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전영객잔] 배우의 얼굴이 우리에게 말을 걸 때
2014-05-01
글 : 김영진|
[신 전영객잔] 배우의 얼굴이 우리에게 말을 걸 때
<방황하는 칼날>

<방황하는 칼날>의 정재영과 <한공주>의 천우희는 전혀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정재영은 <방황하는 칼날>에서 성폭행당하고 죽은 딸의 아버지 이상현으로 나온다. 천우희는 <한공주>에서 본인도 성폭행을 당하고 함께 폭행당한 절친한 친구가 자살한 사건으로 고통받는 한공주로 나온다. 그들의 표정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딸을 잃은 아버지 이상현은 종종 절규하지만 내내 넋이 나가있으며 복수에 나선 길에서도 유령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한공주는 언뜻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그녀가 표정을 보이는 순간은 친엄마나 아빠를 만났을 때, 또는 새로 사귄 친구의 호의에 힘겹게 반응할 때뿐이다.



두편의 영화 모두 선악 구분에 기초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 구도에 호소하는 방법을 쓰지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 기초한 <방황하는 칼날>이 상대적으로 스릴러 문법에 더 가깝지만 이 두편의 영화에서 사건은 더디게 전개되는 편이다. 두편 모두 사건의 전개보다는 사건을 겪은 뒤의 인물의 반응에 더 집중하고 있다. 사건의 전모를 일찌감치 밝히고 시작하는 <방황하는 칼날>이 중반부까지 활발한 리듬으로 전개되다가 천천히 늘어지는 느낌을 주는 건 당연하다. 사건의 전모를 조금씩 조금씩 풀어 놓으며 회상 장면을 간헐적으로 짧게 배치하는 <한공주>는 심지어 관객에게 폐소공포증을 안겨줄 정도다.



표정을 읽고자 하는 이의 혼란



<방황하는 칼날>의 이상현(정재영)은 딸의 죽음을 초래한 가해자들의 마음을 읽을 수 없어 혼란스러워한다. 고등학교 남학생인 가해자들에게는 일말의 가책도 없다. 성폭행에 단순가담한 아이인 김민기조차도 가책에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경찰에 발각되는 것과 평소 이지메를 당했던 아이들의 복수를 더 두려워한다. 김민기의 은밀한 제보로 이상현이 가해학생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 아이는 아직 성폭행 동영상을 지우지 않고 있었으며 심지어 귀가하자마자 그 영상을 반복 시청하며 즐기려 든다. 눈이 뒤집힌 이상현이 그 아이를 때려 죽인 뒤에 조두식이라는 이름의 다른 아이를 처벌하러 강원도 일대를 헤매고 다닐 때 이상현은 자신을 쫓는 형사 장억관(이성민)에게 전화를 걸어 그 당혹감을 토로한다. 그 아이를 죽일 때 아이는 자신의 딸을 죽인 것에 대한 가책이 전혀 없이 아이패드를 사기 위해 진 빚 얘기를 하고 있었고 이 모습은 그에게 커다란 좌절을 안긴다. 가해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사법제도의 모순 이상으로 주인공 이상현이 느끼는 이 도덕적 혼란감이 <방황하는 칼날>의 주된 정서이다.



그건 이상현을 쫓는 장억관과 젊은 형사 박현수(서준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장억관은 친구를 죽을 때까지 때려 죽인 범죄소년을 알고 있다. 그 소년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해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장억관이, 그 소년이 농구를 하며 놀고 있는 학교 운동장을 찾아갔을 때 그 소년은 죗값을 치렀으니 더이상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장억관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적용되지 않는 법체제에 혼란을 느끼면서 이상현을 쫓는다. 그는 이상현이 더이상 범죄를 저지르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범죄자는 죗값을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의 후배인 박현수는 이들보다 더 직선적인 분노를 품고 있지만 그도 흔들리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이상현의 입장에서 도대체 이런 범죄를 아이들이 어떻게 저지를 수 있는지 당혹해하는 입장이다.



