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의 바디무비]
[김중혁의 바디무비] 시간의 구멍을 들여다보며
2014-03-20
글 : 김중혁 (작가)
일러스트레이션 : 이민혜 (일러스트레이션)
몸이 삶을 반영한다고 믿는 K, <길버트 그레이프>를 떠올리다

길 가다 가끔 사람들의 몸을 몰래 볼 때가 있다. 비현실적으로 날씬한 몸매의 여자가 지나가는 걸 볼 때도 있고, 엄청나게 거대한 사람이 뒤뚱거리며 지나가는 걸 볼 때도 있고, 옷 속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깡마른 사람의 뒷모습을 볼 때도 있다. 한 사람의 몸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고, 나는 몸을 보면서 그 사람의 삶을 상상해보곤 한다. 왜 어떤 사람은 말랐고, 어떤 사람은 뚱뚱할까. 거대한 남자가 혼자 밥 먹는 모습을, 날씬한 몸매의 여자가 아침에 일어나 저울에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때로는 그런 상상을 소설로 옮기기도 한다. 아마도 내 상상은 많이 틀릴 것이다. 사실과 다를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몸만 보고 한 인간의 내밀한 삶을 쉽게 상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몸이 삶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삶은 몸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무척 좋아하는 단편소설 중에 레이먼드 카버의 <뚱보>라는 작품이 있다. 이야기는 짧고 간단하다. 식당의 여종업원이 어떤 손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다. 어느 날 뚱뚱한 남자가 식당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뒤에서 몰래 손가락질을 할 정도로 뚱뚱한 남자였다. 뚱보는 시저 샐러드부터 빵과 양고기와 초콜릿 시럽을 묻힌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메뉴를 주문한 뒤 그걸 차근차근 다 먹었다. 이야기는 그게 전부다. 종업원과 뚱보는 짧은 대화를 나눈다. 뚱보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우린 언제나 이렇게 먹지는 않아요.” 종업원이 대답했다. “전 먹어도 먹어도 살이 안 쪄요. 살이 찌면 좋겠는데.” 그러자 뚱보가 다시 대답했다. “안 돼요.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찌지 않는 게 좋아요.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죠.” 여종업원은 뚱보 남자에게서 묘한 연민을 느낀다. 동료 종업원들이 키득거리면서 뚱보를 비웃자 이렇게 쏘아붙인다. “조용히 해, 저 사람이라고 저렇게 되고 싶었겠어”라고. 이렇게 덧붙이기도 한다. “맞아, 저 사람은 뚱뚱해, 그렇지만 그게 다는 아냐.” 종업원의 이야기는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종업원은 집에 돌아가서 이상한 체험을 한다. 남자친구와 섹스를 하려는데, 자신이 엄청난 뚱보처럼 느껴진 것이다. 점점 부풀어져서 남자친구가 자신을 안지도 못할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30분이면 다 읽을 짧은 분량이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야기는 아코디언처럼 넓게 펼쳐진다. 뚱보는 왜 뚱보가 됐을까. 그는 왜 먹기 시작했을까. 어쩌다 먹는 걸 멈출 수 없게 됐을까. 종업원은 뚱보에게서 무얼 발견한 것일까.

우리가 살면서 매번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몇개의 선택 중에 가장 나은 선택을 고를 수 있다면 세상에 나쁜 일은 하나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 언제나 그렇게 먹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 그 대사를 읽으면서 나 역시 뚱보 남자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뚱보에게 느끼는 연민이기도 했지만 나 자신을 향한 연민이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의 몸은 우리의 불가항력을 드러내는 상징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늘 조심스럽게 다루지만 예기치 않은 곳에서 고장이 발생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지만, 몸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레이먼드 카버의 <뚱보>를 생각할 때마다 짝패처럼 떠오르는 영화가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길버트 그레이프>다(디카프리오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어야 했다. 상이 꼭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길버트 그레이프>에도 어마어마한 뚱보가 등장한다. 길버트 그레이프(조니 뎁)의 엄마 보니 그레이프(다렌 케이츠)는 젊은 시절 대단한 미인이었지만 남편이 목을 매달고 자살한 다음부터 무언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7년 동안 집 밖으로 한번도 나가지 않고 정신없이 살았고, 결국 226kg에 육박하는 뚱보가 되고 말았다. 7년의 하루하루가 쌓여서 226kg이 되었다. 7년 동안의 일들을 함부로 짐작할 수 없다. 어떤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오고 갔을지, 마음은 얼마나 잘게 부서졌을지, 짐작할 수 없다. 아득한 시간들이 보니 그레이프의 곁을 천천히 지나갔을 것이다.

