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한권의 책이다. 매일매일 비슷해 보여도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몰라보게 달라진 챕터를 마주하고 있다. 배우는 한권의 노트다. 하얀 백지 위에 써넣는 단어에 따라 그 배우가 지닌 이미지가 결정된다. 처음에는 오직 한 단어로 시작한다. 첫 출연작에서 보여준 결정적 이미지가 배우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다음 작품, 그다음 작품이 계속되면서 처음 한 단어를 좀더 설명해줄 말이 더해지고, 문장이 길어질수록 배우의 이미지는 비슷하지만 다르게, 차츰 구체적으로 변한다. 여기 배우 김새론을 설명해줄 단어들을 모아봤다. 당신이 알고 있다고 믿었던, 하지만 미처 모르고 있던 새로운 시선. 김새론을 설명했던 단어들을 김새론의 언어로 다시 들어보는, ‘김새론 사전’이다.
자연인 김새론은 지금 한창 인생의 책장을 넘기는 중이다.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방향을 정하고 꿈을 향해 차분히 걸어가는 중인 이 성숙해 보이는 소녀는 늘 비슷한 듯 보이지만 며칠만 지나도 몰라보게 달라진 얼굴로 우리 앞에 서 있다. 배우 김새론은 이제 제법 긴 설명이 가능한 이력을 써내려가는 중이다. 처음 한 단어는 어두운, 혹은 보호해주고 싶은 보라색을 닮은 아이였다. 하지만 눈을 설명하는 데 수십 가지 표현이 가능하다는 북극의 이누이트족처럼 보라색이라도 다 어두운 것이 아니다. 어떨 때는 신비롭고 다르게 보면 간혹 무섭게 느껴질 때도 있다. 굳이 빨주노초파남보 다채로운 색깔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보라색이라는 큰 범주 안에서도 천변만화하는 색깔을 표현할 수도 있다. 전자가 화려하고 역동적이라면 후자는 깊고 진하며 섬세하다.
연기
“내 눈앞에 펼쳐진 상황들을 관객도 느낄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 그런 연기를 하고 싶다. 또 하나 바람이 있다면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보고 싶다. 하지만 그전에 스스로가 그 역할들을 소화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야 한다. 넓은 배우도 좋지만 그전에 깊이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겉모습보다도 여운이 긴 배우, 내가 느끼는 것들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김새론은 연기 변신에 대한 강박이 없다. 구태여 다양한 역할을 의식하고 무리하게 책장을 넘기지 않는다. 지금 할 수 있는, 눈앞에 주어진 배역에 충실하다 보니 차분한 이미지가 쌓였고, 이미지가 선명해질수록 자연스레 어른스러운 역할이 다시 들어온다. 이쯤되면 한번쯤 의식적으로 연기 변신을 시도해보고 싶기도 하련만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굳이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슷한 역할을 반복하며 틀에 갇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주어진 역할, 유사한 이미지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전혀 다른 표현들을 찾아낸다. 편하게 덩어리로 묶어 ‘어둡다’는 두루뭉술한 단어로 정리해버리려는 이들은 결코 발견하지 못할 미세한 차이들. 김새론은 그 사소한 차이 안에서 매번 연기 변신을 한다. 아니 정확히는 변신이 아니라 확장이다. 어둡다는 이미지에 새로운 단어와 깊어진 표현을 더하고 전혀 다른 캐릭터로 탈바꿈시킨다. <여행자>의 진희와 <아저씨>의 소미, <바비>의 순영과 <이웃사람>의 수연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녀는 이들을 비슷한 인물로 기억하는 우리의 나태함을 새삼 일깨워주는 예민한 촉수를 지니고 있다. 캐릭터를 읽어내는, 미묘한 차이를 잡아내는 김새론의 능력은 그야말로 동물적이라 할 만하다.
