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두번 보기 힘든, 한번만 볼 수 없는
2014-03-13
글 : 김혜리

※ 2월18일 이후 일기에는 <노예 12년>의 상세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86회 오스카 시상식은 중앙집중적으로 한치 오차 없이 통제된 쇼를 포기하고 SNS 시대에 호응하는 모험적인 연출을 시도했다. MC 엘렌 드제너러스는 무대보다 객석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스타들을 쉴 새 없이 조력자로 끌어들이고 셀카를 찍었으며, 급기야 돌비 시어터로 피자를 주문해 올림포스의 신들처럼 보이는 스타들도 3시간 넘는 중계를 시청하고 있는 당신들과 똑같이 배고픈 중생이라는 점을 세계 영화팬들에게 어필했다. 몸매만 봐서는 이날의 한 조각이 10년 만에 처음 먹는 피자였을 법한 배우들도 꽤 보였지만. ‘먹방’이란 단어가 만들어지기 오래전부터 먹는 연기의 달인이었던 <노예 12년>의 제작자 브래드 피트가 제일 신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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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몇살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 인생 최초의 ‘호러 영상물’은 미국 노예사를 한 가문의 연대기로 극화한 TV시리즈 <뿌리>였다. 노예들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폭력의 묘사가 불러일으킨 충격이 첫 번째 공포였고, 인간이 다른 인간을 저렇게 취급할 수도 있다는 경악이 더 심각한 두 번째 공포였다. <뿌리>가 방영되는 요일이면 즐거운 기대보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앞섰지만 꼬박꼬박 나를 TV 앞에 끌어다 앉힌 힘은 비논리적인 일종의 의무감이었다. 공포감, 눈 돌리고 싶은 유혹과 싸워 <뿌리>를 빠뜨리지 않고 보는 일만이 내가 주인공 쿤타 킨테 일가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도 안 되는 혼자만의 강박을 가졌던 것이다.

아직도 <뿌리>가 노예제를 체험으로서 정면으로 다룬 영상물 중 내게 제일 진하게 새겨져 있다는 사실은 (내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미국 노예제도가 인류사에서 차지하는 자리에 비해 대중영화의 소재로 선택된 빈도가 낮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이 초래한 고통과 죽음의 부피라든가, 인간의 도덕적 감수성이 정치/경제적필요 앞에서 얼마나 마비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로서의 의미로 저울질해 보아도 비슷한 사례인 홀로코스트에 비해 스크린에 현저히 적게 재현됐다. 패전 독일의 나치가 가해자인 홀로코스트와 달리 대중영화산업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미국의 역사적 반성이 전제되는 기획이기 때문에 문턱이 있었을 테고 상대적으로 할리우드에서 유대계 백인이 점유하고 있는 큰 영향력도 원인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북미와 세계 박스오피스 잠재력에 있어서 노예를 서사의 주체로 세운 영화는 흔쾌한 기획이 아니었을 터다. 두어달 전 통화한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의 수입/배급사 대표는 “한국에서 흑인 배우가 주인공인 영화가 관객을 모으는 경우는 아직은 코미디로 한정된다. <언터처블: 1%의 우정> 정도가 예외지만 흑인-백인 투톱 영화였다”라고 말했다. <맨 인 블랙3>의 윌 스미스를 비롯해 인종차별이 상식적 금기가 된 지 오래인 현대 할리우드영화의 흑인 스타들은 극중에서 인종차별을 농담의 소재로 취한 대사를 던지곤 한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조크의 단계로 넘어가기 전 응당 거쳐야 할 진담의 국면을 할리우드영화는 건너뛰다시피했다.

