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아프다, 방관자의 이 무기력함이
2014-03-20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스티브 매퀸이 <노예 12년>의 비연대기적 서술을 통해 고통을 강화하는 방법
<노예 12년>

<노예 12년>에는 두 차례의 인상적인 린치 장면이 나온다. 영화 중반, 원래 자유인이었으나 강제로 납치당해 솔로몬이란 이름 대신 플랫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주인공은 다소 온정적인 주인 포드의 호의를 사면서 그의 마음에 들어 언젠가는 자기 신분을 되찾을 희망을 은근히 품는데, 그의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산산이 찢어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자기를 무시하고 농장주의 환심을 샀다고 분노하는 젊은 백인 감독이 플랫을 사적으로 린치하려다 거꾸로 플랫에게 두들겨 맞자 동료 두명을 데리고 와 거대한 나무 기둥에 그를 묶고 죽이려 한다. 그보다 윗자리에 있는 감독관이 재산보호 차원에서 그들의 린치를 막은 뒤 플랫은 주인이 올 때까지 나무에 묶여 있는데 그의 다리는 겨우 진흙땅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거의 반나절 넘게 주인이 올 동안 올가미에 걸린 채로 나무 기둥에 매달려 있는 플랫을 카메라는 오랫동안 응시한다. 풀숏으로 지켜보다가 역앵글로 바꿔 플랫을 근접화면으로 보여주면 그의 등 뒤로 감독관이 멀리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보인다. 다시 반대 각도를 바꾸면 플랫의 등 뒤로 동료 일꾼들이 왔다갔다 하는 게 보인다. 다시 앵글을 돌리면 이번에는 주인 마나님이 구경하고 있고 같은 순서로 역앵글이 잡히면 플랫의 등 뒤로 아이들이 천진하게 놀고 있다. 고통의 시연이라고 할까, 이 장면은 자유인으로의 복귀를 꿈꾸는 플랫/솔로몬의 의지가 완전히 꺾이는 걸 농장의 일상적 풍경 안에 그의 고통이 전시되도록 화면을 배치함으로써 노예로서의 그의 자의식이 자라는 걸 암시하고 있다.

불규칙한 플래시백의 효과

현대영화에서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방식이 물리적으로 길고 집요하게 묘사되는 건 새롭지 않지만 이 영화의 감독 스티브 매퀸은 그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남다른 바가 있다. 데뷔작 <헝거>에서 마이클 파스빈더의 뼈만 남은 몸만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것도, <셰임>에서 채워지지 않는 섹스중독증과 불능 증세의 공허를 역시 마이클 파스빈더의 나신을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도 그랬지만, 이 영화에선 솔로몬/플랫을 연기하는 치에텔 에지오포뿐만 아니라 대다수 흑인 노예의 육체적 감각을 화면에 온전히 잡아두려는 듯 응시하는 장면들을 통해 관객의 잔상에 뭔가를 남긴다. 영화의 후반부에 악랄한 농장주인 에드윈 엡스의 명령으로 그가 총애하는 흑인 여성 노예 팻시를 플랫이 마지못해 채찍으로 고문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때리는 플랫과 그의 채찍에 얻어맞으며 신음하는 팻시 사이를 왕복운동하면서 이전 장면에 비해 훨씬 더 정서적으로 센 고통의 시연을 전개한다. 처음엔 차마 직접 채찍을 들지 못하고 플랫에게 채찍을 들라고 명했던 에드윈 엡스는 팻시를 저주하는 그의 부인 앞에서 팻시를 강간하는 것처럼 쾌락을 느끼며 채찍을 빼앗아들고 잔인하게 그것을 휘두른다. 에드윈이 채찍을 휘두를 때 팻시가 내는 신음소리의 강도는 그전과 다르다. 플랫이 채찍질할 때 그가 채찍을 휘둘러서 고맙다고 말했던 팻시는 에드윈이 채찍으로 공격하자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단말마의 절규를 낸다. 어느 날 밤 에드윈이 자신의 잠자리에 찾아와서 강제로 겁탈할 때도 끝내 몸을 열지 않았던 그녀는 에드윈이 휘두르는 채찍에 살이 너덜너덜해지며 피부 곳곳을 연다. 어떤 장면보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심한 외상이 느껴지는 이 장면이 무서운 것은, 앞서 플랫이 당했던 린치와 달리 팻시 그녀는 자유를 향한 어떠한 갈구도 이미 체념한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플랫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간청해온 터였다. 그녀에게는 사는 게 고통이고 미래에 대한 아무 희망이 없으며 지금 이 순간을 견디는 게 힘들기만 하다. 그런 그녀가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힘들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을 관객이 실감하는 순간은, 잔인하지만 이 가혹한 린치 장면을 통해서다.

