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세상을 멸하라고 누가 명했는가
2014-04-03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신의 심판과 인간의 심판 사이에 있는 <노아>의 어떤 기괴함
<노아>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노아>를 일반적인 재난블록버스터 혹은 종말론적 SF 범주의 코드로만 한정지어 말하는 건 어딘지 부족해 보인다. 이 영화의 매력을 거론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예사롭지 않은 특수효과가 돋보이는 장면이 많아서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더 특별한 매력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차라리 <노아>는 전반적으로 볼 때 투박하지만 일면 기괴하다. 투박하다는 건 영화의 미진한 만듦새를 지적하기 위한 비판의 표현이지만 기괴하다는 건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질문들이 긴장감 있고 매력적이라는 호감의 표현이다. 지금은 그 질문들, 투박함보다 기괴함에 대해 말하고 싶다.

기괴함은 불균질함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불균질함은 신의 심판 이후에 인간의 심판이라는 예상치 못한 비약적 전개에서 비롯된다. 나는 이 영화가 신의 프로젝트 혹은 그걸 수행하는 인간의 모험극으로 끝날 것이고 더 나아간다 해도 거기 기발한 장르적 결합 정도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영화의 초/중반까지만 해도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중/후반부에 이르자 뚜렷한 변화가 감지됐다. 신의 드라마는 인간의 드라마로 차원 이동하여 비약하고 거기엔 얼마간의 서사적 느슨함과 지루함도 함께 자리잡는다. 하지만 몇 개의 중요한 질문과 오답과 그것들에 근거한 노아의 과격하고도 결정적인 행위(그러니까 우리가 인간의 심판이라고 말한 그것)가 울퉁불퉁한 경로를 거쳐 함께 새겨진다. 그러한 것들이 이 영화의 불균질하고 기괴한 인상을 자아낸다. 영화의 완성 직후 제작사 파라마운트가 염려한 것, 하지만 감독 애로노프스키가 지키려 한 것이 바로 이와 연계된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들이었을 것이다.

나는 앞서 ‘종말론, 가족 드라마, 노아의 해석’이라는 세 가지 정도의 축약된 관점에서 이 영화를 소개하는 글(<씨네21> 946호)을 급히 썼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이 부분에 대한 수정과 보충의 필요를 느끼게 됐다. 질문은 추가되어야 하고 <노아>에는 그럴 만한 여지가 있다.

신의 말을 듣지 않고 보는 것의 문제

성서에서 노아가 어떠한 방식으로 신의 뜻을 전달받는지 복기하며 시작해보자. 내가 갖고 있는 조금 얇은 성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중략)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신이 자신의 의중과 계획을 노아에게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물론이다, 이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지금 다시 이것을 복기하자고 제안하는가.

“이르시되”라는 표현이 지금의 핵심이다. ‘이르다’ 하는 것이 실은 ‘말하다’인 것은 자명하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라고 할 때 그 표현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시되’이다. 신은 종종 인간에게 자신의 뜻을 하달하고자 한다. 성서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는 존경과 중요의 의미로 높여 부르며 ‘말씀’이라고 칭한다. 그 말씀은 확실한 말이고 지켜져야 하는 말이며 여기엔 수행자의 자의적 곡해나 오해나 추측이 없어야 한다. 신이 스스로 비유의 어법을 택하지 않는 이상, 인간은 그 말뜻 그대로 거기에 무언가 더하거나 덜하지 않으면서 틀림없이 수행해야만 한다.

노아에게 말할 때에도 신은 비유를 쓰지 않았으니 성서의 노아도 신의 말씀을 듣고 들은 바 그대로 수행한다. 애로노프스키는 노아의 이야기가 “첫 번째 종말론”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이것이 신의 말씀을 듣고 그의 뜻대로 수행한 첫 번째 수행자의 이야기라고 고쳐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정확한 수행에 앞서 반드시 필수적인 건, 신이 노아에게 말했다는 것이고, 노아가 그걸 들었다는 것이다.

