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 뵈티커는 갱스터, 누아르 그리고 웨스턴까지 제법 폭넓은 작품 영역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가 영화사에 기록되는 이유는 웨스턴 덕분일 테다. 감독 경력 말기에 발표된 웨스턴들이 특별히 평가받는 까닭에서다. 랜돌프 스콧이 주연을 맡은 뵈티커의, 1950년대의 소위 ‘복수의 웨스턴’은, 맞수였던 앤서니 만의 ‘심리의 웨스턴’과 더불어 웨스턴 장르의 보석 같은 유산으로 기록된다. 그의 작품 세계를 7개의 키워드로 해석했다.
key1. 랜돌프 스콧
랜돌프 스콧은 뵈티커 웨스턴의 스크린 속 분신이다. <7인의 무뢰한>(1956)으로 인연을 맺은 뒤 7편을 함께 만들었다. 무표정한 얼굴과 190cm의 큰 키의 건장한 체구는 뵈티커의 냉정하고 남성적인 웨스턴의 성격을 압축하고 있다. 무표정 속에 숨겨둔 게 죄의식이다. 스콧이 연기하는 남자는 종종 자신의 잘못으로 아내를 잃고 그 죄를 씻기 위해 복수에 나선다. <7인의 무뢰한>, <선다운의 결전>(1957), 그리고 흔히 뵈티커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외로이 달리다>(1959), 또 스콧-뵈티커 합작의 마지막 웨스턴인 <코만치 스테이션> 등이 잃어버린 아내의 복수와 죄의식에 관한 드라마다. <부캐넌의 고독한 질주>(1958)는 멕시코 청년의 복수를 스콧이 돕는 이야기다. 스콧이 출연하진 않지만 누아르인 <킬러 풀려나다>(1956)도 아내의 죽음에 대한 복수극이다. 말하자면 스콧의 캐릭터는 원죄의식의 과거에 붙들려 있는 남자다. 복수의 방랑은 그 속죄의 과정이다. 원죄의 속죄가 불가능하듯, 스크린 속 그의 방랑은 영원 속을 헤맨다.
key2. 존 포드
뵈티커는 포드의 작품에서 웨스턴의 기본기를 배웠다. 1950년대는 이 선구자와 선의의 경쟁도 벌여야 했다. 뵈티커의 작품에 직접 영향을 끼친 작품은 <수색자>(1956)이다. 황야를 ‘외로이 달리는’(Ride Lonesome) 존 웨인은 랜돌프 스콧의 이미지와 유사했다. 존 웨인이 공동체에 들어가고 싶어도 자신의 공간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단독자라면, 랜돌프 스콧은 아예 그 공동체를 쳐다보지도 않고, 방랑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단독자다. 그래서 존 웨인의 뒷모습에선 연민이, 랜돌프 스콧의 뒷모습에선 고독이 느껴진다.
그리고 존 포드는 뵈티커의 출세작 <투우사와 숙녀>(1951)의 사실상의 편집자다. 영화는 완결된 뒤 내용과 관련된 저작권 소송 등 골치아픈 일로 개봉을 못하고 있었는데, 존 포드가 124분짜리를 87분으로 자른 뒤 개봉됐다. 원래의 판본이 복원된 것은 1987년 UCLA 대학의 작업에 의해서다(이번의 특별전에선 이 원작이 상영된다).
key3. 존 웨인
존 웨인은 뵈티커가 감독으로 출세하는 데 터를 닦은 사람이다. 존 웨인이 훗날 웨스턴의 탁월한 시나리오작가로 성장하는 신인 버트 케네디를 발굴했고, 또 이 작가를 뵈티커에게 소개했다. 뵈티커와 케네디는 형제처럼 붙어다녔다. 두 사람의 첫 합작품이 <7인의 무뢰한>인데, 존 웨인의 제작사에서 만들었다. 랜돌프 스콧을 추천한 장본인도 존 웨인이다. 존 웨인보다 10년 정도 선배인 스콧은 당시 58살로 웨스턴의 철 지난 스타였다. 그런데 뵈티커는 강인하고 과묵한 스콧의 인상에 끌렸고, 그를 당장 캐스팅한 뒤 ‘복수의 웨스턴’의 무표정한 영웅으로 만든다. 존 포드에게 존 웨인이 있듯, 뵈티커에게 랜돌프 스콧이 생긴 것이다.
