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젊은 여배우이면서 <어웨이 프롬 허> <우리도 사랑일까>로 촉망받는 감독 대열에도 합류한 사라 폴리. 그녀가 세 번째 장편에서는 더 근사한 실력을 발휘한다. 자신과 가족, 특히 고인이 된 어머니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그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풀어놓는다.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형식적으로는 단단한 그런 영화다. 사라 폴리처럼 마흔두살에 어머니가 그녀를 낳았고, 사라 폴리처럼 서른 즈음에야 가족의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됐으며, 그리움으로 어머니에 대한 단편영화도 만든 적이 있는 영화평론가 이현경씨가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에 대해 따뜻하면서도 분석적인 글을 보내주었다.
어린 시절, 오빠와 언니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라는 말로 놀리곤 했다. 어린 동생을 놀리는 악의 없는 농담이었지만 나는 한동안 진지하게 그 문제를 고민했다. 우리 옆집은 당시로선 드문 근사한 이층집이었는데 나는 그 집 주인이 내 부모가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어른이 되면서 “다리 밑”이 함축한 이중적인 의미도 알게 되고, 형제들의 농담과 내 고민을 어린시절을 장식한 작은 에피소드 정도로 기억하게 됐지만 한때는 꽤나 심각했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을 즈음 오빠와 언니는 놀리는 재미를 잃었고, 슬그머니 그런 농담은 사라졌다. 아마도 이층집에 대한 나의 로망은 의식에서는 사라졌지만 무의식에는 꽤나 오래 있었던지 어른이 되고도 그 집이 등장하는 꿈을 종종 꾸었다. 그 집이 내 꿈에서 사라졌을 때 나는 진짜 어른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가족 로맨스의 반대 지점에서
자신의 친부를 찾는 내용이 담긴 사라 폴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가족 로맨스의 반대 지점에 놓일 수 있는 영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년기에 자신의 친부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한번쯤 상상하곤 한다. 프로이트는 이런 상상을 ‘가족 로맨스’라는 틀로 분석했다. 자신이 업둥이나 사생아라는 생각은 부모의 권위를 의심하면서 생겨난다. 훨씬 재능 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진짜 부모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환상은 아이들을 여러 측면에서 위로해준다. 현재 부모에 대한 불만족이나 근친상간적인 욕망을 죄책감 없이 해소 혹은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난 기능이고 심층적으로는 부모에 대한 애정을 강화하는 순기능을 갖는다. 즉, 이상화된 부모상을 회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환상이다. 부정적인 상상이 궁극적으로는 현실의 가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결과로 마무리되는 것이 가족로맨스다. 사라 폴리 감독은 ‘로맨스’가 아니라 지독한 ‘현실’을 보여준다. 인위적인 봉합을 거부하는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할 것인지 고민한다.
이야기를 창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보고 들은 것을 소재로 삼는다. 어느 쪽이든 이야기는 허구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인생이 책 한권 이상의 파란만장한 스토리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를 실천에 옮겨 소설이나 영화를 만들면서 낭패를 보곤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너무 잘 아는 이야기를 허구적인 산물인 서사체로 옮기면서 거리 조절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때 소설 습작을 하면서 나도 겪었던 일이다. 내 경험을 골간으로 허구적인 서사를 짜는 과정에서 진짜를 얼마나 섞을지 고심하다 힘 조절이 안 된 것이다. 날것을 가공한다면서 진짜배기는 빼버리고 그럴듯해 보이는 봉합으로 마무리한 엉성한 소설이었다. 있는 그대로를 모아도 있는 그대로가 되지 않는다. 오슨 웰스의 걸작 <시민 케인>은 그걸 알려준 대표적인 영화다. 케인이라는 문제적 인물을 알기 위해 모든 것을 끌어모았지만 케인이라는 실존적인 존재를 알 수 없었다. 만약 케인이라는 진짜 인물이 있고 그가 자기 이야기를 한다면 케인이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한 인물을 완벽하게 복원할 수 없으며 진실은 알기 힘들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다큐멘터리는 픽션보다도 거리두기가 더 어려울 수 있다. 캐나다 여성감독 사라 폴리는 캐나다의 대표적인 여성작가 마거릿 애트우드 소설의 한 구절에서 영화를 시작하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설명하기 위해서다. “자기 자신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스토리라기보다 혼돈, 어두운 포효, 맹목, 산산조각 난 유리 잔해, 쪼개진 나뭇조각, 회오리바람에 휩싸인 집, 빙산에 충돌한 배”라고 표현한다. 요지는 자기 경험이 스토리(story)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간은 거리를 의미한다. 숲속에 있는 사람은 숲 전체를 볼 수 없다. 스토리는 이야기 밖에 자신을 둘 수 있을 때 만들어진다.
아버지 vs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감독이 본인의 가족사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기 위해 고심한 흔적을 영화 형식을 통해 보여준다. 사라 폴리의 아버지는 자기 기록을 낭독하라는 딸의 주문을 받고 녹음실 스튜디오에서 글을 읽는다. 사라 폴리의 아버지가 읽는 초반부의 기록은 진짜 아버지의 기록이 아니라 마거릿 애트우드의 <앨리어스 그레이스>라는 소설의 한 구절이다. 하녀였던 16살의 앨리어스 그레이스는 1843년 자신의 주인과 주인의 정부를 살해한 범죄자로 알려져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정신병원에 수감된 앨리어스 그레이스를 인터뷰하는 형식을 빌려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사라 폴리 감독은 애트우드의 소설을 인용하는 장면을 통해 여러 가지를 이야기한다. 현실을 현실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허구의 틀이 필요하다는 아이러니한 고뇌, 진실을 찾는다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 등이 담긴 장면이다.
