적인 여인으로 분한 그녀가 그 사실을 제대로 증명해낸다. 크리스천 베일, 에이미 애덤스, 브래들리 쿠퍼 등 걸출한 선배 배우들 사이에서 신기할 정도로 돌발적인 에너지를 발휘하며 중반 이후 극의 흐름을 거의 주도하기까지 하는 그녀가 아니라면, 누가 이 상을 받아야 할 것인가.
아마도 오스카의 선택
<노예 12년>의 루피타 니옹고가 받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만 <아메리칸 허슬>의 제니퍼 로렌스가 받을 가능성도 반은 된다. 두 사람은 앞선 어워드 레이스에서 대부분의 상을 나눠 가졌다. 골든글로브나 영국 아카데미 같은 큰 상은 로렌스가, 미국배우조합상과 각종 비평가협회상의 반 정도를 니옹고가 가져갔다. 하지만 로렌스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게 바로 지난해인 만큼 같은 감독과의 작품, 비슷한 캐릭터로 여우조연상을 또 받을 것 같진 않다. 거기다 그녀에게 상을 줄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반면 니옹고에겐 <노예 12년>이야말로 절호의 데뷔작이다. 학대받는 흑인 노예를 연기한 점, 완벽한 신인으로서 뒤처지지 않는 연기를 선보인 점 등이 그녀에게 상당한 가산점으로 작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