key4. 앤서니 만
앤서니 만은 존 포드를 계승하는 1950년대 웨스턴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여러 면에서 뵈티커와 비교됐다. 남성적인 뵈티커의 웨스턴에 비해 만의 웨스턴은 여성적으로 수용됐다. 과묵한 인상의 스콧과 달리 만의 배우는 심리적인 연기에 뛰어난 제임스 스튜어트였다. 두 감독은 모두 존 포드의 웨스턴을 의식하며 작업했는데, 특히 풍경의 사용에서 독특한 자취를 남긴다. 존 포드에게 모뉴멘트 밸리가 있듯, 만에겐 달빛 아래의 멜랑콜리한 밤의 황야가 있다. 달 그림자의 황야가 우울한 회색으로 표현된 <윈체스터 73>(1950)이 대표적이다. 만의 풍경엔 서정이 있다.
반면에 뵈티커의 풍경은 석산과 사막이다. ‘황야’라는 말은 이런 데 적절할 것이다. 그의 영화는 종종 거대한 바위들 틈으로 힘들게 말을 타고 등장하는 랜돌프 스콧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곧 뵈티커의 풍경은 시련의 상징이다. <7인의 무뢰한>부터 자신의 마지막 웨스턴인 <코만치 스테이션>에 이르기까지 석산과 사막은 주인공이 버텨내야 할 원시의 공간이다. 이런 풍경은 옆으로 길게 찍힌 시네마스코프 비율의 <외로이 달리다>와 <코만치 스테이션>에서 특히 돋보인다.
key5. 카렌 스틸
카렌 스틸은 뵈티커 웨스턴에 에로티시즘을 주입한 배우다. <선다운의 결전>에서 악당과 정략결혼의 대상이 되는 신부 역으로 뵈티커와 인연을 맺었다. 그녀가 26살 때다. 걸작 <외로이 달리다>에서 남성들과 거친 서부를 뚫고 지나가는 동행자로 나온다. 달빛 아래 드러난 몸매, 그것을 바라보는 악당 퍼넬 로버츠(<보난자>의 큰아들로 유명), 특히 제임스 코번의 음흉한 시선의 대상으로 비치며 카렌 스틸의 매력은 더욱 돋보였다. 갱스터 <렉스 다이아몬드의 흥망성쇠>(1960)에서도 역시 몸매가 아름다운 댄서로 등장한다. 당시 스틸은 뵈티커와 연인 사이였다.
key6. 카를로스 아루사
뵈티커는 투우사다. 청년 시절 멕시코에서 투우를 배웠다. 그때의 스승이자 친구인 투우사가 멕시코의 전설인 카를로스 아루사다. 버릇없던 미국 청년 뵈티커는 투우를 통해 겸손과 예의를 배웠다고 고백했다. <투우사와 숙녀>는 당시의 경험에서 만든 자전적인 작품이다. 멕시코 문화에 대한 사랑도 그때 생겼다.
그의 영화에 멕시코 사람들이 다른 웨스턴과 달리 친구처럼 그려지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특히 <부캐넌의 고독한 질주>에는 멕시코 청년이 주연급으로 나오기도 한다. <투우사와 숙녀>에서 존 포드가 잘라낸 장면들은 대개 멕시코 문화에 관한 것이었다. 복원판은 그걸 모두 살렸다.
1960년대 뵈티커는 멕시코로 다시 가서 아루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모두 7년이 걸렸다. 무슨 운명인지 촬영 도중 아루사는 죽었고, 자신도 사고를 당해 건강을 다쳤고, 파산이 뒤따랐고, 정신병원에 입원도 했다. 필생의 역작은 1971년 <아루사>로 발표됐는데,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key7. 앙드레 바쟁
바쟁은 미국에선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던 뵈티커의 웨스턴에 대해 발표 당시부터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뵈티커가 작가로 대접받는 데는 바쟁의 영향이 컸다. 바쟁은 뵈티커를 존 포드, 앤서니 만과 비교하며 전후의 대표적인 3대 웨스턴 감독으로 평가했다.
특히 <7인의 무뢰한>에 대한 찬사가 유명하다. 바쟁은 이 작품을 두고 “가장 지적이지만 가장 주지적이진 않고, 가장 세련됐지만 가장 미학적이진 않고,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웨스턴”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뵈티커의 영화 세계를 말할 때는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문구다(이 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