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아리는 어째서 종아리일까. 종아리라고 발음할 때마다, 종아리라는 말을 들을 때에도, 종아리는 어째서 종아리일지 궁금하다. 알고 있는 말 같은데 발음하면 낯설다. 입이 동그랗게 모였다가 벌어졌다가 혀끝이 종아리를 흘려보낸다. 종아리, 종아리, 종아리, 단어는 계속 흐른다. 채호기 시인의 시 <얼음>의 한 대목. ‘물은 중얼거림이고, 얼음은 침묵이다. 단어는 얼음이고, 말은 물이다.’ 종아리라고 말할 때마다 종아리가 녹아서 펄떡거린다. 종아리라고 발음할 때마다 동그란 열매 같은 걸 떠올린다. 종아리의 ‘종’은 망울을 뜻하는 ‘종’일지도 모르겠다. 마늘 위로 치솟은 ‘마늘종’처럼 종아리는 몸의 가장 아래쪽에 매달린 인간의 열매일지도 모르겠다. 다리의 옛말이 ‘아리’이니까 다리에 매달린 열매, 동그랗고 탐스러운 인간의 열매가 종아리다. 아니다. 종아리는 뜻이 없어도 좋다. 종아리라고 발음하면 종아리가 드러난다. 유하 시인은 ‘구릿빛 종아리’를 노래했다. 장정일 시인은 ‘흘린 듯 끌린 듯이 따라갔네/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이라고 썼지만 나는 다리를 종아리로 고쳐 읽는다. 종아리가 없다면 다리는 다리가 되지 못한다. 종아리라는 열매가 없다면 다리는 팔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종아리는 인간의 몸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종아리는 나의 다리와 땅이 만나는 접점이라는 생각도 든다. 발로 땅을 딛지만 경계는 종아리다. 땅을 딛는 나의 힘과 나를 밀어내는 땅의 힘이 종아리에서 맞붙는다. 단단한 종아리에서 팽팽한 힘이 균형을 찾는다.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어른들이 아이들의 종아리를 걷게 한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땅을 딛고 똑바로 서 있으라고, 열매를 맺으려면 고통이 뒤따른다고. 물론, 그런 거창한 이유보다는 가장 쉽게 때릴 수 있고 가장 빨리 아무는 부위가 종아리라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야, 허벅지 걷어, 이건 좀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스키니진이라도 입었다면 걷기도 좀 불편할 테니까.
종아리를 의미 있게 다룬 최고의 영화로 <그래비티>를 들고 싶다. 나는 영화 <그래비티>를 ‘(허벅지와) 종아리에 대한 고찰’로 보았다. <그래비티>에서는 종아리가 자주 등장하지 않지만 종아리가 드러나는 장면은 놀랍도록 선명하고 감동적이다.
<그래비티>는 영화가 시작되고 30분이 넘도록 얼굴 외에는 인간의 살을 보여주지 않는다. 당연하다. 영화의 주 무대는 지구가 아니라 외계니까, 중력이 작동하지 않는 우주니까, 살을 보여줄 수 없다. 보기만 해도 엄청나게 무거울 (우주니까 무게를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우주복으로 몸을 꽁꽁 둘러싼 채 우주를 떠다니며 두 사람은 계속 이야기만 한다.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는 라이언 스톤(샌드라 불럭)에게 눈 색깔에 대한 농담만 한다. 보이는 게 눈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본격적인 몸이 등장하는 것은 영화가 시작된 지 40분쯤 되어서다. 맷 코왈스키를 우주로 떠나보낸 라이언 스톤은 산소가 완전히 바닥나기 직전, 가까스로 우주정거장에 들어간다. 산소를 폐 속으로 가득 몰아넣은 라이언 스톤은 갑갑한 우주복을 하나씩 벗어던진다. 티셔츠와 팬티만 남았을 때 라이언 스톤은 마치 자궁 속의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다. 우주선 내부의 연결선들은 탯줄처럼 그녀를 둘러싸고 있다. 이 장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을 많이 들었다. 한 소설가 선배는 ‘샌드라 불럭의 팬티가 너무 커서 실망이었다, 티팬티 정도는 입어줬어야…’라는 농담을 했고(농담이 아닐지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한 후배는 ‘우주복 안에 저런 팬티를 입고 있으면 몹시 답답할 것 같다. 트렁크를 입는 게 낫지 않을까’ 같은 아저씨스러운 의견을 내놓았고, 어떤 전문가는 ‘우주복 안에는 기저귀 같은 팬티를 착용한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 장면에서는 누구라도 팬티를 보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40분 동안 몸을 꽁꽁 싸맸던 ‘샌드라 불럭’이 드디어 옷을 벗었으니 팬티에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도 우선 팬티를 보았다. 그리고 당연히 팬티 아래의 허벅지와 종아리를 보았다. 나는 라이언 스톤의 허벅지와 종아리를 보는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째서 그랬을까. 허벅지와 종아리를 보는데 왜 울음이 나려고 했을까.