영화로 옮겨질 때에도 ‘신의 말씀을 듣는다’는 이 점은 중시되어왔다. 창세기의 일화들을 묶어 존 휴스턴이 연출한 1966년의 영화 <천지창조>에서 존 휴스턴 자신이 노아의 역할을 맡아 연기할 때 그는 신이 노아에게 말하는 장면을 결코 빠뜨리지 않았다. 신이 부를 때 짐짓 그게 어디서 들려오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르던 노아는 뒤늦게 신의 음성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머리를 조아리고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다. 성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신이 말하고 노아가 듣는 장면이 이 영화엔 포함된다.

그렇다면 <노아>의 주인공 노아는 신의 말씀을 어떻게 듣는가. 성서의 그 장면은 영화에서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 놀랍게도 성서의 그 장면은 이 영화에 없다. 노아는 아무 말씀도 듣지 못한다. 노아는 단지 본다. 노아가 보는 건 꿈에 나타나는 계시의 이미지다. 노아가 말씀을 듣지 못하고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우선 노아의 탓이 아닌데, 그건 신이 들리는 말씀 대신 보이는 이미지의 계시를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노아>의 노아에게 내려지는 건, 말씀이 아니라 이미지다.

말씀이 아니라 이미지. 성서의 노아와 <노아>의 노아가 갖는 이 명료하고 확실한 차이는 예상보다 훨씬 더 큰 쟁점을 품고 있다. 성서의 노아는 말씀이라는 유일성을 지키는 확실한 수행자로서의 노아인 반면, <노아>의 노아는 시각적 계시라는 폭넓은 이미지의 모호한 해석자로서의 노아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말하기 위해 얼마간의 우회를 거쳐야만 한다.

듣는 노아가 아니라 보는 노아, 라는 이와 같은 획기적 전환은 성서와 이미지 혹은 기독교로 대표되는 일신교적 신성과 이미지 사이에 있어 왔던 오래된 문제를 주의 환기시킨다. <이미지의 삶과 죽음>(글항아리 펴냄)에서 레지스 드브레가 전하는 몇 가지 문장을 짧게 나열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유대의 하느님은 말로써 중개된다”, “말씀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고 견신은 거짓 능력이다”, “그리스 사람의 눈은 낙관적이지만 유대 사람의 눈은 상서로운 신체기관이 아니다”, “성서에서 눈은 속임수와 그릇된 확신과 관련된 신체기관이다”, “성경에서는 어쨌든 눈으로 보는 것을 명백하게 원죄와 결부시킨다”고 드브레는 전하고 있다.

“시각적인 것은 죄에 약하다”는 명제 그리고 “이미지라는 원죄”의 문제가 여기 있다. 보이지 않을 뿐 저 어딘가에 확실히 존재하며, 나타날 때는 유일하게 말씀으로만 나타나는 귀중하고 희소한 비가시적 신을 믿어야지, 당장 눈앞에 쉽게 보이고 익숙한 저 가시적 신(견신)을 믿기 시작하면 그와 유사하고 값어치 없는 우상에도 속아 그것을 섬기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경계심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물론이지만 이러한 맥락은 <노아>의 보는 노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문제는 아니다. 노아가 꿈에서 보는 건 신의 현현이 아니라 신이 펼친 계시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을 역으로 유추해볼 수는 있다. 왜 이미지는 일신교인 기독교에서 위험한 것으로 판단되었던 걸까. 오히려 이미지가 중간이며 중립이기 때문은 아닐까.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라는 명제를 우린 잘 알고있다. 단 하나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번지고 제시되고 설명되는 것이 가능한, 중립적이고 모호한 상상의 여지를 주는 것이 이미지라면, 하나의 익숙한 성상이 단 하나의 신이 아닌 그와 유사한 우상까지도 받아들이게 할 터이니 그건 경계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게 숨겨진 핵심이 아닐까. 말씀은 확실하지만 이미지는 모호하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무수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열린 해석의 가능성이 그 위험성으로 인식된 건 아닐까.