사람들은 보니를 ‘인간 고래’라 부른다. 길버트는 엄마 몰래 지하실로 내려가서 언제 꺼질지 모르는 거실 아래에다 버팀목을 댄다. 길버트의 소망이라곤 가족들과 함께 새집에서 사는 것, 그리고 엄마가 에어로빅이라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 고래인 보니가 경찰서에 갇힌 정신지체아 아들 어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데리러 딱 한번 외출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들은 인간 고래를 보고 쑤군거리고, 손가락질하고, 사진을 찍기까지 한다. 보니는 아들 길버트에게 말한다. “이렇게 되고 싶진 않았는데…. 놀림감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결국 보니는 2층으로 힘겹게 올라간 뒤 침대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죽은 그녀를 옮기는 일도 막막하다. 경찰들은 방위군이 동원돼야 그녀를 옮길 수 있을 거라는 농담을 한다. 결국 길버트의 선택은 더이상 엄마가 놀림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엄마와 함께 집을 불태우는 것이다. 길버트는 집 안의 물건들을 전부 밖으로 꺼낸 다음 집에 불을 붙인다.

지금까지 <길버트 그레이프>를 여러 번 보았다. 보니가 경찰서에 가서 ‘내 아들을 내놓으라’고 소리지르는 장면, 길버트가 집을 태우는 장면은, 볼 때마다 눈물이 고인다. 집 안에서 불타고 있을 보니 그레이프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보니는 처음부터 그렇게 뚱뚱하진 않았다.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았다. 놀림감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사람은 없다. 어느 날 남편이 죽었고, 남겨졌고, 막막했을 것이고,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마음속에 생겼을 것이다. 보니는 커다란 구멍을 채우기 위해 계속 먹었을 것이다. 나는 보니의 7년을 상상해본다. 아마도 보니의 7년은 내 상상과 다를 것이다. 보니에게는 내가 모르는 다른 일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상하지 않는 것보다는 상상해보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게 내 입장이다. 아마 그래서 내가 지금도 소설을 쓰고 있는 거겠지.

나는 상실에 대해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보다 상실을 상상하게 하는 이야기가 더 좋다. 무언가 잃어버리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보다 이미 많은 걸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에 매혹된다.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주는 이야기보다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든다. 이야기 속에 커다란 구멍이 들어 있는 게 좋다. 매력적인 이야기들에는 대체로 커다란 구멍이 들어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뚱보>에도 <길버트 그레이프>에도 커다란 시간의 구멍이 들어 있다. 우리는 구멍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메우고 싶어진다. 메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구멍의 넓이와 깊이를 가늠해본다.

인간은 결국 시간 속에서 소멸해가는, 스스로를 상실해가는 존재들이다. 우리의 몸은 소멸의 징후를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전광판인 셈이다. 나이가 들면 뼈는 삐걱거리고, 어디선가 시간의 살덩이가 날아와서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한다. 시간이 갈수록 몸을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전혀 다른 맥락일지도 모르지만, 레이먼드 카버의 <뚱보> 마지막 단락을 인용하며 이 글을 끝내고 싶다. ‘뭘 기다리는 걸까. 난 알고 싶다. 8월이다. 내 인생은 변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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