<노예 12년>은 주인공 플랫이 대표하는 노예로서의 고통과 불안을 묘사하기 위해 연대기적인 서술을 택하지 않는다. 화면 속에서 솔로몬 노섭은 자유인으로 처음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처음 그를 보게 되는 건 그가 노예 플랫으로 살게 된 뒤 한참이 지나서 에드윈 엡스의 농장에서 일하다가 목화에 전염병이 돈 뒤 에드윈이 인근 터너 판사의 농장에 플랫을 비롯한 흑인노예들을 파견노동 보냈을 때의 시점이다. 플랫은 그때 사탕수수 농장에서 처음 일한다. 플랫이 노동을 마치고 빵과 블루베리가 담긴 접시를 들고 식사를 할 때 그는 블루베리에서 나오는 수분을 저으며 뭔가를 생각한다. 플랫이 자신의 처지를 알리는 편지를 쓰기 위해 필사적으로 잉크와 종이를 구한다는 건 그 뒤로 영화가 한참 전개된 뒤에야 우리가 알게 되는 정보지만 영화 첫 장면부터 관객은 아무것도 짐작하기 힘든 채 그가 블루베리로 뭔가를 만들고자 하는, 곧 잉크 대용물을 만들고자 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 단락에선 또 격한 노동 끝에 모든 노예들이 자고 있는 심야에 플랫이 옆자리에 누워 있는 여성과 섹스 비슷한 일을 치르고 그게 잘되지 않아 여자가 흐느끼는 장면이 배치된다. 이어지는 장면에선 자유인 솔로몬이 아내와 함께 잠자리에서 따뜻하게 애정을 확인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런 식의 불규칙한 플래시백은 이 영화에서 곧잘 시도되고 있는 장면 연결 방식과도 통한다. 플랫이 포드의 농장에서 처음 일할 때 백인 청년감독이 박수를 치라고 강요하는 장면에선 깜둥이들을 조롱하는 노래가 계속 화면에 깔리고 노예들의 노동 장면 다음으로 포드가 성경 구절을 읽으며 예배하는 장면들이 붙는다. 이런 건 나름 거칠긴 해도 충돌의 대위법으로 읽히는 고전적인 방식이지만 시간 경과와 의미 단위의 요소들을 거칠게 섞어 관객으로 하여금 연대기순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주인공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되는 방법과는 다른 길을 이 영화가 택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포드의 흑인 노예 일행이 일하고 돌아오다가 숲 가운데서 미국 원주민들과 조우하는 장면의 연결 화면들도 꽤 특이하다. 플랫을 비롯한 흑인노예들은 미국 원주민들을 접하고 멍한 표정을 짓는데 이는 그들이 사냥한 짐승을 불로 구우면서 원주민들이 춤을 추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플랫은 원주민들의 가무를 유체이탈한 사람의 태도로 구경하는데 그 장면의 여진이 채 이어질 틈도 없이 다음 장면에선 그가 풀숲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는 화면이 붙고 다음 장면에선 주인에게 공사를 더 빨리 할 계획을 나름 과학적으로 세워 인정받는 화면들이 빠르게 이어진다.

요컨대 이런 불규칙한 이종접합처럼 보이는 장면들은 단선적인 심리적 서사를 따라 등장인물들에게 동조할 것을 차단시키고 좀더 구불구불하게 서로 꼬여 있는 장면들의 연쇄를 통해 노예로 살아가는 흑인들의 몸과 마음을 가상체험시키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마이클 파스빈더가 거의 악마처럼 연기하는 에드윈 엡스가 제멋대로 성경을 인용 왜곡하면서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아니한 종은 많이 매질당할 것이오” 운운하면서 이것은 깜둥이가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많이 매질당할 것이라는 뜻이라며 낄낄거리는 장면 다음에 노예들이 들판에서 일하는 광경이 나오면 팻시가 일을 하며 콧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나온다. 그녀는 거의 기계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하는데 그녀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 뒤로는 다른 흑인들이 일하면서 감독관들에게 매질을 당하고 있다. 그렇게 일을 잘하는 팻시는 노동이 끝난 뒤 숙소 근처의 풀밭에 앉아 풀로 인형들을 만들고 마치 그것들이 춤을 추는 듯한 형상으로 풀밭에 세워두는데 그걸 멀리 저택에서 에드윈의 아내, 주인마님이 보고 있다. 그날 밤 술에 취한 에드윈의 강요로 흑인노예들이 자다가 저택으로 끌려와 강제로 춤판을 벌일 때 혼자 좋아라 하는 에드윈과 달리 팻시에 대한 질투심에 눈이 먼 그의 아내는 술병으로 춤을 추던 팻시를 내갈겨 그녀를 쓰러트린다. 관객에게 미리 정서적으로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툭툭 내던지듯이 화면에 묘사되는 디테일들은 얼핏 거칠고 느닷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다음 장면들과의 연결을 통해 한번에 직선적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라 두세번 이야기가 꼬인 다음에 비로소 이어지는 듯한 화면 연결과 상황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고통이 더 강렬하게 전시되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노예 12년>