인간을 멸하고자 하는 노아의 해석

영화로 돌아와보자. 왜 애로노프스키는 신의 말씀을 듣는 노아가 아니라 신의 이미지적 계시를 보는 노아를 설정한 것일까. <노아>에서도 중대한 문제는 이미지에 대한 해석인 것처럼 보인다. 아니 실은 이미지를 보게 됨으로써 그걸 해석하는 자의 위치로 가게 된 해석자 노아의 입지가 중요해진 것이다. 노아가 말씀 대신 이미지와 교감하게 된 이 사태를 아주 간단하게 대답할 수는 있다. 이 영화를 하나의 거대한 시각적 프로젝트로 완성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결정적인 그 장면에서 우두커니 서서 말을 듣는 것보다는 무언가 이미지로 꿈꾸는 것이 훨씬 더 시각적으로 화려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뿐일까. 만약 그렇다면 애로노프스키는 왜 영화의 중/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시각적 효과들을 거의 수거한 채로 심리극 내지는 도덕극이라고 불러야만 하는, 경우에 따라서는 따분하고 지루하기 십상인, 노아와 가족들간의 그 갈등을 쥐고 놓지 않으려 하는가. 오히려 우리는 이 단절되어 이상한 구조를 해석자로서의 노아라는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정작 노아와 그 가족의 갈등이란 신의 뜻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에서 기인한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신의 뜻이란 노아가 꿈속에서 이미지로 보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으니 그 이미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가 핵심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다소 복잡하다.

노아는 두번의 계시적 꿈을 꾼다. 첫 번째 꿈은 피로 흥건히 젖어 있는 땅에 발 딛고 있는 자신이다. 이내 그 대지 위로 비 한 방울이 툭 하고 떨어지더니 꽃이 핀다. 그러다 갑자기 홍수가 밀려와 사람들이 대거 수몰당하는 것으로 바뀐다. 두 번째 꿈에서도 수몰의 현장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번에 물속에 잠겨 있는 건 대개 짐승들이다. 그 짐승들이 수면 위로 솟구쳐 올라온다.

이 두번의 꿈은 사실상 어떻게든 해석될 수 있는 다양한 여지가 있다. 하지만 노아는 이 꿈의 이미지를 이렇게 주도적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재앙이 올 것이라는 계시다. 대홍수가 올 것이다. 사람이 죽을 것이다. 짐승들도 죽겠지만 나는 그들을 암수 한쌍씩 태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 거대한 방주를 만들어야 한다. 대홍수는 노아의 해석대로 실제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니 이 이미지에 대한 노아의 적극적인 해석과 그에 따른 실천적인 방안은 얼마간 주효한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노아는 강경한 해석 하나를 더 갖게 된다. 인간은 더이상 나아질 가망성이 없을 정도로 타락했으니 어떤 인간도 살아남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가족 이외에 어떤 사람들도 방주에 태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가족이라도 인간의 사악함이라는 면모에 있어 제외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내와의 언쟁 속에서 가족들의 사악함을 하나씩 지적한다. 심지어 노아는 자신과 가족들도 신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고 나면 멸족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후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첫째 아들 셈의 아내 일라가 아이를 임신하자 아들이라면 더이상 후대를 낳지 못할 터이니 살려두겠지만, 딸이라면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이것이 후반부의 큰 갈등 구조를 만들어낸다.

더 길고 험악한 갈등은 둘째 아들 함과의 관계에 놓인다. 첫째 아들 셈에게는 여인 일라가 있지만 함에게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함은 자신의 짝이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성서와의 큰 차이다. 성서에서 노아는 자신의 아내와 세 아들과 세 며느리를, 즉 짝이 맞는 후손들을 방주에 태운다. 하지만 영화에서 노아는 함의 짝이 될 수 있었던 젊은 여인조차 위기에서 구하질 않는다. 그것이 함과의 골 깊은 갈등의 불씨가 된다. 노아는 왜 아들의 짝을 구하질 않는가. 더이상 또다른 인류가 만들어질 가능성을 아예 봉쇄해야 한다는 결심에 따른 것이리라.