이상현이 두 번째로 가해자를 처단하기 위해 여러 펜션을 무작정 돌아다니고 있을 때 이 여정에는 서스펜스가 실리지 않는다. 이상현은 스스로를 벌주려는 것처럼 추운 겨울 눈 쌓인 산길을 돌아다닌다. 장억관은 그런 이상현의 마음을 아는지 얼굴도 모르면서 찾아다니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고 혼잣말하면서 이상현을 동정한다. 이상현이 시종일관 유체이탈한 자의 몸짓과 표정이라면 장억관은 망연자실한 낭패감으로 일관한다. 범죄 현장에 이상현이 출몰했다는 보고를 받을 때에만 그의 눈빛이 분주할 뿐 그는 대개 짜증과 당혹감에 휘말려 어쩔 줄 모른다.



어른들의 이런 표정과는 달리 가해자인 아이들을 비롯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대다수 아이들의 표정은 무구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에 관한 자의식이 없거나 그걸 생각하는 게 귀찮다는 식의 체념의 흔적이 있다. 이상현이 조두식을 찾아 강원도의 어느 학원으로 위장한 매춘굴을 찾아갔을 때 그곳에 기거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학원을 다니는 또래 아이들의 행색과 구분되지 않는다. 누구보다 (이주승이 빼어나게 연기한) 조두식이라는 아이의 표정이 무구하다. 거친 욕설을 하지 않을 때의 그는 천진한 악마처럼 보인다. 영화 중반, 우연히 이상현이 탄 스키장 순환버스에 조두식이 올라탔을 때 조두식은 동상에 걸려 물러터진 이상현의 발을 보고 빨리 병원에 가라고 친절하게 일러준다. 그러다 다리 잘린 사람도 봤다며 의젓하게 충고하는 조두식을 이상현은 바라본다. 끈질기게 자신을 바라보는 이상현을 태연히 응대하며 조두식이 왜 그러냐고 물을 때 두려움을 느끼는 쪽은 관객이다. 아직 이 아이가 범인인 것을 모르는 이상현은 자신이 느끼는 직감 속에서 당황할 뿐이지만 관객은 그가 살인범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아이의 마음에 괴물이 있다는 걸 상기하며 몸둘 바를 모르게 된다. 타인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이 즉물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이 아이들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질문하게 된다.



<방황하는 칼날>은 그에 관한 대답을 주는 영화가 아니다. 그게 이 영화가 취한 윤리적 태도의 특징이다. 영화 말미에 이상현이 대로변에서 형사들에게 포위당한 채 조두식에게 사냥용 엽총을 겨누자 그제야 조두식은 아이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첫 번째로 이상현에게 죽임당한 아이의 반응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조금 다르다. 살기 위해 조두식은 그 순간에도 무구한 아이의 모습과 잔인한 가해자의 얼굴을 오가며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이 대목에서 이상현은 그를 징벌하는 것이 아닌, 괴물이 된 그 아이를 탐문하는 것도 아닌, 절망을 확인하며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는 무력감을 토로하는 듯이 보인다. 그는 조두식의 죄명을 큰소리로 외치고 아이에게 양심의 가책을 호소하고 있지만 딸을 잃은 아버지로서의 그의 호소는 조두식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 이상현의 외침에 형식적으로 대답하고 있을 뿐이다. 조두식은 자수하려고 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그것으로 자신의 뉘우침을 위장하려 한다.


<한공주>

무표정 뒤의 고통



<한공주>에서 카메라는 한공주의 반응하는 모습에 집중돼 있다. 영화 초반, 주변에 둔감한 듯이 무표정을 꾸미고 있는 이 아이의 내면을 짐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녀는 뭔가 끔찍한 일을 겪고 전학을 왔으며 친구를 사귈 생각이 없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영을 배우는 것에만 몰두한다. 공주가 노래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고 새 학급의 친구 은희가 접근하지만 공주는 그녀와 친교 맺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 영화는 뭔가 공주 주변에서 새로 의미 있는 관계가 시작되는 기미가 보일 때면 공주가 겪은 과거의 끔찍한 사건 일부를 회상 장면으로 끌고 들어온다. 미스터리 플롯으로 풀리는 것도 아니다. 조금씩 신중하게 던져주는 정보이기는 하지만 영화 초반에 관객은 충분히 불리한 암시를 받아놓은 상태이며, 영화가 전개될수록 그게 더 확대될 것임을 짐작하는 상태에서 한공주의 무표정 뒤 고통의 심연이 드러나는 것에 두려운 심정마저 갖게 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게 어떤 서스펜스영화를 보는 것보다 조마조마했는데 거의 폐소공포증을 느낄 정도였다.



