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누가 왕의 역린을 보았는가
2014-04-24
글 : 장영엽 (편집장)
<역린> 미리 보기… 역사를 공간과 미술, 의상, 무술을 통해 재해석하다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역린). 그 비늘의 정체를 모두가 궁금해한다. 4월30일 개봉하는 <역린>은 본격적인 사극 블록버스터 전쟁의 서막을 여는 작품이자, 할리우드영화가 점령한 4월 극장가의 구원투수로 나설 한국영화다. 즉위 1년 만에 암살 위협에 직면한 왕.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누구도 믿지 못하는 정조는 고독하고 비장한 영웅이다. 그는 어떻게 자신의 노여운 감정(’역린’의 뜻이기도 하다)을 딛고 훌륭한 군주가 되었을까. 그 물음에 대한 실마리를 <역린>의 주요 제작진에게 들었다. 이재규 감독과 조화성 미술감독, 정경희 의상감독과 양길영 무술감독의 제작기를 전한다.

정조의 마음, 존현각

“두렵고 불안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다.” 23살의 세자 이산(정조의 세손 시절 이름)은 일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어죽게 한 노론파는 그의 아들이 왕이 되는 걸 못마땅해했다. 적들로 가득한 궁 안에서, 정조가 온갖 모욕과 암살위협을 견뎌내며 자신의 속내를 기록한 장소가 바로 존현각이다. 정조 집권 1년, ‘정유역변’(1777년 7월28일 밤, 자객이 정조의 침전까지 들어왔던 사건)의 그날을 조명하는 <역린>은 정조(현빈)의 서재인 존현각을 단지 왕의 거처가 아니라 그의 마음을 반영하는 공간으로 구현했다. 영화에서 아들이 침소보다 더 자주 머무르는 존현각을 찾은 혜경궁 홍씨(김성령)는 이렇게 말한다. “저곳이… 왕의 침전입니까? 민가의 종복들 행랑채도 여기보단 낫겠어요.” 정조의 검소하고 서민적인 성격을 반영한 이 공간은 뭇 영화 속 왕의 거처와는 다르게 겉치장이 없고 담백하다. 조화성 미술감독은 “다른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궁 안에 있다고 믿기 어려운 남루하고 초라한 서재이지만, 정조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힘을 키울 준비를 하는 곳”이라는 느낌으로 존현각의 모습을 구상했다고 말한다.

언뜻 허술한 공간처럼 보이는 존현각은 모든 최악의 수를 미리 헤아리는 정조처럼 방심하지 않는 곳이다. “정조가 자기 침전에서 잠들지 않은 건, 책을 워낙 좋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암살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재규 감독은 조화성 미술감독과 논의 끝에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아도 도르래에 의해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는 존현각의 문을 만들었다. “왕이 기거하는 공간 자체가 벌집같은 구조다. 정조처럼 늘 긴장감에 싸여 있는 인물이 아무리 서고라 해도 중간 격벽들을 다 열어놓고 있었을까. 혹은 영화 후반부에 암살자와 대면하는 장면에서 그 문들을 다 닫아놓고 자객을 맞았을까. 어느 쪽이 더 불안한 느낌을 줄 수 있고 어떤 선택이 정조라는 인물에 더 잘 어울리는지를 고민했다.” 한편 정조의 ‘책 사랑’은 대신들과 집무를 보는 장소인 편전에서도 드러난다. 조화성 미술감독은 대개 왕좌의 뒷배경으로 <일월오봉도> 같은 그림이 많이 쓰이는데, <역린>에선 <책가도>(책, 문방구, 향로, 도자기 등을 그린 그림)를 썼다고 말한다. “<일월오봉도>가 좀 위압감을 주는 그림이라고 하면 <책가도> 앞에 앉아있는 왕은 그저 한낱 서생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책가도>를 뒤에 걸었다는 건, 정조의 고집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백색 곤룡포의 비밀