노아의 행동이 강력해질수록 대답은 분명해진다. 셈과 노아, 함과 노아 혹은 가족들과 노아와의 갈등은 인류가 멸망해야 한다는 노아의 강력한 해석에의 믿음이 점점 커지면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 어떤 문제가 있다. 노아는 신에게 충실한 사람이니 신의 계시를 해석한 결과 그러한 세계관을 가졌을 것이다, 라고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신념은 그가 꿈에서 본 그 내용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다, 라고 은연중 믿게 된다. 그런데 여기까지 이른 다음 우리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당연하다. 꿈의 내용을 다시 생각해보자. 이 꿈은 그러니까 신이 계시한 이미지는 어느 쪽으로건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지만, 그게 인간은 멸종되어야 한다는, 확실한 신의 말씀을 담았다는 쪽으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하는 데에서 우린 잠시 망설이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 절멸이라는 노아의 해석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그는 함의 짝을 찾으러 사람들이 모인 마을에 갔다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딸까지도 팔아 치우는 사람들의 행태를 목격한다. 그가 목격하는 것은 그러니까 신의 계시만이 아닌 것이다. 이 인간사의 사악한 현장을 목격한 경험이 인간 절멸이라는 노아의 확신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단 한번도 노아는 그 경험담이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근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아가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며 절멸을 강조하는 것은 신의 뜻도 아니고 신의 뜻이라 노아가 해석한 그 꿈속 이미지의 또다른 해석도 아니며 철저하게 세상에 대한 노아 자신의 경험적 해석이다. 다만 노아가 그걸 신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기괴함으로 한발 더 성큼 들어서게 하는 어떤 기발함이자 기이함의 축이다. 영화는 듣는 노아가 아니라 보는 노아를 설정함으로써 이미지 해석자 노아라는 여지를 한껏 열어둔다. 노아가 본 이미지적 계시에 대한 해석은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효력을 갖는다. 그가 방주를 만들어 짐승들을 구해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건 신이 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노아가 그 이미지를 또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다고 추론하게 된다. 인간 절멸이라는 파국의 믿음조차 그 이미지의 해석에 은연중 기초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믿음이 능동적 해석이 아니라 경험담에 기인한 착각이라는 걸 새삼 지적하고 있는 중이다. 이건 사실 좀 무서운 착각이며 섬뜩한 기괴함이다.

<노아>

차라리 다행스러운 상투적 퇴보

<노아>의 노아는 사실 두명의 노아다. 하나는 신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노아이고 또 하나는 자기가 접한 세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는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착각하는 노아다. 전자는 세상을 구원하는 노아이고 후자는 세상을 절멸시키려는 노아다. 후자의 노아는 사실상 신의 비전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노아는 신의 충실하고 능동적인 수행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쳐버린 결격의 수행자다. 그러니 노아가 말하는 정의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 것인가. 노아와 아내는 무엇이 정의인지를 놓고 언쟁한다. 셈의 아내 일라가 출산할즈음, 아이들을 왜 죽이려는 것이냐고 아내가 묻자 노아는 그것이 정의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내는 당신이 그렇게 해서 모든 걸 잃고 우리가 당신을 증오하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정의라고 되받아친다. 이 영화에서 정의란 분명한 것이 아니라 의심되는 것이며 자의적인 것이다.

