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정호] “법의 모순을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2014-04-23
글 : 이화정
사진 : 오계옥
<방황하는 칼날> 이정호 감독

딸을 죽인 소년을 살해한 상현(정재영), 그를 잡아야 하는 형사(이성민)의 숨막히는 추격전.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방황하는 칼날>(2009년 동명의 일본영화로도 제작됐다)은 설득력 있는 캐릭터와 이를 뒷받침하는 비주얼, 감상적 부추김을 걷어낸 균형감 있는 시선으로 울림을 만들어낸다. 데뷔작 <베스트셀러> 이후 4년 만에 돌아온 이정호 감독은 충격적 소재를 그저 장르영화의 좋은 먹잇감으로 사용하는 대신 부조리한 사회의 마디마디를 들쑤시는 민감한 질문으로 치환한다. 더불어 정재영과 이성민이라는 따로 떼어놓아도 훌륭한 두 배우가 한편의 영화에서 만났을 때 어떤 방식으로 호응하는지에 대한 증명이라는 점에서도 절대 놓칠 수 없는 강점을 지닌 작품이다.

-<백야행> <용의자 X의 헌신> 등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은 영화, 드라마로 수차례 만들어졌다. 소재나 스토리가 영화화하기에 좋아 보이는 원작이 막상 영화화할 때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워낙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다. 극중 이성민이 연기한 형사 ‘억관’의 이름도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의 번역을 주로 도맡아하는 ‘양억관’에서 따왔다. 제안을 받고 세 번째 읽을 때까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봤다. 그런데 네 번째 보면서 생각해보니 영화로 만들면 가져올 게 별로 없더라. 인물들이 내뱉는 말들이 거의 독백이고 너무 직설적이어서 영화화하기가 쉽지 않겠더라. 게다가 원작은 소년법을 비판하는 메시지가 두드러져서 자칫 한쪽 방향의 주장으로 치우칠 우려도 있어 보였다.

-원작이 소년법에 대한 강한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영화는 피해자 아버지의 비장함에 초점을 두고 있다. 출발 지점의 그 고민이 반영된 결과 같다.
=원작은 일본의 ‘콘크리트 살인사건’(1988년 여고생을 감금, 폭행, 살해한 뒤 시신을 드럼통에 넣은 뒤 콘크리트를 부어 암매장한 사건. 가해자가 모두 미성년자였다)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일본의 소년법이 약해 죄질이 무거운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이 미약한 점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그 고민을 다룬 작품들이 일본에서 많이 나왔다.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의 <고백>도 그런 고민을 담고 있는 작품이었고. 얼마 전에 콘크리트 사건 그 뒤 20년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나오기도 했는데, 그때 가해자인 아이들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조명하는 내용이었다. 피해자들은 숨어서 지내는데, 정작 가해자들 중엔 변호사가 된 사람도 있더라. 분명 비판해야 할 부분이긴 한데 책을 읽다보니 나 나름대로는 다른 부분이 보였다. 원작에 아버지가 첫 살인을 하고 경찰에 보내는 편지가 있는데, 그게 상당히 감동적이고 설득력이 있지만 ‘이건 아버지가 아니라 작가의 이야기구나’ 싶었고. 범죄로 딸을 잃은 아버지가 그렇게 이성적이고 논리정연하게 소년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까 했던 거다.

-어떻게 방향을 잡아나갔나.
=<베스트셀러>를 할 때는 장르영화의 재미를 가져가는 게 가장 큰 목표였고 그래서 부담감이 크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시나리오를 18고까지 썼다. <베스트셀러> 때부터 작업했던 포천의 펜션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했는데, 보통 하루에 한갑 피우던 담배를 네갑씩 피웠다. 초고는 완전히 사회 드라마였다. 이런 사건이 터졌을 때 언론의 반응이 어떤지 방송국까지 나오고, 아버지도 중년이 아니라 원작처럼 노인으로 가기도 하고, 별의별 설정을 다해봤다. 답을 얻은 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쓰면서였다. 상현의 심리를 반영한 마지막 장면을 시험 삼아 써봤는데 찌릿한 느낌이 오더라. 그러면서 이 영화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답을 얻었다.