붉은색 곤룡포를 입지 않은 왕을 영화 내내 지켜보는 건 아마 최초의 경험이 아닐까 싶다. <역린>은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한 지 1년이 되는 해를 배경으로 한다. 이재규 감독과 정경희 의상감독은 즉위 초의 정조가 선왕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참체복’(참회하는 복장)을 입었을 거라는 점에 의견을 모아 백색 곤룡포를 제작했다. 이 옷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71쪽 참조)를 하기 전에, 정조의 가슴팍에 위치한 흉배(관복의 가슴과 등에 붙이던 표장)에 주목하길. 역린, 즉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이란 제목의 비밀이 이 흉배에 숨어 있다. “곤룡포에 수놓는 용은 대개 편안한 얼굴이다. 그런데 우리 영화 제목은 ‘용이 뿔났다’는 뜻이니까(웃음) 일반적인 용의 얼굴을 쓸 순 없었다. 민화를 보며 용의 가장 화난 얼굴을 찾았고 그 모습을 흉배에 수놓았다.”(정경희 의상감독) 자신을 가소롭게 대하는 권력자들 앞에서도 도무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정조이지만, ‘역린’이 상징하는 왕의 노여움이 흉배를 통해 비밀스럽게 나타난다.

그는 명사수였으니…

50발 중 49발 명중. 다 맞히는 건 ‘만용’이기 때문에 일부러 마지막 화살을 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역사에 남아 있을 정도로 정조는 명사수였다. <역린>에서도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정조가 사용하는 주요 무기는 ‘활’이다. 조선 시대의 다양한 활 중 제작진이 선택한 건 ‘편전’이었다. “유일하게 조선에만 있었던 활이다. 사정거리도 멀고 속도도 굉장히 빨라, 언제 어디서 발사될지 파악하기가 애매한 활이라더라. 그래서 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몹시 두려워했던 무기이기도 하고. 정조가 이 활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이재규 감독의 말이다. 편전은 적당한 때가 되길 기다렸다가 단숨에 상대방을 제압하길 원하는 영화 속 정조의 성격과도 닮아 있는 무기다.

스트리트 파이터, 조정석

<역린>에서 조정석이 연기하는 살수는 이제까지 그가 맡아왔던 역할 중 가장 ‘센’ 캐릭터다. 드라마 <더 킹 투 하츠>에서 조정석과 호흡을 맞췄던 이재규 감독은 “내면은 순수하고 여린데 험난한 성장 과정에서 강한 껍데기가 씌워지는” 살수와 “배우 조정석의 본능적이고 감성적인 면모”가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해 그를 캐스팅했다고 말한다. 권력자들에게 “왕 모가지”를 바쳐야하는 살수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을 죽이는 냉혹한 킬러다. 양길영 무술감독은 “스트리트 파이터”라는 말로 살수를 설명한다. “정조는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된 무예를 배웠을 것이고 살수는 살아남기 위해 무술을 익혔을 거다. 현빈씨에겐 검술의 기본 동작 여덟 가지를 일부러 정형화된 방식으로 가르쳤다. 그러나 조정석씨의 캐릭터는 다듬어지면 안 될 것 같아 의도적으로 연습을 많이 안 시켰다. <더 킹 투 하츠>를 함께 작업할 때만 해도 ‘몸치’인 줄 알았는데(웃음), <역린>에서는 ‘학원 다녔냐’고 농담할 정도로 액션을 무리없이 소화해냈다.”

빨간 속치마의 위력

<역린>에서 정조의 최대 정적은 정순왕후(한지민)다. “예순여섯살의 영조를 열다섯살에 사로잡을” 정도로 영리했던 소녀가 정치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여자로 성장해나갈 때, 어떤 캐릭터로 구현될 것인지 궁금했다고 이재규 감독은 말한다. 왕도 어찌하지 못하는 여자의 권세와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조화성 미술감독과 정경희 의상감독의 고민이 깊었다. “정조에게 존현각이 있다면, 정순왕후라는 인물을 대변하는 공간은 후원에 위치한 창고”라고 조화성 미술감독은 말한다. 보통의 경우라면 쌀가마니나 집기들이 들어설 곳을 “귀중품들이 가득하고 치부도 감춰져 있을 듯한”, 권력자의 정보실 같은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다. 정순왕후의 의상 역시 등장인물 중 가장 화려하게 구현됐다. “대비전을 찾아온 왕 앞에서 발을 내밀고 마사지를 받고 있는 여자라면, 상복도 고혹적으로 입을 것 같았다”는 정경희 의상감독은 흰 모시옷 밑으로 슬쩍 드러난 그녀의 무지기치마(상류층이 입던 속치마)를 빨간색으로 과감하게 설정했다.