대중문화에서 제대로 재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현대 관객이 노예제를 대리체험하고 감정과 사고를 투사할 기회가 적었음을 의미한다. “노예제? 그런 역사가 있었지. 다시는 없어야 할 비극이지”라고 인지하는 것과, 나와 같은 감수성을 가진 존재인 과거의 인간이 감당해야 했던 사태로 스스로를 연루시키는 일은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다. 책 자체가 사료(史料)인 솔로몬 노섭의 수기를 신중하게 영화화한 <노예 12년>은 현대 미국 사회의 경제적 근간을 이루는 노예제라는 사태에 인간의 얼굴을 부여한다. 이는 모든 역사가들의 궁극적 목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노예 12년>의 연대로부터 5, 6세대가 지난 지금 미국은 어쨌거나 흑인 대통령을 선출한 나라가 됐다. “때가 됐다. 아니 너무 늦었다”라는 공감대가 <노예 12년>이라는 시도를 만나 영화가 처음 공개된 지난가을 이래 큰 파장을 일으킨 셈이다. 영국 <가디언>을 포함해 몇달간 쏟아진 <노예 12년>의 영미권 리뷰에서 가장 자주 접한 형용사는 ‘오랫동안 기다려온’(long-awaited)과 ‘필요한’(necessary)이었다. 취향에 따라 다양한 수식어를 붙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노예 12년>는 ‘필요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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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의 국내 시사 뒤 정공법을 택한 드라마라는 평이 많다. 동의하지만, 어디까지나 회화적 구도와 극단적 롱테이크가 전면에 부각된 스티브 매퀸 감독의 전작 <헝거>와 <셰임>에 비교해서다. <노예 12년>은 여전히 매 숏, 매 장면의 세부와 뉘앙스가 면밀히 안배된 표현적인 영화이며 때로는 인물의 의식을 따라 시제를 오가는 변칙적 편집과 사운드와 화면을 분리시키는 기교도 서슴지 않는다. 스티브 매퀸 감독은 관객에게 말을 걸기 위해 크게 두 전략을 구사한다. 첫째는 ‘표 나게 보여주기’이고, 둘째는 ‘일부러 안 보여주기’다.

전자의 예로 누구나 첫손에 꼽을 만한 숏은 솔로몬(치웨텔 에지오포)이 백인 감독 존 티비츠(폴 다노)의 자존심을 건드려 간신히 절명하지 않을 만큼 목이 매달리는 롱테이크다. 인물이 발끝을 세워 겨우 호흡만 부지하는 이 긴 숏은 앞서 극중에서 솔로몬이 외쳤던 “나는 생존하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라는 선언에 돌아온 가혹한 대답이기도 하다. 솔로몬이 캐나다에서 온 목수 배스(브래드 피트)에게 북부 가족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은밀히 부탁한 다음 기약 없이 기다리는 시간을 압축한 클로즈업 롱테이크 역시 노골적으로 영화를 멈추고 “여기를 보라”고 요구한다. 50초가 넘게 지속되는 이 숏 중 한순간 치웨텔 에지오포는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관객과 눈을 맞추는데 코미디가 아닌 극영화에서는 드문, 대담한 선택이다. 비누를 빌리러 이웃 농장에 다녀왔다는 ‘죄목’으로 노예 팻시(루피타 니옹고)가 등이 패도록 채찍질을 당한 다음, 카메라가 땅에 굴러떨어진 조그만 비누를 잡으며 시퀀스를 맺는 순간 우리는 거의 보이지 않는 자막을 읽을 수 있다. “이 모든 고통은 비누 한 조각 때문이었습니다.” 영화 초반 불법 노예수용소의 창으로부터 카메라를 들어올려 멀리 보이는 의사당을 잡는 숏 역시 선명한 질문이다. 어떻게 공화주의를 신봉하는 나라가 노예제를 받아들 수 있었을까. 이 장면들은 관람하는 동안 그리고 직후 며칠간 <노예 12년>을 머리에서 지우지 못하도록 육박해오는 동시에, 이 ‘그림’을 각인하고야 말겠다는 매퀸의 아티스트다운 의도가 불거져 감흥을 상쇄한다. 즉 처음에는 숏의 의미심장함과 아름다움에 반하고 감독의 의중을 읽어냈다는 기쁨으로 끌어당기지만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는, 나의 ‘독해’까지 감독의 의도한 바임을 깨닫고 시들해지는 것이다.