진보적인 신학자인 정혁현 목사는 <노아>에 관한 글에서 “절멸은 신의 뜻이 아니라 노아의 의지로 보인다. 노아에게 세계의 정화는 신의 계획을 추월하여 인간의 완전한 말살을 꿈꾸는 데까지 이른다”라고 지적한다(지면 사정상 이 글은 <씨네21> 948호 영화탐독에 실릴 예정이다-편집자). 거기에 적극 동감한다. 덧붙여 결론삼아 다른 보론을 조금만 더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쓰인 두 가지 용어, 그러니까 “절멸과 세계의 정화”라는 말이 지닌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섬뜩한 긴장감에 주목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신의 심판(폭력)과 인간의 심판(폭력). <노아>에서 애로노프스키는 두번에 걸친 심판의 드라마를 추진한다. 첫 번째 심판은 신의 심판이다. 그건 성서에도 있고 영화에도 있다. 두 번째 인간의 심판은 성서에는 없지만 영화에는 있는 것이다. 이 가상의 두 번째 심판이 끼어들면서 이 영화를 기괴하게 만들고 있다. 두 번째 심판의 핵심은 첫 번째 심판의 다른 버전이 아니라, 정확히 첫 번째 심판에 반대되는 버전이다. 두 번째 심판은 다시 말한다 해도,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인간의 심판이지 신의 심판이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절멸되어야 한다는 영화 속 노아의 판단에는 그 숙명적인 분위기와는 무관하게 가장 경계해야 하는 나쁜 버전의 선민의식이 서려 있다. 영화에서 노아는, 행운이든지 고행이든지(노아 역의 배우 러셀 크로는 노아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를 고행자에 가깝다고 표현했다) 어쨌든 자신이 선택된 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것이 방주를 만드는 것으로만 전개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자신 또는 아무리 넓게 보아도 자신의 아들 세대에서 타락한 인류가 사라져야 한다고, 끝장나야 한다고 말하고 행하려 할 때에는 문제가 된다.

이것은 선민주의의 가장 사악한 버전이다. 세계의 중심이자 끝은 자신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 바깥이나 너머는 없다는 생각. 그러니 영화 속 두명의 노아 중 하나의 노아가 실현하려 했던 그 파국의 정의를 쉽게 믿기는 어렵다. 나치즘이 그러한 또 다른 선민주의의 버전이었다. 유대인 절멸의 프로젝트에 관하여 일종의 의무적이면서도 절대적으로 수행되어야만 했던 세계의 정화 과정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리고 세계가 끝나야 한다면 자신들과 함께 끝나야 한다는 믿음을 유지했다. 때문에 다음과 같은 대화는 이제 두개의 버전으로 읽힌다. 함이 아버지를 질책하며 “저는 아버지가 좋은 분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창조주에게) 선택된 줄 알았다고요” 했을 때 노아는 “그건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어서 선택된 것뿐이란다” 하고 대답한다. 그는 자신이 충실한 신의 수행자일 뿐임을 묵묵하게 강조한다. 하지만 두 번째 심판을 감행하는 노아로 놓고 생각하자면 그 대답은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어서 무섭다. 그는 지금 선한 일을 하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일이라면 어쨌든 하겠다는 것처럼 들려서 무섭다.

신의 심판은 성공하되 신의 대리인으로서 인간의 심판은 실패한다. 영화 속의 노아는 끝내 자신이 실패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일라가 낳은 쌍둥이 자매를 죽이기를 포기하는 순간에도 “이것을 차마 못하겠다”라고 말하지 ‘이것이 옳지 않은 것 같아 그만두어야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실패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아이를 죽이지 못한 걸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건 축복할만한 일이다. 일라는 노아에게 말한다. 당신이 악랄함을 볼 수도 선함을 볼 수도 있는 사람이어서 창조주가 당신을 선택한 것이라고. 그리고 당신은 자비와 사랑을 선택한 것이라고.

결국 <노아>는 후자의 심판에 실패하면서 얼마간 자비와 사랑 안에 남는다. 이것을 두고 영화가 상투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정황으로 퇴진한 것이라고 우린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신을 자처하는 인간의 광폭하고 자의적인 심판이 늘 실패해야만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니 상투적인 퇴보라 해도 <노아>의 결말은 차라리 다행이다. ‘나’의 바깥이나 너머로 이어지는 지속은 누구 한 사람의 마음대로 차단되거나 조정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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