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다른 분야에서 먼저 그 재능을 인정받고 뒤늦게 감독으로 데뷔하여 <헝거>(2008)와 <셰임>(2011)을 발표하고 이 두편의 영화로 당대의 가장 촉망받는 예술가가 된 ‘흑인’ 감독이 자신의 세 번째 영화로 노예제도의 야만적인 역사를 증언하는 이야기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흑인이니까.) 그러나 같은 사실에 대해 정반대의 말을 할 사람도 있지 않을까. 이토록 예리하고 세련된 취향의 (이번에는 ‘흑인’이라고 굳이 적지 말자) 감독이, 왜 하필 지금, 솔로몬 노섭의 논픽션을 영화를 만든 것일까, 하고. 나는 전작들보다 상대적으로 평범해진 이 영화의 화술에는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지만, 스티브 매퀸이 하필 이 이야기를 자신의 세 번째 영화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름대로 추론해낼 수 있었는데, 말하자면 이 영화는 <헝거>와 <셰임>의 주제를 잇는 영화라는 것이 나의 잠정 결론이었다. 즉, 이 영화의 주제는 언뜻 명백한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휴머니즘적 메시지에 있지 않다는 것, 그러니까 스티브 매퀸이 단지 아카데미상을 받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것.
이런 생각을 다듬어가고 있을 무렵 이 영화는 제86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고, 스티브 매퀸 감독은 긴 수상 소감의 끝에 “이것이 마지막 말”이라며 주의를 집중시킨 뒤 이렇게 덧붙였다. “솔로몬 노섭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인간은 누구나 단순히 생존하는(survive) 것 말고 살아갈(live) 권리가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노예제도로 고통받은 모든 사람들과 지금도 노예로 살고 있는 2100만명에게 이 상을 바칩니다.” 나는 이 소감을 듣고 조금 실망하고 말았는데, 물론 그의 말은 매우 훌륭한 것이었지만, 내가 기대한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영화의 주제가 ‘천부인권과 만인평등이라는 휴머니즘적 가치에 대한 옹호’ 바로 그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었고, 소감 발표를 끝낸 직후 무대 위에서 격정적인 제자리 뛰기를 하여 그가 아카데미상을 얼마나 받고 싶어 했는지를 여실히 실감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이 감독이 자신이 찍은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잘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 관점을 밀고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스티브 매퀸 감독은 어쩌면 그동안 자기도 모르게 일종의 3부작을 찍어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해보는 것이다.
‘의미를 가진, 굶는 자’와 ‘의미를 잃은, 수치스러운 자’-<헝거>와 <셰임>으로부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는 스티브 매퀸 감독의 전작들이다. <노예 12년>의 자리를 제대로 지정해주기 위해서는 저 두 영화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두 영화를 보기 직전에 내가 읽은 것은 삶의 절대적 근거를 잃어버린(즉, ‘신이 떠난’) 세속화된 현대사회에 만연해 있는 허무주의적 경향을 진단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책이었는데, 그 뛰어난 책에서 저자들은 허무주의란 “실존적 선택에 직면했을 때, 저것 아닌 이것을 선택하게끔 해주는 참다운 동기가 없다”는 생각, 즉, “특정한 해답을 다른 해답보다 더 우선시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그런 느낌이 현대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여기게 만들고 있다고 진단했다(휴버트 드레이퍼스/숀 켈리, <모든 것은 빛난다>, 1장). 나는 ‘삶의 의미’라는 주제가 언제나 문학의 근본주제 중 하나라고 생각해왔던 터라 이 책에 고무된 바가 컸고, 그런 기분 속에서 <헝거>와 <셰임>을 보았기 때문에 이 두 영화를 그런 맥락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 소감은 글로 씌어지지 못했지만(대신 <그래비티>를 대상으로 씌어졌다) 여기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는 있다.