-사법체계의 모순을 아버지가 정면 돌파한다는 점에서 ‘사적 복수극’이라는 부분이 도드라지는데.
=사적 복수라는 측면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상현의 행동은 의도된 복수가 아니라 즉흥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리 자기 자식을 죽인 범죄자가 눈앞에 있다고 하더라도 상해를 할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 들더라도 끝까지 칼을 대지는 못했을 것 같다. 상현도 처음에는 딸을 죽인 소년에게 ‘왜 그랬냐’는 울분에서 끝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년이 상현을 자극하면서 극한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누구라도 그 상황을 95% 정도는 공감할 수 있다고 본다.

-살인자가 된 상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피폐해진 상태가 영화의 시작이다. 아버지의 심리를 차근차근 따라가는 원작과 달리 액션 장르의 성격이 더 부각될 수 있는 구조다.
=그 부분이 일반적으로 영화의 중/후반에 배치되어야 할 클라이맥스인데 나는 그 장면을 가장 전면에 배치되게 만들었다. 상현은 극의 거의 시작 부분에 가해자 중 한명을 죽이고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모한다. 그때는 이성이 제로이고 감정이 100%인 상황이다. 100%의 감정을 폭발한 다음 시간이 지날수록 이성이 감정을 앞서 나오는 구조를 택했다. 상현은 자꾸 솟구치는 인간적인 이성을 느끼지만 그걸 제어하고 감정을 다잡아 딸의 복수를 계속 감행한다. 프롤로그 장면의 상현은 그 통제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상현, 빈껍데기만 남은 짐승 같은 최후의 모습이다.

-가해자인 두식(이주승)에 대한 입장이 중요했다. 상현의 입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더 악한 존재로 묘사할 수도 있었다.
=두식의 입장을 자세히 설명하면 이 아이를 옹호하는 입장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두식의 분량은 애초보다 좀 축소했다. 하지만 두식을 악마로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악인’이라는 글씨가 쓰여진 캐릭터가 아니라, 아직 어리다는 개념으로 접근했다. 캐스팅 때도 어떤 이미지의 배우를 써야 할지 고민이 컸다. 그런데 비슷한 범죄를 저지른 실제 청소년들을 조사하고 접해보니 겉으로는 무척 평범하더라. 그게 정말 무서운 지점이기도 하다.

-형사 억관은 직업적 책무와 달리 점차적으로 상현에 대한 연민과 동조를 드러낸다.
=내가 끌고 가고 싶었던 이미지는 <히트>나 <첩혈쌍웅> 같은 구도였다. 상황 때문에 엇갈린 두 남자의 묘한 감정, 동지애를 핵심으로 두자 싶었다. 캐스팅은 익숙한 이미지에서 일부러 벗어났다. 이성민이 하는 아버지, 정재영이 하는 형사는 식상하겠다 싶어 오히려 역으로 제안했다. 정재영, 이성민 두 배우가 아니라면 이 영화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됐을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머리가 바빠지고 영화의 뉘앙스도 조금씩 바꿨다. 시나리오는 기본 골격이라고 생각하고 거의 매일 내일 찍을 장면과 그다음 장면을 미세하게 수정했다. 다행히 스탭과 배우들이 함께 그 수고에 모두 동참했다.

-그 부분에 관해서 PD의 원성을 익히 들었다. (웃음) 촬영의 힘이 컸다. 프롤로그의 황량한 설원의 암울한 기운이 영화의 전반적인 톤을 지배한다. 과거 상현과 딸의 회상 장면도 관습적인 ‘아름다운 시절’로 포장하지 않고, 감정을 조장할 음악 사용도 자제한다. 핸드헬드 촬영도 전체적인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장치였다.
=현실이 이러니 과거 회상 장면이라도 좀더 행복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그런 모습은 아버지가 떠올릴 장면이라기보다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은 결국 자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마음을 화면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사실적으로 찍자는 게 촬영감독과 나눈 가장 핵심적인 생각이었다. 콘티도 안 짜고 앵글도 안 정하고 열어놓고 갔다. 촬영감독도 처음에는 불안해하더니 3회차 찍고 나서는 리허설을 하지 말자고 하더라. 리허설을 안 하면 배우들이 동선을 놓치는데 오히려 그 엇나가는 지점을 살려보자고 했다. 핸드헬드 촬영도 인물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담아내고 싶어서 고집했다. 레퍼런스로 삼았던 영화가 다르덴 형제의 <아들>이었다. 다르덴 형제는 모든 장면이 엄청난 리허설에서 나온 계산된 장면이라고는 하지만. (웃음) 아들을 살해한 소년을 향해 그 아버지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아버지가 가지는 정서적 부분과 맞닿는다고 생각했다.