샌드라 불럭의 허벅지와 종아리는 탄탄했다. 할리우드의 여배우라면 그 정도의 몸 관리는 기본이 아닌가,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허벅지와 종아리를 샌드라 불럭의 것이 아닌 라이언 스톤의 것으로 보고 말았다. 라이언 스톤은 사고로 딸을 잃었다. ‘딸이 죽은 뒤 자신의 삶은 아주 간단했다’고 라이언 스톤은 맷 코왈스키에게 말했다. “사고 전화를 운전 중에 받았어요. 그 뒤론 그냥 그렇게 살았어요. 일어나서 일하러 가고 그리고 그냥 운전했어요.”
나는 라이언 스톤의 이야기와 라이언 스톤의 종아리 사이에서 미묘한 어긋남을 발견한 것 같았다. 일어나서 일하러 가고, 계속 운전만 했던 사람의 종아리가 저럴 수 있을까. 저렇게 단단한 돌 같을 수 있을까. 남편을 잃은 길버트 그레이프의 엄마인 보니 그레이프처럼 엄청난 뚱보가 되었다면, 혹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여 삐쩍 마른 몸이 되었다면 쉽게 이해했을 것이다. 짧은 순간, 나는 라이언 스톤의 생활을 상상했다. 그녀가 맷 코왈스키에게 말하지 않은, 딸을 잃은 그녀의 반복적인 생활을 상상했다.
그녀는 운전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무가 없는 어떤 날은 딸을 생각하며 하루종일 걸었을지도 모른다. 지저분하게 땋아올린 갈색머리의 딸을 생각하며, 침대 밑에서 발견한 빨간색 운동화를 떠올리며 걷고 또 걷다가 집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어떤 날은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달리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조금이라도 지우고 싶어서, 자책을 그만하고 어떻게든 이겨내고 싶어서 몇 시간 동안 달렸을지도 모른다. 러닝머신에서 달리다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미끄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연구소에서 일하는 동안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했는지도 모른다.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딸을 잃었고, 몇분 전에는 자신의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라이언 스톤의 벗은 몸이 너무나 탄탄해서 나는 슬펐다. ‘미스캐스팅 종아리였어’라고 간단하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몸을, 종아리를 이해하고 싶었다. 무리한 상상을 동원해서라도 상실을 이겨내려는 종아리의 근육을 이해하고 싶었다. 살아남기 위해 우주정거장의 구조물들을 꼭 붙들었던 그녀의 손아귀 힘을 이해하듯이 딸을 잃고 무너지려는 마음을 어떻게든 버텨내려는 종아리를 응원하고 싶었다.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것의 이름을 제대로 부를 수 있을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딸의 이름이 ‘세라’인 것은 영화 막바지에 밝혀진다. 라이언 스톤은 그 먼 우주에 가서 딸의 이름을 부르고 돌아온다. 많은 시간을 보낸 뒤에야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지구로 돌아온 라이언 스톤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 종아리로 우뚝 선다. 그녀는 반복되는 시간을 살아가겠지만 삶의 의미는 이전과 많이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