<헝거>의 소재는 1981년의 ‘아일랜드 단식 투쟁’(Irish hunger strike)이다. 대처 정권하의 영국에서, 감옥에 수감돼 있던 IRA 투사들이 정치범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자, 이들의 리더였던 보비 샌즈(Bobby Sands)는 무기한 단식 투쟁을 이끌었다. 보비 샌즈는 66일 동안의 단식 끝에 사망했고 그를 포함 총 10명이 죽었다. 보비 샌즈로 하여금 그런 결단을 내리게 하고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배후의 힘을 누구는 신념이라 부르고 또 누구는 광기라고 할 테지만, 나를 아득하게 만든 것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단식 중인 보비 샌즈에게 삶의 의미란 얼마나 분명한 것이었을까.’ 앞서 언급한 ‘현대적 허무주의’에 익숙한 우리에게 보비 샌즈가 행한 것과 같은 단호한 선택과 불굴의 실천은 놀라운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삶은 죽음으로 치닫는 동안 그야말로 의미로 충만했으리라. 그의 육체는 영양의 결핍으로 녹아내린 것이 아니라 의미의 충만으로 폭발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와 대조되는 것은, 이 영화의 초반부 초점화자라고 해야 할 교도관이 보비 샌즈 일행에게 기계적인 폭력을 행사하다가 갑작스럽게 죽는 장면인데, 여기서 정말로 허무하다 여겨야 할 것은 그 갑작스러운 죽음보다 오히려 죽기 전까지의 그의 삶일 것이다. 이런 유형의 인간은 스티브 매퀸 감독의 다음 영화 <셰임>의 주인공이 된다.
<셰임>에서, 스스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삶의 무의미에 짓눌려 있는 주인공 브랜든(마이클 파스빈더)은 바로 그 감정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섹스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알몸을 보일 때마다 어떤 돌이킬 수 없는 비탄이 그의 피부를 뚫고 터져나올 것만 같은 긴장감을 느끼게 하던 이 슬픈 영화가 주인공의 오열로 끝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인물을 두고 (개봉 당시 이 영화에 대해 쓰인 많은 글들에서 그렇게 했듯이) ‘섹스 중독자’라고 부르는 것은 탐탁지 않다. ‘섹스’가 아니라 ‘과식’이거나 ‘게임’이었어도 달라질 것이 없었을 것이고, 또 그의 상태를 ‘중독’이라고 낙인찍어 우리가 그와 다르다는 위안을 얻는 것도 변변찮은 짓이다. 그는 섹스에, 우리 모두가 대체로 어느 한 가지에 중독돼 있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은 강도로, 중독돼 있을 뿐이다. (아무것에도 중독돼 있지 않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분명히 한 가지에는 중독돼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대체로 자기 자신에 중독돼 있기 때문이다. 살아온 대로 살고 있는 사람은,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에 중독돼 있는 것이니, 그는 곧 ‘자기-중독자’이다.) 그래서 그가 ‘수치’(shame)를 느껴야 마땅하다면 그것은 그가 섹스에 탐닉해서가 아니라 삶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의문’과 그러므로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요청’으로부터- 이 둘을 상징하는 것이 여동생의 끊임없는 부름(“브랜든, 브랜든, 어디에 있니?”)일 텐데- 내내 도망치기만 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요컨대 스티브 매퀸의 전작 두편을 두 종류의 삶의 구조에 대한 탐구라고 정리해도 좋을 것이다. ‘의미를 가진, 굶는 자’의 삶과 ‘의미를 잃은, 수치스러운 자’의 삶. <노예 12년>은 이런 맥락 속에서 거의 필연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에는 저 두 종류의 인간이 모두 나온다. ‘의미를 가진, 굶는 자’의 형상이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포)으로, ‘의미를 잃은, 수치스러운 자’의 형상이 에드윈 엡스(마이클 파스빈더)로 바뀌었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단지 솔로몬 노섭의 기구한 사연을 그린 작품이 아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두명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전작들의 산술적 결합인 것은 아니다. 두 유형의 인간형이 함께 나올 뿐 아니라, 그들의 의식이 거의 대등한 위상을 가지면서 부딪치고 있기 때문에 감독의 전작들이 제기해온 ‘삶의 (무)의미’라는 애초의 주제가 더 복합적으로 검토될 수 있었다. 요컨대 <노예 12년>은 단지 노예의 영화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인과 노예가 ‘삶의 (무)의미’라는 근본질문을 붙들고 격돌을 벌이는 영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는 서사구조-스티브 매퀸이 읽은 <정신현상학>