울부짖던 팻시를 기억하라

이런 화법에서 관객은 플랫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받는다기보다는 그들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는 무기력한 방관자의 느낌을 더 갖게 된다. 우리가 자유를 희구하는 플랫의 심리적 동요와 격정에 더 깊이 연루되었더라면 그의 고통을 보는 것이 그만큼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12년이라는 시효를 두고 주인공이 겪는 고통의 연대기이다. 여하튼 우리는 그가 12년이 지나면 해피엔딩을 맞을 것임을 알고 서사 전개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하는 대신에 우리가 서사에 더 깊이 몰두하여 주인공의 내면에 동화되는 대신 플랫을 비롯한 흑인노예들의 고통에 무기력한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린다는 걸 실감하도록 하는 게 스티브 매퀸 감독 연출의 핵심이다. 기껏해야 영화 초반에 나오는 다소 온정적인 주인 포드의 입장밖에 취할 수 없는 관객인 우리는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한 브래드 피트가 영화 말미에 백인 자유주의자로 등장해 주인공을 구원해줄 때도 그다지 격한 카타르시스를 전달받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격한 감정의 롤러코스터, 고통과 구원의 상승 곡선이 아예 불가능한 서사 통로가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이상한 것은, 플랫이 자유인으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품고 있을 때보다 그가 아예 그 의지를 포기하게 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리하여 영화에서 플랫과 달리 끝까지 죽음과도 같은 노예의 삶을 계속해야 하는 다른 노예들과 그가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하는 듯이 보일 때, 우리도 격한 마음의 움직임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플랫은 주변 인물과 자신 사이에 벽을 치고 있다. 초반에 헤어진 아이들을 잊지 못하는 엘라이자를 책망할 때도, 중반 이후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며 의지하는 팻시로부터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고 거부할 때도, 플랫은 그녀들은 물론 다른 동료들과 자신은 다른 존재인 것처럼 군다. 그런데 그가 여러 차례의 고통을 겪은 뒤, 특히 잠시나마 탈출할 생각을 품고 에드윈의 부인 심부름으로 물건을 사러 가던 길에 숲 샛길로 빠졌다가 사형당하는 두명의 흑인들의 죽음을 목도한 이후 아예 다른 삶을 꿈꾸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죽은 동료의 장례를 치르며 한 늙은 흑인 여인이 구슬프게 부르는 영가에 반응하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그 장면에서 그는 다른 노예들과 심리적으로 같은 상태가 된 것처럼 보인다. 이는 영화에서 그가 당했던 고통의 시연 장면만큼이나 관객에게 통증을 준다.

천신만고 끝에 플랫이 솔로몬 노섭의 이름과 신분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갔을 때의 감격보다 내 인상에 남아 있는 것은 그의 귀환을 보며 처절하게 울부짖던 팻시의 모습이다. 이것은 고통을 견디고 귀환하는 탈출의 서사에 방점을 찍는 게 아니라 끝내 그 고통을 견디며 자신의 내면을 도륙당해야 했던 노예들이 몸으로 겪는 고통에 무기력한 방관자로 남아 있어야 하는 관찰자로서의 관객의 무능을 세심하게 조정하고 성찰하는 영화적 여정이다. 이 영화에서의 정밀한 물리적 감각 묘사는 흑인노예들의 삶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을 강탈하는 백인 주인들의 삶도 끌어안고 있다. 이 영화에서의 묘사는 단순히 정태적인 성찰에 머무는 게 아니라 살아간다는 것이 몸으로 느끼는 통증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줌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의 삶 모두 불행하다는 것에 동의하게 만든다. 채찍질을 가하는 인간이나 채찍질을 당하는 인간이나 땀으로 뒤범벅이 되고 그 관계에는 심리적, 물리적 통증만 남는다. <노예 12년>을 보고 남는 것은 바늘로 내 몸을 찌르는 것 같은 이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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