-결국 도덕적 가치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피해자 상현이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 두식이 피해자가 되는 등 시시각각 변하는 입장의 차이를 보여준다. 감독의 입장은 어떤 거였나.
=상현이 처음 죽인 가해자 철용(김지혁)의 어머니가 아들의 살해 소식을 듣고 목 놓아 우는데, 시사를 보고 나서 그 어머니의 눈물에 화가 난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소년의 어머니는 상현과 같은 입장일 수 있다. 어느 날 아들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은 어머니다. 형사 억관은 파트너인 신참 형사 현수(서준영)의 정의에 찬 울분에 ‘아직도 정의사회 구현하려고 하냐’고 핀잔을 준다. 현수 역시 현실의 장벽에 부딪히며 생활하다보면 20년 뒤 억관이 될 수 있다. 두식의 강압으로 범죄에 가담한 민기(최상욱)는 한순간 두식처럼 될 수 있고, 두식 역시 그대로 방치하면 곧 성매매를 전문으로 일삼는 악랄한 학원장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소통하지 않으면 결국 이 사회는 그런식의 악순환이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상현 가족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뚝 잘라놓았을 때 나타나는 사회의 단면이 어떤 건지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명쾌하게 선과 악을 규정하지 않는 게 이 영화가 가진 돋보이는 시각이다. 하지만 이런 판단에 대한 공격도 다분히 예상된다.
=원작을 읽었을 때 가장 크게 든 생각이 무력감이었다. 변호사에게 영화 속 사건이 현실이라면 어떤 처벌이 가능한지 물었더니, 가해자가 미성년자인 데다 초범이니 수임료 높은 변호사만 고용하면 무죄까지 받아낼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하더라. 가해자를 처벌하려던 과거의 법은 이제 가해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합리적 성격으로 변모했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빠져버렸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영화에서 법이라는 개념이 젊은 형사 현수에게 있다. 울분을 느끼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다. 이 영화는 <도가니>처럼 명확한 고발의 힘이 있는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법이 문제니 마지막 부분을 바꿔서 응징을 하는 게 해결책은 아니다 싶었다. 법의 모순을 지적하고, 그걸 각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한다.

-<베스트셀러> 이후 4년 만의 신작이다. 따져보니 꽤 오래 걸렸다.
=리안 감독이 <라이프 오브 파이>를 기획부터 CG까지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이 3년 반이더라. 그 엄청난 영화를 그 기간에 완성했는데 난 뭐하고 있나 싶은 반성이 들었다. (웃음) 자주 작품들을 내놓는 감독들을 보면 영화하면서도 다음 작품을 진행하던데, 정말 대단한 것 같다. 홍상수 감독, 김기덕 감독 다 어떻게 그렇게 할까 싶고 한수 배우고 싶다. 이번 작품도 난 계약도 안 한 상태에서 초고를 썼다. 일단 해보고 각이 안 잡히면 그만 둬야지 했던 거다. 이런 생각으로 하니 일이 빨리 진행이 안 되는 것 같다. (웃음)

-차기작 계획은.
=막연하게나마 두 번째 작품이 잘되면 호러 스릴러를 다시 한편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데 진행하는 분이 관객에게 “<베스트셀러> 보신 분 있냐?”고 묻더라. 한 세분이 손을 드는데 진짜 민망하더라. 전작의 흥행 부진을 씻고 이번엔 좀더 많은 관객과 만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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