여기서 ‘노예’니 ‘주인’이니 하는 말들은 노예제도가 실제로 존재하던 그 시절의 존재들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를 가리키는 말로도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신분으로서의 노예/주인이 아니라 ‘의식’으로서의 노예/주인을 뜻할 수 있다. (즉, 우리는 노예의 의식을 가질 수도, 주인의 의식을 가질 수도 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나는 스티브 매퀸이 <헝거>와 <셰임>을 찍은 다음 솔로몬 노섭의 논픽션보다 먼저 읽은 것은 어쩌면 헤겔의 <정신현상학>(1807)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읽었다면 그가 읽은 것은 아마도 <정신현상학> 전체에서도 가장 유명한 대목 중 하나인 4장 1절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지배와 예속’ 부분일 터다. 소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대목은 수많은 후대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지금부터 이 대목에 대한 새삼스럽고 어설픈 요약을 해보려는 것은, <노예 12년>의 서사의 기본 설계도가 바로 <정신현상학>의 해당 대목에 이미 나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의식의 발전 과정을 다루는 <정신현상학>은 4장에 이르면 ‘자기의식’을 다룬다. 인간의 의식은 어느 순간부터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의식하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데 그런 단계의 의식이 ‘자기의식’이다. 자기의식은 자신의 자립성을 확인하고/확인받고 싶어 한다. 우선 할 수 있는 일은 나와 대치하고 있는 대상을 부정하고 삼켜버리는 일이다.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내 자기의식의 자립성이 입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대상은 소멸되므로, 나의 자립성을 계속 확인하기/확인받기 위해서는 또 다른 대상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알게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자립적이지 않다는 사실, 오히려 대상에 종속돼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 필요한 것은 나에 의해 부정된 뒤에도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는 어떤 대상이다. 부정되면(먹히면) 없어지는 빵 같은 것과는 다른 그것은 무엇이어야 하나. 헤겔의 중간 결론은 이렇다. “자기의식은 오직 다른 자기의식 속에서만 스스로 만족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국역본 <정신현상학 1>, 임석진 역, 218쪽)
자기의식은 다른 자기의식을 통해서만 만족을 얻는다는 것, 즉 내가 진정한 자기의식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인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나’라는 자기의식을 인정해주는 ‘너’라는 자기의식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나를 인정하기만 할 뿐인 존재는 나에게 한낱 사물과 다를 바 없으니, 설사 그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해도 그 인정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나를 인정해줘야 할 사람은, 무엇보다도 내가 인정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인정할 만한 존재로부터 인정받아야 진정한 인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상호 인정을 통해 진정한 자기의식에 도달하는 관계를 상상해볼 수 있겠는데 그런 관계를 ‘사랑’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많은 경우 자기의식들 사이의 관계는 일방적으로 인정받기를 고집하다가 투쟁의 형태를 띠게 된다(소위 ‘인정투쟁’). “따라서 두개의 자기의식의 관계는 생사를 건 투쟁을 통해 각자마다 서로의 존재를 실증하는 것으로 규정된다.”(같은 책, 225~6쪽) 이 자기의식의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면 자립성을 얻고, 목숨만은 부지하겠다고 하면 자립성을 잃는다. 전자가 주인(der Herr)이 되고, 후자가 노예(der Knecht)로 전락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형성된 주인과 노예의 구도에 이내 드라마틱한 역전이 발생한다는 데 있다.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노예가 노예인 이상 이제 그의 인정은 주인에게 별 의미 없는 것이 되어 주인을 주인으로 유지하지 못하며, 처음에는 노예를 제압해서 자립적인 존재가 된 것처럼 보이던 주인의 처지는 점점 노예의 노동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형편이 되면서 되레 비자립적인 것이 되고 만다. 반면 노예의 입장에서 보면, 노예는 죽음의 공포를 처절하게 체험하면서 삶을 더욱 깊은 곳까지 (이를테면 삶의 무상성 따위를) 의식하게 되며, 이에 더해 노동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주인이 갖고 있는 가짜 자립성과는 다른)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립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이제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역전되고 만다. 이것이 소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 불리는 논변의 중추이며 이 역전의 순간이 이 ‘자기의식의 서사’의 백미다. 그리고 뒤에 보겠지만, 스티브 매퀸은 바로 이 순간이 담고 있는 통찰을 포착해서 자신의 주제의식 속으로 통합해냈는데, 그 결과 탄생한 작품이 바로 <노예 12년>이라고 나는 읽었다.