어른스러움
“어른들이 기대하는 것과 아이들이 상상하는 게 다르다. 기대를 받는 것과 스스로 되고 싶은 것의 차이? 어른들이 생각하는 어른스러움이란 아마도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다운 밝은 모습의 반대말인 것 같다. 아이답지 않은 모습, 예를 들면 차분하다거나 조용하다거나 하는. 어른들이랑 함께 일하고 늘 곁에 있으니 또래보다 어른스럽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학교에서 의 내 모습을 보시면 또 누가 봐도 또래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 또 한명의 새로운 소녀가 있다. 술 취한 아버지의 폭력과 할머니의 폭언에 익숙해진 아이. 학대받는 일상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중학생 소녀 도희는 늘 몸을 웅크린 채 털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그녀를 마냥 어둡고 불쌍한 아이로 바라보는 태도야말로 그녀를 향한 무관심의 증거다. 도희는 구박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가운데에서도 주눅 들어 처져 있기보다는 늘 긴장해 있는 상태다. 자신의 것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기분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손에 들어온 것은 놓치려 하지 않는다. 타인과 넓게 소통하는 대신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것을 믿으며 타인에게 고통을 되돌려주는 것에도 서슴없다. 다른 이와 공감하기보다는 자신의 세계 안으로 파고드는 아이. 자신의 세계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를 놓치려 하지 않는 욕심 많은 아이. 그게 도희다. 아니 정확히는 ‘김새론의 도희’다. 일견 불쌍하지만 어딘지 알 수 없는 아이 정도의 피상적이 되기 쉬운 캐릭터가 김새론이라는 옷을 입는 순간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다채롭고 미세한 차이들이 표현되기 시작한다. 오직 김새론이라는 이름의 진동으로 가능한 좁지만 깊은 표현 방식이다.
학교
“내 나이로 돌아올 수 있는 장소. 현장은 찍을 때 다 같이 고생하고 서로 이야기도 많이 나눌 수 있으니 정도 많이 든다. 끝나고 나면 여운도 오래 남는다. 충실히 즐기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기억이나 추억 같은 거다. 하지만 학교는 내가 다시 돌아와야 할 장소다. 현장에서도 매번 새로운 걸 배우고 경험할 수 있어 즐겁지만 학교에는 친구들이 있고 함께 머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도희는 욕심이 많은 아이인 것 같아요.” 그간의 역할들과의 차이에 대해 짧게 설명하는 그녀의 단어 안에는 이 캐릭터가 어디로 뻗어나가야 할지에 대한 분명한 방향이 있다. 일찌감치 배우라는 방향을 정한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분명한 의미를 더해 자신의 폭을 넓힌다. 작은 차이에도 깊은 울림을 남기고 비슷해 보이는 캐릭터도 전혀 달라질 수 있는 것은 비슷한 듯 전혀 다른 캐릭터를 꾸준히 관찰하고 연기해온 그녀만이 지닐 수 있는 노하우다. 경력만 놓고 보면 이제 중견 연기자 못지않은 이 어린 소녀는 이미 배우로서 어느 누구도 쉽게 따라하지 못할 공고한 영역 위에 서 있다. 하지만 동시에 자연인 김새론은 아직 호기심 왕성한 소녀다. 학교가 재밌고 친구들과의 수다가 소중하다. 현장에서 틈틈이 <노블레스> <신의 탑> 같은 액션이 화려한 웹툰을 즐겨보는가 하면 때론 혼자 조용히 방 안에서 향초가 타들어가는 소리를 즐기며 감성에 젖기도 한다. 학교생활도, 취미도, 연기도 그녀에게는 생활의 일부일 뿐이다. 서두르지 않고 오늘을 즐기는 김새론에게 인생의 책장과 배우의 노트를 구분지어 설명해달라고 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언제까지나 아이일 것 같던 그녀는 어느새 소녀의 얼굴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숙녀의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 갑작스런 변신도 억지스런 변화도 아닌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러운 변화. 늘 비슷해 보였는데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이만큼 성장해 있는 기특한 배우. 인생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배우의 노트 위에도 잊지 않고 한 단어, 한줄을 더한다. 그 모양새가 예쁘고 사랑스럽다.