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인물이 가진 연약함에 집중하는 게 재밌다.” 이 말은 클라이브 오언이 <블러드타이즈>(감독 기욤 카네, 2012)의 작업을 마친 뒤 가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런데 클라이브 오언이 평소 갖고 있던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이 말은 약간 의외이다. 왜냐하면 그는 대부분 굳센 의지를 가진 강인한 인물, 또는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인물들을 연기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물들을 연기하는 클라이브 오언은 다양한 감정과 표정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잠깐 눈을 감고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클라이브 오언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그의 무표정하고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이 가장 먼저 그려질 것이다. 1964년 영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연기를 꿈꿨던 이 배우는 지금껏 연기한 주요 배역들에서 활짝 웃는 얼굴을 보인 적이 거의 없으며, 마찬가지로 가벼운 인물을 연기한 적도 거의 없다. 그는 특유의 바위 같은 표정과 함께 무겁고 진지한 인물들을 도맡아 연기하며 자신의 연기 경력을 쌓아왔다.
구체적인 예들을 하나씩 꺼내 기억을 정리해보자. <고스포드 파크>(감독 로버트 알트먼, 2001)에서 클라이브 오언은 단정한 복장을 갖춘 채 자신의 속내를 딱딱한 표정 뒤로 숨기는 집사를 연기했으며, 자신의 이름을 대중에 널리 알린 <클로저>(감독 마이크 니콜스, 2004)에서는 어떤 선을 절대 넘지 않는 젠틀한 의사를 연기했다.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자신이 바람을 폈노라고 상대에게 조용히 고백하는 모습이나 목이 터질 듯 애인을 저주하다가도 순간 싸늘한 표정으로 이별을 고하는 그의 연기는 지금도 그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연기 스타일이 가장 빛을 발한 건 하드보일드 장르였다. 프랭크 밀러와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씬 시티>(2005)에서 사람 한둘은 눈도 깜짝 안 하고 죽여버리는 인물을 연기한 클라이브 오언은 브루스 윌리스나 미키 루크, 베니치오 델 토로, 마이클 매드슨 같은 마초에 특화된 배우들 사이에서도 이들에게 전혀 뒤처지지 않는 거친 남자의 에너지를 선보였다. 고독한 눈빛과 찡그린 미간만으로 모든 장면의 연기를 소화하며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이미지를 극대화한 것이다. 그리고 <씬 시티>에 앞서 킬러로 출연했던 <본 아이덴티티>(더그 라이먼, 2002)에서는 아예 감정이 없는 인물을 맡아 <씬 시티>와 반대의 지점에서 장르영화에 최적화된 인물을 연기했다. 죽는 순간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았던 살인기계를 맡기에 강한 이미지를 가진 클라이브 오언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감정의 여백을 만들어내는 법
물론 클라이브 오언은 하나의 이미지만을 게으르게 반복하는 배우는 아니다. <클로저>에서도 그는 순간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영리하게 변주하는 연기를 선보였고, 2006년에 알폰소 쿠아론과 함께 만든 <칠드런 오브 맨>에서는 클라이브 오언 특유의 연기가 좋은 이야기와 연출을 만나면 어떤 시너지 효과가 나는지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일단 한번 시작하면 쉴 새 없이 마지막 장면까지 달려버리는 이 강렬한 파토스의 영화에서 클라이브 오언은 현실에 지쳐버린 무기력한 인물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투사로 변화하는 인물을 연기한다. 그런데 이때 주목할 것은 그 드라마틱한 캐릭터의 변화에 비해 외적으로 보이는 그의 연기가 크게 변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캐릭터의 극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예의 우울하고 피곤한 표정을 일관적으로 유지했다.
“내가 연기한 인물은 이런 (블록버스터)영화에서는 흔치 않은 인물이다. 왜냐하면 영화가 반이 넘게 진행되도록 이 남자는 사건의 현장에 있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주저할 뿐 아니라 무관심하고 시니컬하고 우울하고 슬픈, 그런 주인공이다. 주인공이 흔히 갖고 있는 특징은 아니다. 그리고 사건에 결국 끼어들고 난 다음에도 그는 여전히 희망을 가지지 않는다.”