왕을 위한 톱니바퀴

“지하에는 세답을 위한 수로, 1층에는 왕의 곤룡포를 옮기는 캣워크 같은 공간을 두고 2층에는 왕의 의복을 다리고 바느질하는 이들을 위한 침방을 만들려고 했다.” 처음 세답방이란 공간을 구상했을 당시 이재규 감독의 포부였다. 극의 베이스가 되는 상징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그만큼 공을 들이려 한 것이다. 촉박한 일정상 이 모든 걸 구현하기는 어려웠지만, 세답방을 통해 “궐 내의 많은 사람들이 마치 수레바퀴의 톱니처럼 기능하며 왕을 뒷받침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는 그대로 살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왕을 위해 일하고 있는데, 정작 왕은 본인의 침전에서 잠을 자지도 않고, 서고에서 밤을 샐 정도로 무언가에 쫓기고 있다. 그런 완성되지 않은 왕의 모습을 세답방과 대비되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 수많은 사람들이 존중하는 게 과연 왕으로서의 정조인지, 왕의 자리 그 자체인지에 대해서도 조화성 미술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이재규 감독)

죽여야 사는 자

<역린>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다른 한축은 궁궐 밖이다. 살수를 ‘킬러’로 길러내고 그에게 정조 암살을 지시하는 광백(조재현)의 거처는 존현각과 묘하게 닮아 있다. “궁 안의 왕이 정조라면, 천민들의 왕은 광백이 아닐까. 부감으로 비추면 존현각의 중앙정원과 광백의 막사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될 거다.”(조화성 미술감독) 살수가 강을 건너는 사진 속 장면은 “황천강을 건너는 듯한 느낌”으로 연출되었다고 한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것 같은 묘한 느낌이 ‘죽여야 사는 자’의 애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옷이 곧 왕이다?

왕의 옷을 빨고, 다리고, 박음질하는 세답방은 한국영화 속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진 적이 없기에 제작진의 상상력이 더 중요했던 공간이다. 생각시, 나인, 세답 상궁 등 다양한 궁녀들이 몸담고 있는 이곳은 권력자들의 눈과 귀가 되는 이들의 음모가 조심스럽게 오가는 곳이기도 하다. “세답방을 일종의 세탁소 같은 개념으로 생각했다. 세탁소라고 하면 대개 천장에 옷을 걸지 않나. 현대적인 관점을 차용해 허공에 곤룡포가 걸려 있는 모습을 구상했다.”(조화성 미술감독) 정조의 백색 곤룡포가 걸려있는 모습은 어쩐지 십자가를 떠올리게 되는데, 조 감독은 “왕의 옷이 곧 왕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겐 하늘 높이 걸려있는 곤룡포가 우상화의 대상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한편 정경희 의상감독의 해석으로 제작된 정조의 곤룡포는 낯설고도 참신하다. “정조가 옷을 자주 바꿔입지 않고 기워 입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청바지 구멍 뚫는 기계를 사다가 옷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돌렸지. 하지만 왕다운 권위는 잃지 않도록 소재적인 측면에서 신경을 썼다.” 정조가 주로 입는 옷은 두벌이다. 집무를 볼 때 입는 흰 곤룡포와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기 위해 사당에 갈 때 입는 삼베옷. 물론 의상팀은 정조를 위해 두벌이 아니라 열벌 이상의 옷을 만들었다. “이제까지 한 영화는 영화도 아니다. ‘그냥’ 곤룡포, ‘그냥’ 내시옷을 만드는 게 <역린>에선 불가능했다.” <혈의 누> <음란서생> <방자전> 등의 사극 의상을 맡은 베테랑 의상감독을 애먹게 만들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의상을 더욱 기대하게 한다.