사라 폴리 감독은 13살 때 형제들이 농담처럼 건네는 “네 아버지는 따로 있어”라는 말을 듣게 된다. 18살에는 자신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이 제프 보우스라는 걸 알게 된다. 사라 폴리 감독의 부모인 마이클 폴리와 다이앤 폴리는 배우였다. 제프 보우스는 다이앤이 사라를 임신한 시절 함께 공연한 세 남자 배우 중 한명이다. 다이앤은 42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출산을 하게 된다. 첫 번째 결혼에서 이미 남매를 둔 다이앤은 마이클과 사이에서 다시 남매를 얻은 뒤 사라를 낳았다. 다이앤은 1990년 암으로 사망한다. 사라 폴리는 영화감독이 된 뒤 자신의 가족사를 다큐멘터리로 만들 생각을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인터뷰부터 진행한다. 아버지, 네명의 언니 오빠, 엄마의 지인들, 그리고 자신의 생부라고 생각한 인물까지 그녀의 인터뷰는 방대하다.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새로 만나야 할 사람들이 추가되고 마침내 생물학적 아버지와 또 다른 언니까지 인터뷰는 리좀(rhizome) 형태로 확대된다.
다큐멘터리 속에는 비토리오 데 시카의 영화 <이탈리아식 결혼>이 언급된다. 사라의 부모가 <이탈리아식 결혼>의 원작인 에두아르도 데 필리포의 희곡 <필루메나 마르투라노> 공연에 동반 출연했다는 사실에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이는 사라의 현실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이탈리아식 결혼>에서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는 소피아 로렌과 오랜 세월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바람둥이다. 소피아 로렌은 어느 날 그에게 결혼을 요구하는데 그 이유가 세 아들 중 한명이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누가 자신의 아들인지 알아내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다 결국 실패하고 둘은 결혼한다. 생물학적 아버지와 부정(夫情)에 대해 유쾌하게 통찰한 코미디다.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에는 두명의 아버지가 존재한다. 사라에게 폴리라는 성(姓)을 물려준 마이클 폴리, 유전자를 전달해준 생물학적 아버지 해리 걸킨이 그들이다. 이 영화에는 키워준 아버지, 생물학적 아버지와 딸인 사라 폴리 사이에 형성되는 복잡한 마음의 그물망들이 켜켜이 잘 드러난다. 두 아버지와 딸은 서사의 향방에 대해 논의하고 갈등을 빚게 된다.
두 아버지는 서사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배우이자 작가인 마이클 폴리는 딸이 찍는 다큐가 가능하면 편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어야 진실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마이클은 감독이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다큐가 끝나면 관객이 스스로 깨달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영화 제작자인 해리 걸킨은 모든 인물을 같은 비중으로 다룬다는 데 강하게 반발한다. 다이앤이 사망했으므로 자신과 사라가 사건의 당사자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직접 영향을 받거나 간접 영향을 받은 인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를 동등하게 대하면 다른 서사(different narrative)들이 충돌할 테고 그렇게 되면 작품의 본질이 모호해지며 진실도 가려진다고 생각한다.
해리 걸킨이 서사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은 고전적이다. 이야기에는 위계가 있으며 예술은 진실을 규명하는 데 미덕이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마이클 폴리는 딸 사라에게서 친부를 찾았다는 말을 들을 때 진실이 드러나는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굉장한 이야기(great story)를 쓸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이틀을 꼬박 서재에 틀어박혀 다이앤과 만난 이후의 삶을 서술한 마이클은 자신의 내면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고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엔딩 크레딧이 중요한 이유
마이클은 자신의 인생을 글쓰기(storytelling)할 수 있는 추동력과 거리감을 얻은 것이다. 사라 폴리 감독도 향방을 알 수 없는 다큐를 시작했지만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게 된다. 사라의 오빠 조니는 자신의 추억을 들려주는 긴 인터뷰 끝에 “이 다큐의 주제가 뭐지?”라고 질문한다. 사라 폴리는 이때쯤 자신의 다큐의 주제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이야기의 불일치”이다. 사라 폴리는 해리 걸킨이 걱정했던 모호한 서사를 선택한 것이다. 사라 폴리는 활력 넘치는 유쾌한 여성이자 양육권을 뺏긴 캐나다의 첫 번째 사례자이기도 한 엄마 다이앤과 그녀 주변의 인물들을 평가하지 않는다.
마이클 폴리가 무심히 파리에 대해 설명하는 말이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의 스토리텔링 방식이다. 창문에서 윙윙거리는 파리를 발견한 마이클은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파리는 생을 연명하며 짝을 짓겠지만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본능적인 행동을 할 뿐이라고 말한다. 마이클은 자신도 “묵묵히 상황을 받아들인 채 계속 갈 것이다”(I will go on)라고 담담히 말한다. 모든 서사가 마이클 폴리 방식으로 쓰일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때론 그것이 가장 겸허하고 공정할 수 있다.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의 엔딩 크레딧은 특별하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 이름은 스토리텔러(storytellers)라는 명칭 아래 적어놓고, 인터뷰한 인물로 분한 배우들 이름은 캐스트(cast)로 분류했다.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에서 진실과 허구가 어디서 어떻게 뒤섞여 있는지는 분간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걸 분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마이클 폴리가 흥미로운 인간사를 이야기(story)하고 싶다는 충동으로 미친 듯이 글을 쓴 것처럼 사라 폴리도 개인적인 상처, 복잡한 가족사를 이야기로 풀어내고 싶다는 오랜 숙원을 완성한 것이다. 결국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이야기 내용보다 이야기하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 이는 형식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담긴 이야기의 모든 것을 수용하고 열린 상태로 놓아두기 위함이자, 다큐에 등장하는 스토리텔러들을 존중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