한 인터뷰에서 클라이브 오언이 스스로 설명했듯이 <칠드런 오브 맨>의 테오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한 가지 태도를 유지하는 인물이며, 클라이브 오언 역시 자신의 연기 스타일을 큰 변주 없이 그대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연기가 결과적으로 미묘하고 풍부한 뉘앙스를 만들어내고, 결국 마지막에는 작은 감동의 순간까지 만드는 것은 그의 변함없는 찌푸린 표정과 외부 상황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 연기가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쓰는 안간힘의 지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어떤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그 감정을 안으로 갈무리하는 연기를 통해 감정의 여백을 만들어내는 배우이다.
이는 기욤 카네 감독이 제임스 그레이의 각본으로 만든 누아르영화 <블러드타이즈>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찰인 동생과 평범한 생활을 원하는 아내를 두고서도 결국 범죄에 이끌려 자신과 가족들을 비극 속으로 밀어넣는 크리스란 인물을 연기한 그는 이 영화에서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주었던 연기의 종합을 보여준다. 별로 말이 없고 무뚝뚝하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연기 말이다. 하지만 그는 크리스를 연기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언제나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인물에 끌려왔다. 크리스는 거친 범죄자이고 나쁜 인물이지만 그 속의 연약함에 집중하는 게 재밌다. 내가 이 역할을 맡은 건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바로 그가 매우 복잡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말이다. 클라이브 오언은 연약하고 복잡한 인물인 크리스에게 흥미를 느끼면서도 연약하고 복잡한 연기를 선보이는 대신 오히려 더 단호한 제스처와 굳은 표정을 선보인다. 그리고 이 연기는 결과적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크리스가 세게 다문 입술과 미간 사이 주름 뒤에 숨긴 그의 연약함을 상상하게 만든다. 즉 깨지기 쉬운 내면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연약함을 감추고 있는 외면을 보여준 것인데, 이것이 클라이브 오언의 얼핏 단순해 보이는 연기가 작품마다 서로 다른 뉘앙스를 세밀하게 빚어내는 방식이다.
영화의 마지막, 자신이 빚은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던 크리스는 결국 어떤 선택을 내리고 가만히 그 결과를 기다린다. 물론 이때도 그는 변함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말로 포착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전해지는 것은 클라이브 오언의 얼굴이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 크리스의 내면이 어떤 지옥을 겪고 있는지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그의 연기는 도무지 이 인물이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정확하게 읽어낼 수 없어 오히려 더 생생한 감정을 그려보게 하는 그런 연기이다.
magic hour
1초 인생 연기
클라이브 오언은 웬만해서는 육체적인 아픔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등에 박힌 총알을 뽑아내도 신음 하나 내지 않았던 <블러드타이즈>는 물론이고, 귓불이 날아갔던 <인터내셔널>(감독 톰 티크베어, 2009)과 배에 총을 맞았던 <칠드런 오브 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본 아이덴티티>나 <씬 시티>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는 아주 살짝만 찡그린 얼굴과 함께 여러 영화에서 강인한 육체를 가진 인물의 터프함을 멋지게 연기해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제이슨 스타뎀이라면 어떨까. 킬러들의 화끈한 액션을 그린 <킬러 엘리트>(감독 개리 매켄드리, 2011)에서 영국 특수부대 SAS 요원을 연기한 클라이브 오언은 앞서 언급한 영화들을 뛰어넘는 강력한 액션을 선보이지만 단 한 순간, 약한 모습을 보이고 만다. 제이슨 스타뎀과 1대1로 싸우다가 영 좋지 않은 곳을 가격당하고 만 것이다. 이때 보여준 1초도 안 되는 그의 짧은 연기는 이전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강렬한 고통을 직접적으로 연기한 순간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