홍국영, 상책, 혜경궁 홍씨, 살수(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입체적인 캐스팅

<역린>의 캐스팅을 떠올리면 이재규 감독은 배우들로부터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길 즐기는 연출자인 것 같다. 험난한 과거를 가진 정조의 수행 내시 상책(정재영)부터 세속적인 정순왕후(한지민), 피도 눈물도 없는 암살자 살수(조정석), 혈기가 앞서는 왕의 최측근 홍국영(박성웅)까지, 각각의 배우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캐릭터의 특성이 묘하게 엇갈린다. 잘 어울리지 않는다기보다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 느낌이라고 할까. “입체적인 캐릭터를 좋아한다. 강한 면과 부드러운 면이 공존하는, 혹은 마음을 감추고 ‘악어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상황에 놓인 인물들에게 마음이 간다.” 이재규 감독의 취향 덕분일까. <역린>에서 우리는 “‘상남자’ 같으면서도 자상한” 정재영의 두 가지 면모를, “선하고 바른 외모와 달리 충만한 야망을 가진” 한지민을, “선악의 경계를 잘 표현하면서도 남자다운” 박성웅과 “도회적인 이미지를 가졌으나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한” 김성령을 만날 예정이다.

기교 없이, 정조처럼

이재규 감독 인터뷰

-<역린>의 후반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됐나.
=시각특수효과(VFX) 분량의 일부 작업을 하고 있고, 믹싱도 마무리 중이다.

-첫 영화를 연출했다. 처음 예상했던 것에 비해 현장에서 달라진 점도 있을 법한데.
=생각보다 영화 환경에 장점이 많다는 걸 느꼈다. 예전에는 그저 막연하게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는데, 막상 부딪히고 나니 좋은 점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배우, 스탭들과 함께 소통하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좀더 주어진다는 점이 드라마 현장과 가장 큰 차이였다. 이 작품을 하며 주요 스탭들 모두가 감독일 수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드라마의 경우 정말 짧은 시간 안에 최적의 선택을 해야 하는 효율성의 문제가 우선시되는 측면이 있거든. <역린>을 만들면서는 스탭들과 대화하며 효율성보다 중요한 것들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 좋았다.

-현빈이 연기하는 정조에 대한 관심이 높다.
=현장에서 지켜본 빈씨는 사고의 깊이가 느껴지는 배우였다. 정조라는 인물 자체가 감정의 기복이나 진폭, 말의 어투가 잘 변하지 않는 사람이란 대전제가 이 영화엔 있었다. 누구보다 너그러운 사람이지만, 누구보다 무서운 사람이기도 하고. 이런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빈씨는 굉장히 많이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밖으로는 빙산의 일각 정도만 표출해낸다. 그렇게 굉장히 섬세한 연기를 해냈고, 거기에 만족한다.

-시나리오의 전반적인 톤이 비장하더라. 이렇게 장엄하고 고뇌에 찬 인물로부터 오는 매력이 있었다.
=나는 최성현 작가님이 쓴 초고와 시놉시스를 모두 좋아했다. 극의 비장미나 진실성, 상상력이 마음에 들었다. 작가님 작품의 매력을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편집의 리듬이 빠르다는 소문이 있더라. 그렇지는 않다. 숏이나 몽타주의 속도감은 그렇게 빠르다고 보기 어렵다. 이건 영화를 보셔야 알 텐데…. 정숏과 정앵글을 많이 쓰려고 했다. 정직하게 접근하는 방식을 취한 건데, 그건 <역린>의 정서와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정조라는 인물 자체가 기교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봉을 앞두고 어떤 생각을 하나.
=<역린>은 지금 시점의 내 삶이나 연출자로서, 사람으로서의 고민이 들어가 있는 작품이다. 한달 전에는 굉장히 두렵고 무서웠는데 2, 3주 전부터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후반작업하면서 자꾸 영화를 보다보니 ‘아, 내가 영화를 잘못 만들지는 않았구나’ 하는 느낌이 들더라고. 그런데 지금은 또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조울의 상태가 반복되고 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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