‘표 나게 주시하는’ 장면들이 액자를 씌우면 갤러리에 곧장 걸어도 좋을 결정적 순간을 포함하고 있다면, ‘일부러 보여주지 않는’ 연출들은 유추와 상상 과정을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 숏을 관객의 마음에 뒤늦게 현상(現像)한다. 스티브 매퀸은 한 노예가 목화밭에 쓰러져 과로사할 때 그의 얼굴과 몸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한테 물을 줘!”(Get him water!)라는 작업감독의 명령을 듣고 식수를 주겠지 예상했던 관객을 배신하고 가축에게 하듯 동이로 물을 끼얹는 동료 노예들만 밭 너머로 보여준다. 노예 경매장에서 아들딸과 적어도 함께 사달라고 읍소하던 엘라이자가 노예상에 의해 방 밖, 즉 프레임 바깥으로 질질 끌려 나갈 때도 카메라는 그녀를 따라가지 않는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절규만 영화 안에 남고 그조차 솔로몬이 황급히 켜는 바이올린 소리에 덮인다. 포드의 농장에 간 뒤에도 그녀는 오래도록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주인이 주도하는 주일 예배 장면에서 참석한 농장 사람들도 카메라도 끝없이 통곡하는 엘라이자를 돌아보지 않는다. 오열만이 프레임 언저리를 맴돈다. 눈길을 돌림으로써 강조하는 연출은 솔로몬이 자유인 신분을 인정받아 홀로 농장을 빠져나오는 결말부에 이르러 정점을 찍는다. 소식을 듣고 달려나온 팻시에게 솔로몬은 어떤 약속도 하지 못하고 등을 돌린다. 멀어져가는, 작아져가는 팻시는 포커스가 흐려진 원경에서 혼절하듯 주저앉는다. 이 초점이 나간 이미지가 그림 같은 숏으로 가득한 <노예 12년>을 통틀어 가장 무거운 여운을 늘어뜨린다. 그녀는 어떻게 될 것인가. 프레임 밖으로 황급히 사라진 노예들- 엘라이자는, 팻시는, 아버지를 만난 양 기뻐하며 옛 주인에게 돌아간 클레런스는 그들의 스토리를 어떻게 맺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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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의 시각적 연출 가운데, 고문 포르노나 익스플로이테이션영화와의 비교까지 대두되며 의견이 분분한 항목은 노예에게 가해지는 린치의 묘사다. 스티브 매퀸의 태도는 일관되다. 그는 맞는 자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렌즈를 가까이 대거나 조명을 주지 않는다. “너는 노예야, 너는 노예야”라는 ‘주문’을 들으며 최초로 몽둥이질 당하는 솔로몬의 얼굴은 암부에 묻혀 있다. 팻시에게 가해지는 가장 지독한 채찍질 장면에서 카메라워크는 팻시의 피 흘리는 등이 걸리는 앵글을 고심해서 피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준다. 농장주 에드윈(마이클 파스빈더)이 솔로몬에게 쥐어줬던 채찍을 빼앗아들고 패악을 부린 다음에야 더이상 눈돌릴 수 없다는 듯 엉망이 된 여자의 몸이 잠깐 보인다. 매퀸은 노예들의 아파하는 얼굴을, 난도질된 몸을 클로즈업으로 본다 해도 관객은 그 고통에 어차피 다가갈 수 없다고 믿는다. 대신 그는 최소한 가능하다고 여기는 일만큼은 관객에게 철저히 강요한다. 그것은 목격자로서, 방관자로서 참상 앞에서 견디는 행위다. 몽둥이와 채찍이 인신매매자들의 손에 들릴 때마다 <노예 12년>은 매질을 처음부터 끝까지 꿈쩍 않고 찍는다.

영화의 윤리를 생각할 때 우리를 갈등에 빠뜨리는 <노예 12년>의 터치는, 채찍을 맞는 노예의 몸에 튀어오르는 CG로 그려진 피와 살점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파괴되는 인간의 육체를 테크놀로지로 재현해 구경거리로 제공하는 <300>이나 <호스텔>의 태도와 동류가 아니냐는 비판은 확실히 우리를 멈칫하게 한다. 그러나 영화를 거듭 본 나는 의심을 떨치기로 마음을 정리했다. 첫째, <노예 12년>의 폭력은 부풀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고, 둘째, 노예들의 삶에서 결정적 부분으로서 영화가 택한 제재를 다루기 위해 결코 에둘러 갈 방도가 없는 불가피한 장면이고 셋째, 육체가 아닌 다른 매개를 통한 표현으로 등가의 진실을 전하기 어려우며 넷째, 문명사회에서는 특수효과를 동원하지 않고는 재현이 불가능하다.

