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말하자면 내추럴 본. 난 오히려 태수에게 인간다운 면모가 많다고 느꼈다. 하루에도 수십번 변하는 게 사람 감정이지 않나. 그냥 태수라는 인간에겐 살인도 가능한 일이었을 뿐이다.” <몬스터>를 본 관객이 새로이 알게 될 점이라면 이민기도 웃지 않는 연기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몬스터>에서 이민기는 황인호 감독이 “절대악”이라고 표현한 캐릭터 태수를 연기한다. 실제 모습이 어떻든 스크린 속의 그는 대개 철없고 쉽게 흥분하지만 마음 씀씀이만은 기특해서 미워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흘렀어도 나이 들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언제든 남동생 혹은 연하 남자친구 역할이 기막히게 잘 어울렸다. 그의 큰 눈도 마냥 강아지 같아 보였을 뿐이다. <몬스터>에서 피 칠갑한 채로 난리를 부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몬스터>에서 이민기는 그에게 한번도 기대한 적 없었던 또는 기대할 수 없었던 역할로 거듭났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어린아이의 목을 조를 수 있는 남자. 사이코패스로도 오해할 법한 냉혈한 태수는 그가 “장르적으로 전혀 다른 변화를 겪고 싶어” 선택한 길이다. “이 역할을 만났을 때 나라서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배우로 살며 가장 신기하고 답답한 것 중 하나가 내가 나를 잘 모르겠다는 거였다. 내게 이런 감정이 생겨? 이런 면이 나와? 안 해보면 몰랐을 테니까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태수가 트라우마로 인해 만들어진 전형적인 살인마였다면 자신 없었을 거다. 해보니 알게 된 건데 태수도 미성숙한 한 인간이었다.”
복순(김고은)의 여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영화에서 이민기는 ‘미친년’ 복순과 뚜렷한 대비를 이루며 영화의 한축을 굳건히 감당해낸다. <몬스터>는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 상황이 만들어져 가는 영화다. 서로 지지 않으려는 두 사람의 기운이 영화 안에서 무섭도록 팽팽하다. 그 맞붙음이 가능한 이유? 영화에서 자신이 어떻게 이용돼야 하는지 이민기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복순의 복수극을 완성하기 위해 태수가 영화의 장치로서 해줘야 할 몫이 분명하다. 복순이 영화의 생생한 템포를 만들어낸다면 태수는 그 사이의 긴장을 조율하면서 복순의 반응을 받아쳐줘야 한다. 둘이 만드는 리듬의 간격이 점점 좁아지면서 끝에 가서 터져주는 거다.” 태수의 임무는 ‘복순의 복수’를 완성하는 것이 아닌 ‘복수극’을 완성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일임을 이민기는 여러 번 강조한다.
원래 마르고 몸 선이 가는 편이었던 이민기는 체지방을 줄이려고 식단을 조절하고 하드 트레이닝을 해 몸을 만들었다. “누군가는 태수의 액션을 보고 코웃음치며 ‘특전사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태수라는 인물 자체가 나태한 것을 못 견디는 인물이라 매사에 날이 서 있다. 움직임이 민첩하고 날렵한 건 당연하다.” 동시에 <몬스터>에서 태수의 액션은 살인마로서의 명성(?)이 무색하게 유독 방어적이기도 하다. 공격해오는 상대를 당장 죽여버리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될 것 같다는 위기감이 태수를 항시 짓누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액션 신은 예상보다 많지 않다. “불필요한 액션의 과잉이 태수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에” 황인호 감독과 상의해 최대한 액션을 줄여나갔다고 한다.
오래전 이민기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그 캐릭터를 하기로 하는 순간 캐릭터는 저절로 만들어진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연기가 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촬영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이미 “그 캐릭터가 되기 위한 사전 준비”가 시작된다는 의미다. “연기하는 순간에 다 보여주는 게 힘드니 스스로 역할에 최대한 맞는 상태로” 만들어둔단다. 태수와 이민기가 “타협”해 가는 동안 이민기의 실제 성격도 “한마디를 하더라도 띠껍게 반응하는” 부정적인 상태로 변해갔다고 한다. “촬영할 때는 굳이 연기를 하지 않아도 내가 태수인 상태였다. 뭘 하든 ‘태수다워야 한다’고 판단해서 운동할 때도, 그냥 걸을 때도 태수처럼 생각하려 했다. 그래서 카메라 앞에 섰을 때 별다른 노력이 필요 없었다.”
웃음기를 지운 대신 조금 더 철이 들었다. <몬스터>를 거치며 이민기는 배우로서도 사람으로서도 의미 있는 한 페이지를 넘긴 듯하다. 남동생 같았던 이미지까지 성공적으로 벗어던졌다. 남자로서의 자신을 정비했으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욕망이 들끓는 남성들의 정글로 뛰어들어갈 모양이다. 그의 발길은 막 촬영을 마친 <황제를 위하여>를 향해 있다. 이기는 자만이 살아남는 도박판 같은 세상, 인생 밑바닥까지 쓸려 내려간 이들이 자신의 욕망을 따라 달려간다는 내용의 누아르다. “등에 칼도 맞아보고, 누군가를 치기도 한다”라는 야구선수 출신의 이환이 이민기의 몫이다. ‘남자’ 이민기의 거침없는 행보가 더욱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