‘동물적 생존’과 ‘본래적 실존’ 사이에서-<노예 12년>의 전언
그러니까 나는 지금 <노예 12년>을,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20년 전인 1841년에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납치돼 남부 뉴올리언스로 팔려가서는 ‘플랫’이라는 새 이름으로 12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다가 다시 자유인이 되는 데 성공한 한 남자 솔로몬 노섭의 이야기라고 요약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티브 매퀸 감독은, <노예 12년>의 후반부 1시간에 솔로몬 노섭과 에드윈 엡스가 만나고 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는데, 이 1시간 동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헤겔이 1807년에 쓴 시놉시스를 스티브 매퀸이 1841년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각색한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에는 주인(에드윈)과 노예(솔로몬) 사이에서 벌어지는 변증법적 역전의 드라마가 포함돼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헤겔의 복제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분명히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은 1807년의 시놉시스를 1841년을 배경으로 각색한 이 영화가 2014년에 진지하게 토론될 필요가 있는 작품이 되도록 만든 것은 스티브 매퀸의 (그리고 그의 전작들이 만들어놓은 구도의) 공이라는 점이다. 이 영화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삶의 (무)의미’라는 ‘현대적’ 주제로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노예 12년>은 어떻게 <헝거>와 <셰임>이 만들어놓은 구도 속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가. 앞에서 나는 이 영화를 두고 ‘의미를 가진, 굶는 자’의 형상이 솔로몬 노섭으로, ‘의미를 잃은, 수치스러운 자’의 형상이 에드윈 엡스로 바뀐 이야기라고 말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 노예가 된 이후의 솔로몬 노섭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잊어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그가 노예로서의 삶을 견뎌온 것은 오로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단 한번의 예외가 있는데, 편지를 부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동료 노예의 장례식을 치르다가 영가를 따라 부르는 장면에서 그는 자신이 평생 노예로 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그 장면 직후 나올 구원자 베스(브래드 피트)의 등장을 더 극적인 것으로 만들어주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반면 에드윈은 많은 숫자의 노예를 거느린 부유한 상인이지만 그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여자 노예 팻시(루피타 니옹고)를 향한 그의 광적인 집착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삶 한가운데에 나 있는 구멍을 그녀로 틀어막으려는 슬픈 발악이라고 해야 한다. (마이클 파스빈더는 에드윈의 폭력성이 에드윈이라는 인물 내부에 있는 공허와 고통의 왜곡된 분출임을 설득하는 연기를 훌륭하게 해냈다.)
솔로몬에게는 삶의 의미가 너무도 분명하지만 그는 노예이기 때문에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은 계속 팽팽한 의미를 유지할 수 있고 그는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주인으로 남는 반면, 주인 에드윈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지만 도무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이어서 그 환멸을 노예들에게 분출하느라 통제 불능의 폭력에 몸을 맡기는 것인데 이때의 그는 저 자신의 맹목적 충동의 노예인 것이다. 요컨대 에드윈과 솔로몬의 관계에서 주인과 노예의 역전 현상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이를 통해 스티브 매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존재의 처지가 주인이냐 노예냐 하는 것이 그가 자기 삶에 대해 주인인지 노예인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 노예에게 주인인 자가 삶에 대해 노예일 수 있고, 주인에게 노예인 자가 삶에 대해 주인일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이렇게 뒤집어 말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솔로몬 노섭은 12년 동안 노예로 살아본 뒤에야 진정한 자유인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에드윈 엡스는 그가 한번도 노예가 되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노예로 살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스티브 매퀸 감독의 수상 소감을 다시 옮긴다. “솔로몬 노섭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인간은 누구나 단순히 생존하는(survive) 것 말고 살아갈(live) 권리가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노예제도로 고통받은 모든 사람들과 지금도 노예로 살고 있는 2100만명에게 이 상을 바칩니다.” 이것을 훌륭하지만 단순한 말이라고 했던 것을 철회해야 되겠다. 저 2100만명 속에 내가 카운트되어 있는 것이라면? 동물적 생존과 본래적 실존을 가르는 기준은, 발목에 쇠사슬이 감겨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느냐 아니냐에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살아온 것이 ‘자유인 39년’의 삶이 아니라 ‘노예 39년’의 삶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적으려다가 만다. 이것은 너무 기계적인 반성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적어두는 것은 부끄럽지 않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자신이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스티브 매퀸의 ‘삶의 의미’ 3부작은, 자신이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노예들에게, ‘자신이 노예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할 때만 주인이 될 수 있는’ 우리의 이 이상한 삶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권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