<노예 12년>에서 솔로몬 노섭이 12년을 노예로서 살아가는 루이지애나 늪지대의 풍경은 아름다워서 가혹하다. 뇌우가 치는 장면이라도 한번쯤 있었다면 덜 냉혹했을 것이다. 연두색 이끼로 덮인 수면, 고요히 머리채를 늘어뜨린 버드나무와 사이프러스, 숲으로 새어드는 투명한 햇살은 노예들의 부당한 고통을 바라보는 신의 어떤 연민도 내비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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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인생을 산 한 남자”, “나는 노예가 아닙니다”라는 한국 개봉 포스터의 카피는 <노예 12년>을 억울하게 팔려가 노예가 된 자유인의 수난과 극복을 그린 휴먼 드라마로 보이게도 하지만, <노예 12년>은 궁극적으로 노예‘제도’와 미국 사회의 뿌리에 관한 도큐먼트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자유인이었다는 솔로몬 노섭의 예외적 조건은 그에게 피해자인 동시에 관찰자인 이중의 위치를 부여할 뿐이다. 목화밭에서 쓰러져 죽은 동료를 매장하는 장면에서 노예들이 <흘러라 요단강아 흘러라>를 합창하기 시작하자, 노래 따위가 줄 수 있는 위안을 부정하듯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던 솔로몬은 후렴의 한 대목에서 울컥해 노래에 합류한다. 출신을 막론하고 그들 전원은 자유로워야 할 본연의 권리와 매일 맞닥뜨리는 실존적 상황 안에서 하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영화의 원경에서 구성지게 노래하는 목화밭 노예들을 보며 고되긴 했겠지만 나름대로 흥이 있는 목가적 생활인가보다 언젠가 잠시라도 생각한 적이 있다면 <노예 12년>의 이 장면을 권할 수밖에 없다.

솔로몬 노섭의 원작 <노예 12년>이 도착했다. 주말을 앞둔 밤이라 곧장 읽을 수 있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보다 1년 늦게 출간된 이 책은 현대 독자의 입장에서 읽으면 무엇을 기술했는지 내용도 중요하지만 저자의 서술하는 태도가 시사하는 바도 무겁다. 우선 출간 시점이 눈길을 끈다. 1853년 1월 구조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솔로몬 노섭은 4개월 뒤에 이 책을 펴냈다. 휴식을 취하고 생활을 복구하고 싶은 욕망도 간절했을 터에 기록해야 한다는, 알려야 한다는 그의 요구가 얼마나 긴급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현대인의 역사관이 불가피하게 개입된 영화 시나리오와 달리 1850년대를 통과하고 있는 솔로몬 노섭의 태도는 분통이 터질 만큼 온후하다. 그는 노예를 때리는 몽둥이의 모양새, 비참한 먹을거리와 침구, 의식주의 세부를 꼼꼼하고 담담하게 서술해 놓았다. 상대적으로 덜 가혹했던 농장주의 미덕을 칭송하기도 한다. 현대의 독자가 읽기에는 갑갑한 대목이지만 그것은 거꾸로 제3자의 관념성을 돌아보게 해서 가슴이 아프다. 관찰자에게는 대동소이한 악이어도 매일 생사를 오가는 극단적 상황에 처한 노예가 겪는 고통의 양에 주인의 성품은 막대한 차이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심지어 저자는 농장주들도 노예제로 인간성을 잃었으니 피해자라는 놀라운 아량마저 보인다. 그러나 회고를 마쳐갈 즈음 솔로몬 노섭은 본인이 쓴 것과 겪은 것 사이에 놓인 간극에 문득 놀란 것처럼 불안감을 담아 적는다. “내가 (이 책에서) 실패한 점이 있다면 상황의 밝은 면을 너무 부각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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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까지는 다른 영화에 관한 일기 쓰기를 포기하기로 한다. <노예 12년>의 3분의 2 지점 즈음에는 목화밭에 병충해를 가져온 애벌레의 클로즈업이 나오는데 징그럽지가 않았다. 90분가량 인간의 징그러움을 지켜본 효과였다. 사실 <노예 12년>에서 정신병리적으로 가장 위험해 보였던 인물은 악독한 농장주 에드윈 엡스가 아니라 우아하게 차려입고 가끔씩 테라스에 출몰하는 농장주 부인들이었다. 솔로몬을 처음 산 주인 포드의 아내는 아이를 잃은 슬픔으로 통곡하며 저택에 도착한 엘라이자에게 위로삼아 말한다. “안됐구나. 곧 네 아이들은 잊게 될 거야.” 이 상냥하고 잔인한 무지라니. 남편의 관심을 받는 노예 팻시를 질투하는 엡스 부인은 기독교적 시혜를 베풀 듯 노예들에게 빵을 나눠준 그 자리에서 둔기로 팻시의 얼굴을 내리친다. 이 ‘스칼렛 오하라’들은 10년 뒤 남북전쟁으로 사내들이 출전하고 나면 셀프 이미지의 붕괴를 경험하며 직접 채찍을 휘두르고 자신의 실체를 직면하게 된다.