<방황하는 칼날>과는 반대로 이 영화는 자신을 보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친부모에게마저도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의 눈으로 본 두려운 세상에 관한 이야기다. 공주가 전에 다니던 학교의 선생을 비롯해 공주를 취조하는 형사들, 공주를 가해한 학생들의 부모들은 모두 공주에게 관심이 없다. 학교 선생은 공주의 사건이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형사들은 피해자인 공주가 수치스런 짓을 했다고 모욕하며 가해자의 부모들은 공주에게 어떤 죄책감도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식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나쁜년으로 생각한다. <방황하는 칼날>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것처럼 여기서도 사법제도의 심판은 무력하며 선악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피해자였던 한공주는 여전히 보호받지 못하고 스스로 보호할 능력도 없으며 그녀의 무기력은 해소될 전망이 전혀 없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건 한공주가 전에 다니던 선생의 어머니 집에 임시로 묵게 되면서 알게 되는 선생 어머니인 조 여사의 존재이다. 조 여사는 조그만 마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매우 현실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여자인데 그 지역 파출소장과 불륜에 빠져 있다. 공주의 자그마한 흠결도 용납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그녀는 아들에게 불륜에 빠져 있다고 타박을 들으면서도 오히려 당당한 성격의 소유자다. 소장과의 불륜을 의심받아 그의 아내와 친구들로 보이는 여자들에게 가게에서 구타를 당하는 봉변을 겪은 뒤에도 그녀는 별로 굴하지 않는다. 연애는 가슴 졸이는 과정이 뒤따르는 것이라면서 그녀는 상처를 치료해주는 한공주에게 여유 있게 자신의 상태를 변호한다. 도덕 기준을 초월해 사랑을 즐기는 그녀는 타인의 시선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다. 이 대비는 이 영화가 도덕이나 윤리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교란하고 굳이 거기에 입장 표명을 하지 않는 이유를 드러낸다. 이 사회에서 도덕과 윤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없다. 공주의 아빠가 공주에게 헤어지면서 힘이 있어야 한다고 술에 취해 절규하는 것처럼 누가 힘을 가졌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그런데도 조 여사의 존재는 호감을 준다는 게 놀랍다. 자신을 은근히 따르던 공주가 영화 말미에 집을 나설 때에도 그녀는 굳이 말리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현실적인 존재감이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는 게 어쩌면 소름끼칠 만큼 마비된 우리의 윤리의식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후반부, 공주는 사건의 전모가 언론에 공표되고 조 여사의 집을 나와 찜질방에서 아빠와 통화하면서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낸다. 공주는 무섭다고 아빠에게 울며 전화한다. 이 아이의 두려움은 도덕과 윤리의 경계가 없는 상태에서 갖는 원초적인 두려움이다. 어른들에게 있는 보호막이 자신에게 없다는 걸 절감하며 느끼는 이 두려움에 답변할 수 있는 이가 영화에는 없다. 마지막 장면 직전에 공주가 새로 사귄 합창반 친구 은희는 공주에게 네 잘못이 아니니 빨리 돌아오라는 문자를 남기지만 공주의 동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공주의 전화에 응답하지 않는다. 이 두편의 영화에서 어른들은 무감하고 가해자 아이들은 여전히 사건 전후가 달라진 게 없으며 피해자와 그 주변 아이들은 두려움에 떤다. 이 영화들은 피해자의 마음에 있는 절망의 심연을 우리가 잴 수 없고 재서도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 영화들의 화면 속에는 망설임과 분노와 연민과 당혹감이 떠돌고 있으며 그 때문에 감정적 파토스가 나온다. 우린 너무 불편한 세상을 살고 있다. 아니, 우리 중 일부는 너무 불편한 세상을 살고 있다.



두 영화 모두 배우들의 얼굴이 잔상으로 남았다. 영화가 배우들의 예술이기도 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