두 번째 관람 뒤 솔로몬의 이야기 못지않게 <노예 12년>이 내게 강력하게 각인시킨 바는 영화 속 노예들이 몸을 가누고 움직이는 방식이다. 그들은 많이 말하지 않고 주섬주섬 먹고 잔다. (역시 감시받는 동료 노예가 휘두르는) 채찍의 재촉에서 풀려난 시간이면 그들은 최소의 에너지를 소비하려는 듯 팔다리를 늘어뜨리고 다니며 분노는 물론 더이상 놀랄 기운도 없어 보인다. 이마에서 쉬지 않고 뚝뚝 떨어지는 비지땀이 유일하게 리드미컬한 요소다. 완벽하고 지속적인 탈진, 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영화 도입부에서 솔로몬은 육체적 위로를 구하는 여자 노예의 손길에 반응하지 않는다. 이내 아내와의 추억으로 넘어가는 편집은 솔로몬의 거부를 정절의 표현으로 이해하도록 이끌지만, 극심한 노역으로 너덜너덜해진 육신에 성욕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하게 됐다. 탈진의 극한을 담은 대목은, 한밤중에 팻시가 솔로몬을 깨워 자신을 죽여달라고 진심으로 부탁하는 장면이다. 자살할 힘이 부족하니 손을 빌려달라는 매우 실질적인 청이다. 흔히 세상을 향한 구조 요청이기 일쑤인 자살 충동과 달리 노예 소녀의 죽고자 하는 발원에는 한줌의 제스처도 포함돼 있지 않다. 그녀의 소원은 생존 본능과 동일선상에 있다. 목을 누른 다음 강물에 가라앉혀 달라는 팻시의 상세한 묘사는 몇번이나 머릿속에서 달콤하게 죽음의 과정을 시뮬레이션해본 사람의 그것이기에 섬뜩하다. 솔로몬의 반응도 상식적 예상과 다르다. 모든 걸 이해하는 듯 그는 팻시의 요구 자체를 반문하거나 타이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돈을 꿔달라는 요청에 답하듯 왜 하필 나냐며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라고 내치는 게 전부다. 이와 연관해 솔로몬 노섭의 책에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솔로몬이 살던 지역 숲과 늪에는 언제나 도망 노예가 숨어 있었는데 탈출을 꿈꾼 게 아니라 너무 지친 나머지 하루 이틀이라도 노동을 쉰 다음 돌아와 체벌을 받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궁리한 궁여지책이었다는 서술이다. 원작에만 포함된 사실 중에는 고향의 솔로몬 가족들이 아버지가 노예로 팔려갔음을 짐작하면서도 구조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법제상으로는 가능한 일이었을지언정 서류를 갖추고 탄원하여 관료를 움직이는 과정은 실제로 요원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되짚어보면 <노예 12년>은 좌절의 연속이다. 선량한 농장주의 도움에 대한 기대가, 능력을 보여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억울한 처지를 서신으로 알리려는 시도가 연달아 벽에 부딪힌다. 솔로몬은 최종적으로 자유인의 지위를 회복하는 일에 성공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맥락 없는 개인의 행운으로 보인다. 가족과 재회하는 전형적인 결말도 마치 <우주전쟁>의 마지막 장면이 그랬듯 불길함과 불안을 남긴다. 자막은 솔로몬 노섭이 결코 가해자의 처벌과 법적 보상을 얻지 못했음을 알리고 의문사로 생을 마감했다고 덧붙인다. 세상은 영화가 끝나고도 오랫동안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점이 <노예 12년>을 첫인상보다 훨씬 신뢰할 만한, 재고해야 할 성취로 비망록에 적어두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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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포스터

내가 본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포스터는 두 가지다. 대도시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론 우드러프(매튜 매커너헤이)가 사업가의 포즈로 정면을 바라보는 판본보다, 병색이 완연한 매커너헤이의 깡마른 전신 측면 사진을 쓴 이 포스터가 월등히 매력적이다. E. T.마냥 앞으로 길게 뻗은 목부터 바지통이 헐렁한 이 영화에서 가장 풍부한 ‘텍스트’ 역할을 하는 배우의 체형을 고스란히 담은 동시에 허리춤에 도전적으로 올린 팔과 그 뒤의 링거 스탠드는, 치명적 질병조차 꺾어놓지 못한 이 남자의 “다 꺼져. 내 식으로 하겠어”식의 태도를 웅변한다. 추어올려진 가방은, <노예 12년>의 대사를 빌리자면 살아남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살겠다고, 새로운 일을 벌이겠다고 시동을 거는 결의를 대변하는 듯하다. 매커너헤이표 추임새만 더해지면 완벽하다. “올롸잇 올롸잇 올롸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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